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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Nov 26. 2021

절망속에서도 자살하지 않은 이유

키에르케고어의 「죽음에 이르는 병」속에 나타나 있는 절망



내가 터널에서도 죽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극심한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살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보다 더 깊은 본원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자살이 종착역이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나는 자살할 수 없었다. 죽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죽음의 해결조차 적용되지 않는 철저한 절망속에 나는 잠겨있었다.

키에르케고어는 절망에 빠져 있으나 죽지 못하는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절망의 고민은 사람이 그 병으로는 죽을 수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따라서 절망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의 상태와 극히 흡사하다-그는 누워서 죽음에 시달리면서도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을 지경으로 앓고 있다는 것은, 곧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이 경우에 있어서 가망성이 없는 정도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최후의 소망, 즉 죽음의 소망조차 없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中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는 절망에 대해 깊고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책 제목은 절망하면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결코 죽을 수 없는 병,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병, 자살하여도 해결되지 않는 절망을 뜻하고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절망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절망이란 희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통속적인 고찰은 전적으로 옳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절망은 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안심이나, 생활에 대한 만족, 기타 그와 유사한 온갖 것이 있지만, 사실상 바로 그것이 절망인 것이다. 한편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몹시 심각한 성격이기 때문에 자신을 정신으로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거나, 아니면 괴로운 사건에 부닥치거나 무서운 결단을 강요당하여 자신을 정신으로 자각하게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하더라도 사람이란 이 두 개의 형중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절망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란 두 말할 것 없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中


그는 인간은, 그의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면, 절망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절망이라는 상태는 인간의 실존이 놓여있는 고유한 그물인 것이다. 인간은 모두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고 그것을 인식하느나 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 무지할 때, 인간은 자신을 정신으로서 의식하는 일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자신을 정신으로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바로 절망인 동시에, 그것은 정신을 상실한 절망으로, 그 낱낱의 상태를 살펴보면, 완전한 무기력의 상태, 즉 한갓 무위의 생활이기도 하고 혹은 활기에 넘친 생활이기도 한 여러 가지 상태이겠지만,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그 은밀한 정체는 절망인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中


절망속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절망은 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외톨이(단독자)인 인간으로서 직접 하느님과 대면하여 현존한다는 현실성을 지녀야만하고, 따라서 또 결국 그 결과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죄가 하느님을 맞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사실은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진실하고 따라서 모든 순간에도 진실하다. 사람들은 일상화된 것처럼 이런 말을 하고, 또 그것이 일상 생활화되었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막바지까지 가서, 인간적으로 망해서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졌을 때, 그때야말로 이것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 그때의 문제는 하느님에게는 일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의지가 그에게 있느냐 없느냐, 즉 그에게 믿을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성을 잃기'위한 완벽한 공식이다. 즉,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기 위하여 오성을 잃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中


인간의 현실적인 고민들의 대부분은  '오성'의 틀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오성에 따라 살펴봤을 때 나의 상황은 절망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 오성을 벗어나서 본다면 나의 상황은 실존하는 단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성을 잃은 사람에게 신은 다가온다. 오성을 잃은 사람에게만 진정으로 신이 다가온다. 인간적으로 망해서 아무것도 없을때 나에게 남은 것은 신을 믿을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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