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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난 이작가 Nov 15. 2022

이제 철이 든 거야

08. 이제 철이 든 거야

4     

한우근 사장실

 

팀장 서지만과 사장 한우근 앉아 있고, 반대편에 고진옹 앉아 있다. 

고진옹, 사인한다. 

서지만은 사인한 서류를 정리한다.      


서지만    사장님, 1년 넘게 굴뚝에서 농성하던 고진옹 씨입니다. 

한우근    사인했지?     


서지만, 한우근에게 계약서를 보여준다. 

한우근, 고진옹에게 손을 내밀고, 둘은 악수한다.    

  

한우근    잘해 봅시다. 안상태 국회의원이랑 오래된 사이라고? 

고진옹    …….

한우근    그만한 백이 있는데, 참 힘들게 사시네. 

서지만    약속한 대로 정규직으로 다시 복직됐습니다. 

고진옹    감사합니다. 

한우근    노조 활동은 확실히 끊은 겁니다. 

서지만    계약서 내용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우근    통닭도 다 로봇이 튀기는 시대에 무슨 구닥다리 노조야, 노조는. 자동차도 로봇이 만드는 세상이 안 올 거 같아? 사람들 일자리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 세상이 오는데, 주제 파악들이 안 돼. 

서지만    그렇습니다. 

한우근    이제 계약서에 합의한 사람은 얼마나 되나?

서지만    많습니다. 지금이 복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죠. 회사 이미지에 먹칠한 것도 봐줬는데. 

한우근    안상태 의원 말로는 고진옹 씨가 실추한 회사 이미지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던데. 노력 좀 해줘요. 아무래도 영향력이 있을 테니. 

서지만    걱정 마십시오. 언론사 인터뷰도 다 잡아놓았습니다.   

   

고진옹이 서지만을 쳐다보자,     


서지만    고진옹 씬 운이 좋아. 사장님이 특별히 인사팀 팀장을 부탁하셨어.      


고진옹, 말이 없자,      


서지만    별로 달갑지 않나?

고진옹    감사합니다. 

한우근    노조 한다고 어울렸으니, 그 누구보다 사람들을 잘 알겠지. 

서지만    그럼요. 

한우근    우리 회사는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해. 외국기관들 투자 조건이 20% 구조조정이야. 생산 공정에 문제가 생겨 리콜도 많고, 툭하면 파업해서 영업 손실에 신제품 출시도 늦어졌고. 재정상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서지만    답답한 일입니다. 이렇게 희망퇴직 받는 회사가 요즘 어딨어요. 그냥 정리해고시키지.      


고진옹, 몸이 굳는다.      


한우근    회사 운영에 문제가 없으면 왜 정규직 전환을 안 시키고, 왜 복직을 안 시키겠어. 나도 책임자로 힘든 일이야. 그동안 일자리 주고 월급 줬는데도 죄다 날 나쁜 놈이라고만 하니. 

서지만    밑에서 일만하고 위에서 운영은 안 해 봐서 그렇죠. 

한우근    세상 흐름을 봐야 하는데. 로봇 프로세스에 인공지능이 오는 시대인데, 노동자들 인권 문제 따위로 발목을 잡으니. 그 잘나가던 코닥이 왜 망했어? 디지털 세상이 판치는데 필름에 안주하다 그대로 사라졌잖아. 보증 서주거나 빌려준 돈 떼이는 건 그래도 나아. 손실이 작으니까. 시대를 못 따라가면 사라져요. 모두 쓸어간다고. 에휴, 이런 현실을 알아야 말이 통하지. 협상이니 뭐니 하자고 앉으면 그저 속 좁게 자신들 이득만 따지고.      


고진옹, 앉아 있기 괴롭다.      


한우근    그래서 그동안 협상이 안 된 거예요. 고진옹 씨. 

서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합의서에 사인했으니, 느끼는 게 있겠죠.    

   

한우근이 일어나자 서지만도 따라 일어난다. 

     

한우근    이번 업무부터 잘해주세요. 원래 강성 노조들이 성실하지. 안 그런가, 서 팀장?

서지만    그럼요.    

한우근    아, 미안해요. 이제 노조는 아니지. 아무튼 집념을 왜 쓸데없는 데 써. 일하는 데 써야지.  

    

한우근이 나간다. 

서지만, 깍듯이 인사하고, 고진옹도 일어나 따라 인사한다.   

