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미 May 06. 2024

운명의 여신, 그리스편에 서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1)


 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의 반란 (BC499~BC493)을 6여 년 만에 진압하고 다시 그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던 그는 이오니아 반란을 뒤에서 도왔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징벌하고 이참에 그리스 전체 도시국가를 페르시아 영역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제국의 위협 요소를 아예 제거해 버려야겠다는 또 다른 야망을 품게 된다.


패르시아의 영토


 이미 다리우스 1세 때 최대 영토를 확보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손에 넣기만 하면 전 세계를 평정하는 모양새가 되어 더 이상 제국 내에서 반란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왕은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총 20만 명의 병력을 주며 그리스를 침공하도록 명령한다.

 이번 원정에서 육군과 해군을 동시에 출발시킨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를 침공하기에 앞서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제국영향권에서 벗어났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먼저 복속시킨 후 그리스 본토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페르시아 군의 예상 진격 루트(1차 그리스 원정)

 하지만  이번 원정에서 운명의 신은  페르시아편이 아니었다.

헬레스폰토스를 돌아 남하하려던 페르시아 해군이 원래 풍랑이 심하기로 유명한 아토스만이란 곳을 지날 무렵, 때마침  불어닥친 거센 폭풍을 만나 그만 함대의 삼분의 일 이상을 잃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마케도니아에 머물고 있던 육군 또한 트라키아의 한 부족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며 마케도니아 정복과정에선 이민족에 의해 총지휘관 마르도니스까지 부상을 입게 되었다.

연이은 악재로 페르시아 군은 어쩔 수 없이 그리스 원정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아토스만

 첫 그리스 원정 실패로 기록된 이번 출전을 페르시아 전쟁사에 넣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페르시아입장에서는 영 성과가 없었던 은 아니었다.

 

 우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회복했고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 인들에게 페르시아가 엄청난 수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을 보여줌으로써 제국의 위엄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491년, 더 이상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지 다리우스왕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그리스의 거의 모든 폴리스가 이에 응했던 것과 달리, 페르시아 사절들을 처형함으로써 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힌 곳이 있었으니 바로 스파르타와 아테네였다.


 이 두 나라가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데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당시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는 자신이 실각시킨 이전 왕, 클레오메네스가 페르시아에 강경 정책을 펼쳐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테네에겐 좀 더 복잡한 이유들이 있었다.

이전, 스파르타와잦은 교전 당시, 페르시아에 도움을 구하러 갔다가 한동안 굴욕적인 관계를 맺었던 사실이 있었으며 당시 참주제를 싫어해 자신들이 내쫓았던 참주 히피아스가 페르시아로 망명해 있었는데 페르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히피아스를 다시 그들의 참주로 받아들여야  는 상황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복종과 굴욕보다 자유와 민주제의 선택을 확고히 함으로써 다음 해인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침공을 감내해야 것은 그리스의 예정된 숙명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오니아의 반란' 에필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