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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적동 Oct 13. 2023

저는 왜 당신이 끔찍할까요.

혐오하는 존재에 대한 프랑스에서의 소회

오래전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아파트 화단에서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5살이었습니다. 희뿌옇게 기억이 나는가도 싶지만 어쩌면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 숱하게 들은 탓에 덧 그려진 기억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엄마는 그토록 끔찍한 당신에게 어찌 그리 경계하지 않고 다가갈 수가 있었느냐고 제게 두고두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때 당신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제게 신기하고 귀여움에 가까운 존재이기만 했으니까요. 이것만은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당신이 제게 끔찍한 존재가 된 건 아마도 11살의 여름 당신이 우리 집에 와 같이 지내면서 인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과 살게 된 것이 무척 좋았지만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처음 우리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엄마는 격양된 채로 극구 반대했지요. 엄마는 당신을 소름 끼쳐했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당신을 혐오하게 된 것이. 대개 그렇듯 그 또래의 어린 자식들은 엄마의 호불호와 감정 같은 것들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흡수하고 배우니까요.

당신이 무서워진 나는 집에서 최대한 당신을 피해 다녔습니다. 결국은 당신은 떠밀리듯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그렇게 갑작스럽게 당신에게서 호의를 거둔 것이 배신을 한 것 같아 한동안 나는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얼마간은 당신을 잊고 살았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게 된 건 티브이 속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능숙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정말로 재회하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였습니다. 언제가 제가 알바를 하던 팡테옹 근처의 식당에 당신이 방문했던 날을 기억하지요? 당신은 친구들을 여럿 데리고 왔었죠. 저는 깜짝 놀라 굳은 얼굴을 하고 당신이 사라질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느꼈던 혐오의 감정이 제게 관성처럼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한 저의 모습에 실망했을까요.
 
이곳 프랑스에서 당신은 꽤나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학부 때 같이 살던 하우스메이트 마고도 집주인 장자크도 같이 미술사 수업을 듣던 앙투완과 디미트리도 당신의 팬이었으니까요.
 
에펠탑이 보이는 샴드막스 정원에서 제가 친구들과 빙 둘러앉아 치즈와 와인을 안주삼아 수다를 떨던 어느 가을 저녁도 기억하지요? 그날도 당신은 당신 친구들과 늠름하게 걸어 우리에게로 왔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지요. 친구들은 그런 저를 너무하다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이쯤에서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을 하라고 태어났을 텐데, 내가 당신의 존재를 그저 습관처럼 혐오했던 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더 이상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신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제 와서 당신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퍽 어색하지 않을까요. 그저 멀리서 각자의 생을 응원해 주는 사이로 지내면 어떨지요.













이름조차 부르기 두려웠던 당신, ‘쥐‘에게.



낭만의 도시 파리라기엔 프랑스엔 쥐가 참 많다. 쥐를 본 날 보다 안 본 날을 세어보는 게 나을 정도로. 쥐를 보지 않은 날이 행운의 날 같이 느껴졌지만, 지금 나는 행복한 삶을 위해 쥐를 네 잎클로버로 치환해 버렸다. 쥐를 본 날을 행운의 날로 정한 것. 행운에 겨운 날들은 내게 숱하게 찾아왔다.


프랑스 북부 지방 도시에서 친구들과 셰어하우스에 살았던 때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 계단에 발을 내디며 생각했다. 어서 올라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널브러져 버려야겠다고.  순간 계단 바닥에서 거무스름한 노끈 같은 것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니 그것이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생쥐의 꼬리였다. 물컹한 것이 발에 밟혀 발을 들어 보았다. 꼬리의 주인이 죽은 채로 납작하게 누워있었던 것이었다. 온몸에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았다.


아래층에 사는 집주인 장자크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가 사채를 치웠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며칠 뒤 옆 방의 하우스메이트는 말했다. 부엌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서 쥐 사채를 또 발견했다고. 그 무렵 나는 잠을 자려던 순간에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불을 끄고 자려고 누웠을 때마다 났던 그 바스락 소리는 어쩌면 그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내 방은 복층의 구조였다. 식사와 작업 같은 생활은 아래에서, 잠은 위층 침대에서 잤다. 어김없이 바스락 소리가 들리던 어느 새벽 4시쯤이었다. 나는 섬뜩한 생각을 떨치고 싶었는지, 용감해지고 싶었는지, 아니면 바보가 되긴 싫었는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등불을 켰다. 그 순간 내가 책을 읽고 누워 쉬던 소파 위에 떡하니 서있는 생쥐와 눈이 마주쳤다. 작지만 작지 않은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나는 아래층으로 완전히 내려오지 못하고 계단에서 얼어있었다.


