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모락모락 모락산 자연 바위 볼더링

패드를 메고 등반지까지 가는 게 크럭스...!

by 씩씩한 클라이머

1.

자연 바위 볼더링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이다. 작년에 처음 클라이밍을 배울 때 강습을 해주셨던 강사님께서 자연 바위 볼더링을 다녀온 영상을 가끔 보여주셨는데, 실내 암장에 있는 인공 홀드가 아니라 진짜 바위를 잡고 볼더링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약간의 문화 충격을 받았다.


사실 바위에서 볼더링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은 "와,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가 아니라 "피부가 너무 따갑지 않을까?"였다. 당시에는 그냥 홀드를 잡기만 해도 손끝 피부가 따가웠기 때문에 바위를 잡고 오른다는 건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지금은 손끝 피부도 두꺼워지고 굳은살이 많이 생겨서 루트 세팅이 막 끝난 후의 깨끗한 홀드나 신생 암장의 새(!) 홀드를 잡을 때, 또는 홀드를 너무 많이 잡아서 손끝 피부가 살짝 갈렸을 때가 아니면 아니면 피부가 따갑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거의 없는데 바위를 잡고 등반을 한다면 계속 새 홀드를 잡고 오르는 느낌이 들 것 같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몇몇 암장에서 자연 바위 등반을 목표로 하는 클래스나 일일 등반 투어를 운영하는 걸 봐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2.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자연 바위 볼더링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선생님께서 다음 주는 실내에서 수업을 하지 말고 자연 바위에 나가보자고 제안하신 것이다. 대답을 하기까지 한참 망설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클라이밍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니 바위를 등반하는 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는 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드렸다.


선생님과 자연 바위 볼더링을 하러 떠난 곳은 바로 서울에서 멀지 않은 모락산이다. 미리 검색을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모락산에는 총 두 군데의 볼더링 지역이 있는데 우리는 유명한 '크롱 바위'가 있는 계원예대 근처로 가기로 했다. 크롱 탈출, 라스트 크롱 등 유명한 문제가 많은 크롱 바위에는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난이도의 문제가 없지만 근처의 다른 바위에 VB ~ V2 정도의 문제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내가 자연 바위 볼더링은 처음 해보니 V2도 쉽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등반을 하러 가기 전에 미리 인스타그램에서 모락산 볼더링을 다녀온 분들의 영상을 보며 VB ~ V1 문제를 찾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나마 평이해 보이는 V2 문제도 몇 개 찾아뒀다.


3.

전날 미리 등산 배낭을 꺼내서 짐을 챙겨뒀다. 자연 바위 볼더링을 하려면 추락 시 부상을 방지하는 크러쉬 패드가 꼭 필요한데 나는 아직 패드가 없기 때문에 암벽화와 초크, 삼각대, 간단한 간식 등만 챙겼고 어프로치(등반지까지 이동하는 것)를 위해 신발은 경등산화를 신기로 했다.


당일에는 선생님과 함께 모락산으로 이동했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선생님이 여러 개 챙겨 오신 크러쉬 패드를 나눠서 메고 등반지까지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패드가 보기보다 가벼운 것 같아서 패드를 메고 걷다 보면 좀 힘들 거라는 선생님의 말에도 "에이, 패드가 별로 무겁지도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씩씩하게 대답했었는데 패드를 메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갑자기 5톤짜리 돌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먼 옛날에 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지을 때 등에 돌을 지고 나르던 인부가 된 심정이랄까? 내가 다 죽어가는 것 같았는지... 선생님께서 중간에 잠깐 쉬자고 하셔서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다시 걸었다.


"저희...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예요...?"라는 말이 160bpm으로 뛰는 심장과 함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무렵에 등반지에 도착했다. 선생님께서는 모락산에 있는 바위들을 잘 알고 계셔서 내가 보여드린 영상만 보고 영상에 나온 바위를 찾아주셨다.

