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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행복

운탄고도를 가다

by Marco

이름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길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둘레길, 올레길부터 해파랑길, 산소길, 호수길, 소풍길, 솔바람길, 자락길 등등.


길의 박람회를 열 수 있을 만큼 많은 길들이

등을 내밀고 자신의 등을 밟아보라고 유혹한다.


반면, 점잖게 "고도"라는 이름을 가진 길도 있다.


“고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걷기도 만만치 않을 “오지의 길”이 떠올랐다.


얼마나 높은 곳에 있길래 “고도”라는 이름이 붙였을까? 설마, 히말라야 고산지대 같은 곳이라 숨 쉬기조차 힘든 길이 아닐까 상상을 했다.


중국 윈난성에서 네팔, 인도까지 이어져

차와 말을 교역했다는 높고 험준한 길 “차마고도”처럼


강원도에 과거 석탄과 광부들을 차에 싣고 탄광으로 이동했다는 “운탄고도”가 있음을 알았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 정도로 높은 길이어서 한자로 구름 “운”자를 썼나 했는데 구름과는 상관없었다.


그래도, 평균 해발 고도가 600 미터이고

그중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정선 만항재 높이가 1330 미터나 된다고 하니 가히 고도라 할만하다.


이름에 끌려 한번쯤

걷고 싶은 바람이 있었지만, 강원도 오지의 길이라 교통편이 불편하 혼자 걷기엔

위험하단 생각이 들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음을 접으려던 순간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운탄고도의 시작점이 영월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마음은 다시 운탄고도를 향했다.


영월은 작년에 영월역에서 청령포 초입과

단종이 묻힌 장릉까지 하루종일 걸어본 경험이 있는지라 심리적인 거리가 멀지 않았다.


매년 4 월 이 지역의 가장 큰 축제인 “단종 문화제”가 말해주듯 영월은 조선시대 비운의 왕, 단종의 고장이다.


단종이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

유배생활을 했다는 “청령포”와 “관풍헌” “장릉”,


매년 동강 국제 사진제가 열리는

사진 박물관과 3 대에 걸쳐 순두부 맛집으로 소문난 "김인수 할머니 순두부 집"에서

점심으로 먹었던 시그니처 순두부 등.


일 년이 지났음에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운탄고도는 폐광지역을 따라 정선, 태백, 고한, 삼척으로 이어진 9 개 코스 총 173km 나 된다고 한다.


지난 일요일 오전 7 시 30 분

청량리발 무궁화 열차를 타고 영월로 향했다.


청령포 주차장 근처에서 시작되는 운탄고도

1 코스를 출발해 세경대, 각고개를 지나 동강변 팔괴리 카누마을까지 약 10 km를 걸었다.


초록으로 채워진 숲과 유장하게 흐르는 강을

눈과 가슴으로 담으며 강물처럼 길 위를 흘러갔다.


적절한 위치에 설치된 이정표를 따라 다리를 건너고 숨을 고르며 고개도 넘었다.


그럼에도, 사람의 발길이 뜸한 숲길을

지나거나 물결이 휘돌아 흐르는 강가옆 잔도를 걸을 때는 멧돼지라도 나오면 어쩌나.


잔도가 무너져 강바닥으로 추락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이 좀 나기도 했다.


이제 1 구간의 일부를 걸었는데

어느 세월에 정선, 고한을 지나

길의 목적지인 삼척까지 걸을까?


서울에서 오기도 쉽지 않은 길을 어쩌자고

첫발을 내디뎠나? 당일코스로 조금씩

걸어서 이 길을 걷기 위해 몇 번이나

더 기차를 타야 하나?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앞으로 가야 할 여정이 막막했다.


당장 닥치지도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반드시 목적지를 향해

전구간을 걸어야만 할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해왔 듯 걷는 순간을 즐기면 될 것을..


쉬운 길만 찾아갈 생각이거나

걷지도 않은 길을 미리 걱정해서야

세상의 모든 길을 걷겠다고 하는 건 오만이다.


언제부턴가 주말 혹은 휴일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를 걷는 게 일상이 되었다.


쉬운 길이든 어려운 길이든 따지지 않고

가급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으려고 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 아닌 방황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걷는 것임을.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온 길과 가야 할 길임을.


걷는 이유나 목적은 달라도

걷는 여정에서 떠오른 생각, 읽은 책들, 만난 사람, 몸소 겪은 일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목적지를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내가 바라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고난이 옆에 있는 것처럼 행복도 길을 걷는 여정 속에 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안목이 없다면

아무리 옆에 있어도 모를 뿐이다.


앞으로 인생길에서 난 무엇을 보게 되고

어떤 인연을 만들어가고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면 아직도 마음이 설렌다


걸어야 할 운탄고도의 다이내믹한 여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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