   

서지만    인수인계 받고 바로 근무 들어가면 돼. 한 번 더 주는 기회니까 실망시키지 말고.      


고진옹, 고개 숙인 채, 멈춰 서 있다. 

서지만, 고진옹 어깨를 툭툭 치고 나가려 한다.      


고진옹    팀장님.      


서지만, 멈춰 선다.      


고진옹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이 정말 많나요?

서지만    사인하든 안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 자네가 할 일은 20% 맞춰 감축만 하면 돼.  

고진옹    전 그냥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서지만,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고 고진옹에게 다가간다.    

  

서지만    (단단한 목소리) 고진옹! 당신 덕분에 1년 넘게 회사가 악덕 기업처럼 욕을 먹었어. 사장님이 뭐가 고맙다고 당신을 고용하겠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진옹,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찔하다.      


서지만    이젠 보답을 해야지.      


서지만, 나간다. 

정적, 무겁다. 

고진옹, 그대로 주저앉는다. 착잡하다. 

잠시 후, 허수인 들어온다. 

허수인, 들어오자마자 고진옹에게 달려든다.  

    

허수인    사실이야?     


고진옹, 대답이 없다.     


허수인    사실이냐고?

고진옹    그래.

허수인    고작 이러려고, 고작 이러려고…….

고진옹    …….

허수인    너 잊었어? 성호형이랑 저 지옥 같은 굴뚝에서 했던 말. 전기도 끊기고 물도 얼어서 내일 눈뜰 수 있을까 두려울 때.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무서울 때. 네가 그랬잖아. 포기하지 말자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고. 

고진옹    그래! 그래! 그랬어! 그땐 그랬어. 그러면 뭔가 될 줄 알았어. 사람이 바뀌고 회사가 바뀌고    세상이 바뀔 줄 알았어. 적어도 그 어두운 터널만 뚫고 나오면 합의도 되고 모두 정규직도    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어. 

허수인    순진한 척하지 마. 

고진옹    그땐 순진했어. 적어도 그땐. 

허수인    다시 돌아와. 당장은 힘들어도 꼭 좋은 때가 올 거야. 

고진옹    훗. 사장이 그러더라. 개인한테 당하면 몇 푼 잃지만, 시대에 뒤처지면 전부를 잃는대. 내가 세상을 못 읽었던 것 같아. 인권이 중요한 시대가 아닌데. 뒷방 늙은이처럼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세상에 대고, 다 같이 잘 살자고, 다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우습다. 그치? (씁쓸한 웃음)

허수인    그래서 너 혼자 잘 살아 보려고?

고진옹    성호형 죽고 자식들한테 빚만 남겼어. 우리 준호, 그놈 공부 잘하는 게 윤미 유일한 낙인데 대학도 안 간대. 그렇게는 안 하고 싶다. 잘 살진 못해도 얼마 안 남은 인생, 뭔가 가족한테 도움 되다 가고 싶다.   

허수인    뭐가 그렇게 조급해? 너 정신과 상담 좀 받아. 오랫동안 굴뚝에 있어서 지금 갈피를 못 잡는 거야. 

고진옹    난 너랑 달라. 너처럼 계산 없는 사람이 아니야.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해. 내가 굴뚝에 올라간 것도 내가 의롭다는 걸 보여주려 했는지도 몰라. 고작 공장에서 일하지만, 적어도 난 정직하다, 난 의로운 인간이다, 그걸로라도 생색내고 싶었나 봐.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어서.  

허수인    자학하지 마. 굴뚝에서 긴 시간 동안 견딘 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야. 

고진옹    무슨 의미? 헛된 희망이었지. 바닥까지 가 보니 알았어. 그 밑에 더 캄캄한 심연이 있다는 거. 헛디디면 그대로 끝이라는 거. 이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갈 거야. 돈도 벌고 권력도 생겨야 뭐라도 바꿀 수 있어.      

허수인, 단념한 느낌.      


고진옹    굴뚝에서 소리쳐 봤자 밥 달라고 징징대는 애 취급밖에 못 받아. 

허수인    무슨 말을 해도 다 변명이야. 

고진옹    변명이라 해도 내 선택이야. 

허수인    난 너 이해 못 하겠다. 굴뚝에서 고통이 널 변화시킨 건지,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고진옹    이제 철이 든 건지도 모르지.      


허수인, 고진옹을 바라본다. 

고진옹,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나 나간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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