V1 Tree Spotters

제일 처음 도전한 문제는 V1 'Tree Spotters'이다.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바위 바로 뒤에 있는 나무가 스팟(등반자가 추락할 경우에 크러쉬 패드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밀어주고, 예상 추락 지점으로 패드를 옮겨주는 등의 행위)을 봐주는 것 같은 구도라 저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문제 아래 크러쉬 패드를 두 장 깔고 바위에 하얗게 표시된 등반 라인을 따라서 야심 차게 등반을 시작했는데 스타트 후에 홀드를 네 개도 못 잡고 떨어졌다. 심지어는 선생님께서 패드 안으로 안전하게 잘 밀어주셨는데도 패드에 주저앉다가 뒤로 한 번 데굴데굴 굴렀다...! 생각보다 피부가 따갑지는 않았지만 인공 홀드와는 달리 바위에 있는 홀드는 눈으로만 봐서는 얼마나 깊이 잡히는지 짐작하기가 조금 어려웠고 실내 볼더링 문제처럼 발 홀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서 밟기 좋은 지점을 알아서 잘 찾는 게 중요했다.


그래도 다행히 두세 번 더 붙어보고 감을 잡아서 내 첫 바위 볼더링 문제를 무사히 완등할 수 있었다!


자연 바위에서는 '탑아웃(바위 위로 완전히 올라가는 것)'을 해야 완등으로 본다는데 바위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두 번째로 등반한 V0 문제는 거의 등반 라인을 따라 옆으로 쭉 가다가 탑아웃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라서 한 번에 완등을 했다. 세 번째로 시도한 이름 모를 문제는 거의 3.6-7미터 정도 올라가서 탑아웃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예상 추락 지점에 미리 패드를 두 장 겹쳐 깔아주셨고, 중간까지 올라간 후부터는 "그 높이에서는 절대 떨어지면 안 되니 홀드를 쳐서 잡지 말고 천천히 손을 뻗어서 확실히 잡은 후에 올라가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세 번째 문제는 리치가 긴 나에게도 홀드 간격이 조금 멀게 느껴질 정도였고 탑아웃을 할 때 바위 위쪽이 안 보이는 상태로 잘 잡히는 홀드를 찾아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발로 밟을 수 있는 부분이 좋았기 때문에 추락하지 않고 무사히 완등을 할 수 있었다!


내 등반을 마치고 크롱 바위에서 선생님께서 등반을 하시는 걸 구경했는데 영상으로만 보던 크롱 바위를 실제로 보니 신기하기도 했고 바위의 작은 홀드에 훅을 걸면서 등반하시는 선생님과 다른 분들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크롱 바위에서 제일 쉬운 문제가 V4 라스트 크롱이라고 하는데 나도 내년 봄이나 가을에는 한 번쯤 그 문제를 완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처음에 패드를 메고 산길을 올라올 때만 해도 솔직히 두 번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산길에는 잔뜩 신이 나서 선생님께 다음에 바위에 한 번 더 오면 안 되냐고 물어보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패드 밖으로 구르는 바람에 새로 산 티셔츠도 더러워지고 몇 번 신지 않은 암벽화도 흙 범벅이 됐지만 그런 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피부가 따가울 것 같다는 걱정과는 달리, 실제로 자연 바위를 잡고 등반을 해보니 손끝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촉감이 너무 좋았고 등반 라인을 따라 올라가다가 탑아웃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도 컸다. 따로 정해진 발 홀드가 없기 때문에 직접 잘 밟히는 지점을 찾아 발 홀드로 쓰면서 등반하는 게 재밌었다. 등반 중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 낙엽이 쌓인 산길을 걸을 때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탑아웃을 하면서 위를 봤을 때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도 구름도 정말 예뻤다. 자연 바위 볼더링을 직접 해보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감각이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로 더클라임에서 첫 빨간색 문제를 풀었을 때와 더불어 손에 꼽을 정도로 행복했던 날이라 이 날의 경험을 오래오래 기억에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5.

집에 오자마자 크러쉬 패드를 두 개나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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