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 때 처음 접한 철학서가 버트란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나는 그때 러셀이 누군지도 몰랐고, 경험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경험주의자로서의 러셀의 철학적 인식론을 누구나 동의하는 철학의 기본적인 태도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서양의 지혜', '행복의 정복' 등의 책을 읽으며 러셀의 철학과 세계관을 알게 되었다. 또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알게 된 후 러셀의 역설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에 한동한 천착하기도 했다. 학술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고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사례를 찾고 이를 불완전성 정리와 연결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십 년 정도를 그러한 사유를 계속 해왔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러셀과 러셀의 철학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러셀을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러셀 철학에 대한 소책자를 읽었고 그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특히 러셀의 인식론을 다시 살피게 되었는데, 내가 막연하게 기억하는 대철학자의 인식론이라기에는 너무 알맹이가 없고 다른 논리에 의해 비판되기 쉬운 것이어서 놀라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현재 국왕은 대머리다'라는 말을 '(1) 대한민국의 국왕이 있다 (2) 오직 단 한 명의 대한민국 국왕이 있다 (3) 대한민국의 국왕은 그것이 누구이든 대머리이다'라고 바꾸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은 이를 '(1) X가 있는데, 그 X는 대한민국 국왕이다 (2) 다른 모든 Y에 대하여, 그 Y가 대한민국 국왕이라면, 그 Y는 X와 같다 (3) X는 대머리다'로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길게 나열한 명제들은 결국은 '대한민국의 현재 국왕은 대머리다'로 요약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이 명제가 거짓인지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러셀이 뻔하고 동어반복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긴 글들을 썼던 이유가 무엇인가? 학술적으로 매력 있고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지만 철학적인 개념의 핵심으로 가면 불필요하게 자세한 기술이라고 생각된다. 결국은 동어반복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러셀은 인식론에서 '감각 재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흄의 경우 '인상'이라는 용어가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러셀의 '감각 재료'는 물질적인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물리적 대상의 표면 일부일 수도 있고, 빛이나 소리의 파장일 수도 있고, 관찰자의 신경계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러셀에게는 이 감각 재료를 일으키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고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물체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물체와 관련된 우리들의 경험을 설명하기에 훨씬 단순하기도 하고, 나외에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물체에 대해 동일한 경험을 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셀도 인정했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들 그리고 우리의 경험들 외의 것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가설'로부터 어떠한 논리적 불합리성도 귀결되지 않는다. 단지 이러한 가설은 '대상들이 진짜로 존재해서 우리에게 감각을 일으킨다고 보는 상식적인 가설'보다 덜 단순할 뿐이다. 단지 단순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흄의 인식론, 유아론을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진리의 기초에 대해 그토록 철저했던 러셀이 단순성을 이유로 물리적 세계를 인정하고, '직접지'에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논리적 원자론'은 '세계는 단순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지며 그 개별자들마다 단순한 속성들을 가지고 다른 개별자들과의 단순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러셀은 '개별자', '속성', '관계' 등의 용어를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이 형이상학에 주는 새로운 지식은 무엇일까? 거의 없다고 본다. 단순히 형이상학의 명제들을 세분화하여 더 단순한 명제들의 결합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러셀은 형이상학을 연구하며 언어적인 명제의 분석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형이상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들이 무엇인지, 그들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들을 바탕으로 어떠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형식적인 엄밀함을 추구한 나머지 실제로 얻게 되는 소득이 별로 없게 된 것이다. 형이상학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눈을 업그레이드시켜 줘야 한다.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주어야 한다. 확실한 것은 러셀은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리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초기에 러셀은 윤리학 역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 가능한 영역으로 보고 객관적 진리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러셀은 선과 악은 욕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참과 거짓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고 판단하고 윤리학은 지식의 영역 밖에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다시 바뀌어 선과 악의 문제가 취향의 문제처럼 단순하지 않으며 윤리적 판단이 주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유보적 견해를 지니게 된다. 러셀의 윤리학에 대한 관점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바뀌었지만, 어느 때도 선악이 무엇인지, 선악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윤리학의 주제들이 어떤 범주적 속성을 지닌가에 대한 사유만 있을 뿐 윤리학의 실제에 있어서 어떠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접근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답을 얻기를 바란다. 윤리학의 명제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러셀은 뛰어난 수리논리학자였다. 그의 사상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것은 과학적인 이성의 사용이었다. 하지만 과학적인 이성의 사용만으로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이성을 극단으로 사용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러셀의 명제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추론들이 논리학자들에게는 학술적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생활인이 우리에게는 별다른 통찰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인생 여정, 사회운동, 지적 교양을 위해 했던 저술들이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최소한 내가 철학을 통해 알아내고자 하는 질문의 답이 러셀에게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나를 철학으로 인도해준 철학자가 러셀이지만, 그의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들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