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쩌면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인 일
2024년 연초에 잠시 시간이 빈 틈을 타 집 근처 클라이밍장에서 체험 강습을 받으며 시작한 클라이밍이 어느덧 2년 차를 맞았다.
이제는 적응이 됐지만,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암장에 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암장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고 신기한 것도 많이 알려주신 강사님 덕분에 이 낯설고 어려운 운동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내 첫 암장과 첫 번째 강사님,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신 분들은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가 운동 중에 문득 떠올라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추억의 장소가 사라지면서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 행복하면서도 조금 슬픈 일이다.
2.
방금 전에 배운 것도 잊어버리고 헤매던 왕초보 시절을 지나, 운동을 계속하면서 이 정도면 이제는 초보는 탈출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감이 붙으니 그레이드 욕심이 생겨서 한동안은 운동을 재밌게 하는 것보다 높은 그레이드를 푸는 데 매몰되어 있었다. 누가 어떤 그레이드를 푸는지 한눈에 보이는 클라이밍의 특성상 그레이드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 시기에는 내가 푸는 테이프 색깔이 그날의 기분을 좌우할 정도였다. 그래서 등반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에는 이렇게 못할 거면 운동을 그만하고 그냥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고 실력도 더디게 늘어도 등반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재밌어서 계속 한 운동인데, 고작 테이프 색깔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속상해하고 마음을 썼는지 모를 일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등반이 신기할 정도로 잘되는 날과 평소에는 쉽게 되던 것도 안되는 날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서야 나는 등반이 안되면 안되는 대로 아쉽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실내 암장 밖으로도 눈을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실내 볼더링 그레이드 욕심이 줄어들었다.
실내 암장 밖에는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있었고, 할 수 있는 게 참 많았다.
패드를 메고 힘들게 올라갔던 산길, 처음 만져 본 바위의 감촉, 등반 중에 바위 옆에 있는 나무에서 애벌레가 내려와서 오도 가도 못했던 순간, 주위가 온통 노랗게 보일 정도로 예뻤던 가을 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본 분홍색 노을, 리드 등반을 하면서 처음으로 홀드를 잡고 15m나 올라가 봤던 거, 제동줄을 놓칠까 봐 너무 긴장돼서 어떻게든 무사히만 마치고 싶었던 첫 빌레이 테스트, 꽃이 흐드러지게 핀 외벽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등반을 한 날 같은 건 두고두고 다시 꺼내보고 싶은 추억으로 남았다.
2년 전에 클라이밍을 처음 배울 때는 손가락도 따갑고, 높은 곳도 무섭고, 강사님이 몇 번을 알려준 것도 계속 헷갈려서 과연 이 운동을 오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그래도 클라이밍이 너무 좋아서 해 볼 만큼 해 보지도 않고 그만두기는 싫다는 마음으로 이어왔더니 즐거운 경험도 많이 하고 좋은 분들도 만나게 됐다.
클라이밍을 하면서 어깨와 손가락, 손목이 자주 아파서 사실 나에게 유익한 취미는 아닌데도 클라이밍이 이렇게 좋은 이유가 뭔지 줄곧 궁금했는데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그냥 이유 없이 좋은 것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너무 좋아하면 그 대상을 위해서 평소에는 하지 않을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인 일까지 하게 되는 것처럼, 나도 그런 마음으로 클라이밍을 좋아하는 것 같다.
4.
나에게는 주변에 거의 이야기하지 않은 운동 목표가 있다. 언젠가는 더클라임에서 회색 난이도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쉬운 보라색 문제를 만지고 있는 내가 얼마나 오래 운동을 해야 회색 문제도 하나쯤 풀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마음으로 계속 열심히 하면 못 이룰 목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자주 헤매고 틀리고 속상해하고 시행착오를 겪었던 이 시기를 나중에 다시 돌아봤을 때 그래도 후회 없이 즐겁게 운동한 날이 많았다고 기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