대체 이 디즈니 만화 같은 상황은 무슨 일이지. 그때 알았다. 뜯지도 않았던 빵봉투가 왜 매번 세계지도의 어느 작은 나라처럼 비뚤비뚤 뜯겨 있었는지. 나는 그 빵을 매일 잘도 먹었던 거다. 


날이 밝자 장자크에게 연락해 흥분된 말씨로 사실을 알렸다. 그는 내 방에 와 쥐구멍이 있나 살펴보았다. 오래된 유럽식 건물인 탓에 내 방엔 쥐구멍이 세 개나 있었다. 세면대 아래에 있던 한 구멍 앞에서 그가 또 죽은 생쥐 사채를 발견했다. 아주 끔찍해 죽겠다고 호들갑 떨던 나를 보던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 꼭 어린아이 같구나"

그가 손으로 쥐꼬리를 잡아 들어 사채를 내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뭐가 무섭다고, 쥐는 너를 해치지 못해. 착하지. 오히려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는 너야."

그는 사채를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어버렸다.

그러곤 사채를 만지던 그 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다시 한번 말했다.

"어이구 뭐가 무섭다고"


그는 쥐약을 놓아야겠다는 말을 하곤 사라졌다. 나는 입꼬리를 내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내린 채로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 그대로 비닐에 싸서 버렸다. 갖가지의 항균세척용품을 구매하여 집구석구석을 뒤집어엎어 쓸고 닦았다. 쥐들이 내 방에서 디너파티를 벌였을 거란 사실을 생각하니 한기가 몰려왔지만 집을 버릴 순 없었으므로 이를 앙다물고 청소를 했다.


장자크가 놓아준 쥐약은 아주 유혹적이었는지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쥐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드르럭 드르럭. 소리가 들리면 쥐구멍을 응시했다. 구멍에 꽂아 놓은 비누같이 생긴 새파란 쥐약은 달싹달싹 거리며 내 눈앞에서 마구 흔들렸다. 나는 생각했다. 얼마나 맛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쥐약을 먹으러 오는 건지. 돌아버리겠다.


나는 미술 작업을 하던 지점토와 강력테이프 따위 같은 것들로 쥐구멍을 두텁게 채워 넣어 제대로 막아 버렸다. 처음에는 쥐들이 ‘어라, 자주 가던 단골 빵집 문이 왜 닫혀있지’하는 모양이었지만 이내 그 재료들은 사각사각 쥐의 뱃속으로 들어가 구멍은 뚫려버렸다. 그때 또 알았다. 쥐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먹을 수 없는 것을 찾는 게 더 힘든 일이라고. 나는 내가 팅커벨에게 당하는 아둔한 거인 같이 느껴졌다.


드디어 끈질긴 검색 끝에 은인을 만났다. 쥐가 철수세미만큼은 갉아먹지 못하다는 누군가의 댓글을 읽은 후에야 쥐들의 단골 빵집은 폐점을 맞았고 나는 삶을 되찾았다.





파리로 이사 온 후에도 그 존재들을 숱하게 만났다. 에펠탑이 있는 샴드막스 정원에선 상기된 관광객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 사이를 늠름하게 걸어 다니는 대왕쥐들을 나는 자주 목도했다. 비 오는 어느 밤에 노트르담 성당 앞 거리에서도. 지하철 승강장의 의자 뒤 틈에서도. 철도가 다니는 레일 위에서도. 지하철 역 출구 앞 도로에서도. 퐁피두 뒤 언덕에서도. 개선문 앞 길가에 있는 유리창 너머의 영업이 끝난 어느 빵집 안에서도….


어쩔 도리 없이 쥐라는 존재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쥐를 이토록 혐오하는 걸까. 내가 아는 한국인 어른 중에 쥐를 애호하는 사람을 본 적 있던가. 못 본 것 같은데, 되레 나처럼 혐오하는 사람들은 보았어도.


5살의 나는 장자크처럼 죽은 쥐의 꼬리를 잡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끔찍해한다. 11살의 나는 햄스터를 무척 기르고 싶어서 수개월간 용돈을 모았다.


