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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Marco
Sep 03. 2022
꿈이었으면...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고래
한 마리
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고층 아파트 상공위에서
또 다른 한
마리
가 육중한 모습을 드러낸다.
절찬리에 최근 종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이 무언가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는 향유고래처럼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아무리
공항 근처인 김포라지만 공항에서 승용차로 30분이나 떨어진 지점에서 이렇게 많은 비행기를
보게될
줄이야.
2022
년 8 월 29
일은
지금까지 내 평생에 창공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가장 많이 본 특별한 날이 되었지만
,
태어나서 가장 슬픈 하루이기도 했다.
머리 위에
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시선은 하늘로 향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소심한 사람처럼.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내가 낯선 이곳에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산 동생집에서
요양하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김포의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생처음 가보는 김포 걸포동 쪽으로 차를 몰아
도착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코로나 확진으로 급격하게 혈압이 떨어져서 코로나 병동이 있는 김포로 이송되셨다고 한다.
일주일
전 낮에 어머니를 간병하러 온 간병인에 의해 코로나가 전염되어
집에서 자가치료
중
상태가 악화되셨기 때문이다.
이미 폐의 기능이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좋지 않아 산소호흡기를 차고
계셨다
.
면회는 어려워서 기껏 의사나 간호사를 통해 전화로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희망을 놓지 않고 이틀 밤을 병원 로비 의자에서 쪽잠을 자며 대기했지만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기실에만 앉아있으려니 답답해서
병원 주변
계양
천변 산책로를 무작정 걸었다. 병동에서는 어머니 상태에 변화가 있으면 전화를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접종 한번
하지
않고
지병까지 있는 고령자에게 코로나
확진후
예후는
대부분
치명적이라
는
사실.
무슨 계시를 들려주려는 것처럼 하늘에서 비행기 소음이 계속
끊어질 듯 이어질 때마다 고개는 하늘로 향했다.
휴양지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비행기를 처연하게
바라보는 그때의
내 심정은 절박하기만 했다.
82
년 동
안 한 가정의 귀한 딸로 언니로 누나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왔던 한 생명이 꺼져 가고 있는데
세상은 아무 관심도 없이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
피하고
싶은
전화를 받고 말았다.
오후 6 시 20 분 운명하셨다는 내용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건조했다.
누군가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지고
있는데 저쪽은 그런 통보가
일상적인 듯 느껴졌다.
天
崩
之痛이란
말처럼
하늘은 무너져 내릴 낌새조차 없이
평온했지만
,
무너져 내린 것은
세상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내
마음뿐이었다.
어머니랑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어머니의 부재가
실감 났다.
그 순간에도 몸에 철갑을 두른 고래는
무덤덤
한
표정으
로 머리 위를 지나갔다.
2 년간 어머니의 지난했던 투병생활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 코로나란 복병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 누가 알았을까. 뇌출혈 수술로 혈관성 치매와 반신마비가 되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으셨지만 그동안 잘 버텨
오셨는데..
2
년 전, 머리 수술 후 병원 생활을 하시면서 집안에서 행복이란 단어는 꽁꽁 숨어 버렸다.
어떤 좋은 일이 있거나 기념일이 찾아와도 행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환과 집안에서의 부재가 가족들에게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코로나 상황으로 면회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간병인에게 많은 걸 의지해야 했다. 2 주에 한 번꼴로 주말 휴일 간병인이 집에 쉬러 갈 때는 코로나 검사를 하고 동생과 내가 번갈아 가며 간병을 하러 가야 했다.
일 년 정도 지난 후, 입원 치료의 효과가 없다고 병원에서 퇴원을 요구할 때 첨으로 어려운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머니를 집에
모실 수 있는 상황이 안돼서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있을 때
형제 중에 하나뿐인
여동생이
자신의
집에서 모셔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갸륵하고
고마운
생각
이었지만,
동생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낮에는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의
도움을 받더라도 밤에
섬망 증상이 있는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기는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코로나 상황에서 요양병원에 모시면
면회도 맘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집에 모시고 가족들이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갖게 하자는 동생의 의견을
마낭
반대할수만
없었다.
그 이후
, 주말 휴일에는
네끼
드실
죽을 사들고
이틀 동안 어머니를 돌보러 가야 했다.
주중에 매일 밤 잠도
제대로
못
이루
고 어머니를 돌보는 동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으로 버텨냈다.
돌아가시면 이런 시간조차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어머니랑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고맙게 느껴졌다.
그동안 어머니께 소홀했다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시간을
주신 거라 생각하며 결혼 이후 분가해서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가끔, 본인이 혼자 걷지 못하는 것을 잊고 화장실
가야 한다고 신발을 가져오라고 하거나 시장에 가야 한다고
외출복
을 입혀 달라고 할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보청기를 빼면 듣지도 못하시면서
귀에서 빼어 바닥에 던지거나 식사를
안
하겠다고 입안에 밥을 뱉어 내는 등
돌발행동
을
하
실 때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자정 넘은 시간에 잠을 잊고 "아버지, 어머니" 하며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
머니를 부를 때는 아무리 나이 들어도 어머니 역시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나약한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밤에
주무시기 전 혹은 휴일,
유트
브로 천주교 미사 방송을
시청하며 묵주를 쥐고 성호를 긋고
한손으로
기도하실때
는
내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졌다.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계시는 걸 보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절실하게
느꼈
다.
장례를 무사히
치른 후,
가족들이 모였을 때 동생이
어머니의 유언을 촬영한 동영상을 공개했다.
올해 초여름 어머니 정신이
맑으셨을 때
촬영했다고 한다.
입을 떼기 힘든 상황에서 어머니는 또렷한 목소리로
가족들 개개인에게 차근차근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구순
이 다되어 가시는 아버지께는 그동안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다시 태어나서 만나면
잘해주겠다고
. 애들 말 잘 따라가며 화합하며 살라고.
며느리에게는 옛날하고 틀리니 자식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가족들 잘 챙기라고.
다음으로 나를 호명하며 말씀을
하실 때 순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아들아, 밥 먹었니?. 난 지금 먹었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좋은 거 먹고 다녀. 밤늦게 다니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
그동안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중심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시겠지만
자식 누구든 포용하고 감싸 안아 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마음을
의지했던
든든한
버팀목
이기도 했다.
투병생활 중, 옆에서
어머니를
지켜
보며
얼마나 강인하고
대단하신 분인지
새삼
느낄수 있었다.
충청도
보령 땅
선주집
십
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아버지와 결혼하여 우리 삼 남매를 낳으시고 둘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등
마음
고생을 하시다가
속절없이
가버리
시니
안타까울 뿐이다.
"
엄마!
이제 모든 걱정 다 잊고 편안하게 쉬세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끝까지 챙겨준
여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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