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세상은 우릴 잊었어
고진옹과 허수인, 노래를 이어 부른다.
부르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신나는 음악인데, 구슬프다.
고진옹, 허수인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허수인 형님이 하도 틀어놔서 입에 붙었네.
고진옹 양팔을 벌리고 비행기처럼 날아다니던 모습이 선한데.
허수인 정말 비행기처럼 날아갔네.
고진옹 철없어 보였지만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어.
허수인 용감한 사람이었고.
둘은 먼 곳을 응시한다.
허수인 우린 해고를 철회할 때까지 절대 내려가면 안 돼.
사이.
고진옹 결국 성호형처럼 끝나려고?
허수인이 고진옹 쳐다보면.
고진옹 형님은 알고 있었을 거야. 곧 죽을걸. 그래서 저 애들 노래를 계속 부른 거야. 두려우니까. 두려운데 극복이 안 되니까. 정의로 뭉친 주먹이다,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멋지다 신난다 하면서.
허수인 고진옹!
고진옹 가끔은 성호형이 저 노래 부르면서 울컥하는 거 몰랐지?
허수인 형님, 아팠잖아. 고혈압도 있었고, 허리디스크도 있었잖아.
고진옹 그렇다고 굴뚝에서 내려간 지 일주일 만에 죽어? 고혈압으로 디스크로 사람이 죽어?
허수인, 고진옹의 멱살을 잡고 한 대 치려다 만다.
허수인 그만해! 약해빠진 새끼!
허수인이 멱살 잡은 손을 풀며 고진옹을 냅다 뒤로 던진다.
고진옹 성호형, 이 좁은 굴뚝에서 병 걸린 거야. 비행기병, 우울병, 불신병, 사람병, 세상병.
착잡해진 허수인, 마른세수한다.
고진옹 그만할래.
허수인 멈칫.
고진옹 이제 그만 내려가자.
허수인 성호형이 죽었어!
고진옹 처음엔 기자들이 구경이라도 했잖아. (아이패드를 가져다 화면을 넘기며 보여준다) 이젠 신문에도 뉴스에도 어디에도 우리 얘길 찾아볼 수 없어. 우린 투명 인간이 된 거야. 노조에서도 교섭이다 협상이다 운 뗀 지 한참인데, 조용하잖아.
허수인 성호형 추모제 하면서 다시 상기되겠지.
고진옹 상기시키려고 몇 명이 죽어야 하는데? 벌써 19명인데, 관심받으려고 계속 죽어 나가야 해?
허수인 넌 도대체 그런 정신으로 왜 올라온 거야?
고진옹 불면증으로 하루 세 시간도 못 자. 눈 붙이면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굴뚝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꿔.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도 쫓겨나는 꿈을 꾼다고.
허수인 오늘 약 먹었어?
고진옹 신경안정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난 요즘 솔직히 서운하다 못해 억울해. 아래에선 이 고통을 알기나 알까? 센 바람에 굴뚝이 휘청하면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데. 조금만 더 버티라고 쉽게 말하잖아. 날 걱정하기보다 이용하는 데 급급한 것 같아.
허수인 말도 안 돼! 오해야.
고진옹 오해? 도대체 아래에선 뭘 하는데? 도대체 왜 협상을 못 하고 1년을 넘기는데? 왜 성호형이 죽어나가도록 놔뒀는데.
허수인 사쪽이 어떤 사람들인지 까먹은 건 아니지? 과로에 사망하고, 추락해 사망하고, 폭발해서 사망해도 산재를 안 해주는 사람들이야. 회사에 인생 바쳐도 필요 없으면 먼지 털 듯 털어버리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이랑 협상하는 게 쉬울 리 없잖아.
고진옹 내 말이 그 말이야. 회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 있어 봤자 희망 고문만 당하는 거야.
허수인 약한 소리 집어치워!
고진옹 난 사실 며칠 전부터 내려가고 싶었어.
허수인 성호형을 위해서라도 접으면 안 돼!
고진옹, 반응이 없고.
허수인 미안하다. 내가 또 욱해서.
고진옹 지상에서 75m야. 여기 유기견이 있어도 이렇게 무관심하진 않을 거야. 차라리 유기견이었다면, 떨어질까 얼어 죽을까 걱정할 거라고.
허수인 너 불쌍하다는 소리 듣고 싶어? 동정받고 싶어 징징대는 거야?
고진옹 이제 아무도 못 믿겠어.
허수인, 고진옹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
허수인 정신 차려! 너 지금 성호형 죽어서 힘든 거야.
고진옹, 허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고진옹 성호형 이혼한 거 알았어? 성호형 고시원에서 죽은 거 들었어? 뭘 위한 건데? 우리가 이러는 게 뭘 위한 거야? 가족이랑 헤어지고 고시원에서 죽기 위해 고공농성을 1년 넘게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다같이 복직하려고 올라왔는데. 난 가족들이랑 잘살아 보려고 올라왔는데, 여기 갇혀버렸어.
허수인 조금만 힘내. 다 왔어.
고진옹 지부에서 생계비 대주는 것도 말이 많대. 애도 고3인데 학원 하나 못 다니고. 윤미는 생활비 대느라 온종일 뛰어다니고.
허수인 다 어렵지. 해고된 사람 중에 너만 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어?
고진옹 도대체 왜 그렇게 잘난 척해?
허수인 …….
고진옹 날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바로 너야!
허수인 우리 이러지 말자.
고진옹 안 힘든 척, 안 흔들리는 척하는 거, 재수 없어.
허수인 여기 올 때, 그만한 각오 안 했어? 힘들 거, 몰랐어? 왜 툭하면 징징대는데. 지금 내려가면 뾰족한 수가 있어? 오히려 더 불리해져. 무슨 일이 있어도 합의를 끌어내야 해. 그때까진 못 내려가!
고진옹 왜 이렇게 늘 차가운데.
고진옹, 뒤로 천천히 걸어간다.
고진옹 왜 위로를 못 해주는데.
고진옹, 울컥하며 몸을 돌려 굴뚝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본다.
고진옹, 휘청하는데, 이때, 핸드폰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