목표치의 용돈이 모아졌던 디데이였다. 속셈학원을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가 갈색 줄무늬가 있는 꼬리가 짧은 햄스터 두 마리와 플라스틱집, 쳇바퀴, 톳밥과, 먹이를 샀다. 그리곤 곧장 집에 가서 엄마에게 짠 하고 손에 올린 햄스터를 보여주었다. 그 순간 나의 엄마는 귀를 제외한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을 크게 벌린 채로 귀청이 떨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쥐새끼 당장 치워!" 기겁을 하던 엄마를 본 이후, 나는 왜 꼬리도 길지 않은 귀여웠던 햄스터가 무서워졌던 걸까.


엄마는 친구네 가족이 여행을 가는 동안 굶주렸던 햄스터가 자신의 가족을 잡아먹어 발견했을 땐 머리만 남아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는 들쥐에게 물려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아들이 있었다는 한 택시기사 아저씨의 사연을 들었다. 고등학교 친구는 쥐를 보는 것이 끔찍해서 실험결과를 자주 보여주는 건강이나 식품 다큐 같은 것을 잘 못 봤다. 들이나 잔디 같은 자연으로 나들이를 나갈 땐 진드기나 유충 그리고, 그들을 옮길지도 모르는 들쥐를 주의하라는, 청결을 유지하여 쯔쯔가무시병을 예방하라는 티브이 광고 사이에 나오는 안내 방송을 보았다. 이처럼 설치류에 대한 흉흉한 정보와 소문 같은 것을 드문드문 접했다. 이것은 학습된 혐오구나. 


내가 이곳에서 만난 프랑스인들과 외국친구들 대부분은 쥐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지만 무서워하거나 혐오하진 않는 듯한 반응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본능적 혐오는 아니라는 건데. 무엇보다 놀라고 두려워서 도망가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내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멀찍이 뒤로 빼면 조금 유별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 마저 했다. 샴드막스 앞 정원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수다를 떨던 순간이 그랬다. 어김없이 엄마쥐와 자식쥐가 다가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몇 발자국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고 서있었고, 그런 나를 친구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서 말없이 바라보았다. 


북프랑스에서의 대학시절엔 손바닥 만한 혹은 그보다 큰 눈이 빨갛고 꼬리가 긴 흰색 혹은 회색의 쥐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학우들도 이따금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디즈니 친구들과 함께 등교하곤 했다. 그 학우들과 수업을 함께 듣거나 대화를 나눌 때면 그들의 후드 티에 달린 모자나 겉옷 주머니 같은 곳에서 쥐가 빼꼼 튀어나곤 했던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순간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매번 놀라 내 미간은 우그러졌지만 동시에 익숙해진 장면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중 한 친구 마고는 나의 하우스메이트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쥐가 꼭 큰 바위 얼굴의 사람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작다는 문장을 칭찬으로 주고받는 한국에서 얼큰이는 불호의 존재이므로. 이곳에서 "당신 얼굴이(머리가) 크시네요" 하면 '음 뭐 그런가. 그렇구나' 할 뿐이고, 간혹 누군가는 되레 자신이 똑똑하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므로. (반대로 어학시절에 한국인 동기들이 외국인에게 칭찬을 하려고 "얼굴이(머리가) 작으시네요" 했다가, 프랑스 친구와 남미 친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후에 얼굴이 작은 그 외국 친구들은 말해줬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고. 비꼬는 건가도 싶었고 무례한 거 아닌가도 싶었고 의도가 뭔지 몰라 조금 이상했다고.)


공기가 조금이라도 데워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공원이나 세느강변으로 바게트와 염소치즈 같은 먹거리와 깔개를 싸들고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이 많다. 깔개로 쓸 천 따위를 가져오는 사람보다 가지고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미처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그냥 자연에 누워 그 순간을 즐긴다. 내가 이따금 이곳에 동화되지 못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면, 그중 몇 가지는 이런 순간이다. 아직도 쥐의 출현을 신경 쓰는 탓에 깔개 없이는 편히 눕지 못하는, 오롯이 그 자연에 나를 맡기지 못하는 순간. 그 존재가 다가왔을 때 몇 발자국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고 서있는 나를 나의 연인과 친구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서 말없이 바라보던 순간.  그저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쥐를 끔찍해하는 사람일까.


사진은 몽소 공원(parc monceau)에 피크닉 갔던 어느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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