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강습 두 번과 첫 개인 강습을 받고 나니 클라이밍이 내 인생 운동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첫 강습이 끝나고 곧바로 암벽화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3천 원만 내면 클라이밍장에서 암벽화를 빌릴 수 있지만 나는 어떤 운동을 시작하든 장비를 먼저 완벽하게 갖춰야 직성이 풀리는 장비병이 있어서 내 암벽화가 가지고 싶었다. 게다가 3천 원씩 10번이면 3만 원, 20번이면 6만 원인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초급자용 암벽화는 대략 8-10만 원이면 살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30번 이상 클라이밍장에 간다면 암벽화를 빌리는 돈이나 사는 돈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다.엄마가 생일 선물로 암벽화를 사준다고 하신 것도 구매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 강습을 해주시는 강사님에게 오늘 수업 후에 암벽화를 사러 간다고 하니 가성비와 적당한 성능을 두루 갖춘 초급화를 추천해 주셨다. 그리고 암벽화를 사러 가면 사장님이 분명히 작은 사이즈를 권하실 텐데, 초보는 암벽화 때문에 발이 아프면 클라이밍을 즐기기가 힘드니까 그냥 발에 잘 맞는 사이즈로 달라고 하라는 귀중한 조언까지 해주셨다!
강사님이 추천해 주신 모델은 매드락의 드리프터이다. 매장에 가는 길에 검색을 해보니 초급자용 암벽화로 유명한 제품인 데다 가격도 괜찮고 회색 베이스에 짙은 빨간색이 포인트가 되는 깔끔한 디자인이 정말 예뻤다!
매드락 드리프터. 출처: 암벽닷컴
내가 방문한 매장은 친절하게 발 사이즈를 재주고 발에 잘 맞는 암벽화를 추천해 준다는 블로그 후기가 많았던 5가기어(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위치)이다. 매장이 위치한 골목에 들어서니 각종 등산 용품과 클라이밍 용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해서 5가기어까지 걸어가는 길에 신나게 구경을 했다. 리드 클라이밍을 할 때 쓰는 하네스와 로프, 다양한 크기의 등산 배낭 등이 시선을 끌었다.
5가기어는 늘 손님으로 붐비는 편이라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다행히 손님이 나를 포함해서 둘 뿐이었다. 사장님에게 초급자용 암벽화를 사러 왔는데 일단 매드락 드리프터를 신어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의자에 앉으라고 하셨다. 사장님이 주신 비닐을 발에 씌우고 신기한 기구에 발을 넣어서 발 사이즈를 정확히 측정한 후에 드디어 암벽화를 신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으로 사장님이 가져다주신 드리프터를 신어 보니, 앞부분이 너무 좁아서발가락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하나 더 큰 사이즈를 신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밍장에서 빌려 신었던 대여화랑은 차원이 다른 압박감! 인간을 싫어하는 거인이내 발가락을 한 손으로 쥐어서 으스러뜨리려는 느낌이랄까?"옛날에 중국 상류층 여성들이 작고 예쁜 발을 만들기 위해 했다는 전족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황당한 생각마저 들었다.
암벽화는 작게 신는 게 좋고 일단 발만 들어가면 맞는 거라는데나는 이 암벽화를 신고 몇 분만 있으면작년에 강아지랑 펜션에서 놀다가 미세 골절됐던 새끼발가락이다시 골절될 것만 같았다. 단순 염좌인 줄 알고 발가락이 욱신거리는 데도 며칠 지나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일주일 동안 헬스장도 가고 강아지랑 한 시간씩 산책을 했었는데, 주변의 권유로 방문한 정형외과에서 미세 골절 진단을 받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어쨌든, 발가락이 아픈 건 신발의 문제가 아니라 내 발볼이 유독 넓은 편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쁜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는데 넓은 발볼 때문에 살 수가 없다니... 아니, 어쩌면 내 엄살 때문인지도...?
침울한 표정으로 사장님에게 발볼이 넓은 사람에게 편하게 잘 맞는 초급화는 없냐고 여쭤보니 다른 암벽화를 가져다주셨는데 라스포르티바의 타란튤라라는 모델이었다.
라스포르티바 타란튤라. 출처: 암벽닷컴
타란튤라는 발볼이 넓게 나와서 그런지 정말 편했다. 발가락이 으스러질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타란튤라를 신으니 과장 조금 보태서 12cm 하이힐을 신다가 운동화로 바꿔 신은 것 같았다. 암벽화의 특성상 평소에 신는 운동화처럼 편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발 앞부분의 압박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은 디자인인데, 사람의 발가락뼈를 형상화한 것 같은 이상한 무늬가 특히 그랬다(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거미 다리인 것 같다).
이걸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더 디자인이 괜찮은 모델은 없을까 싶어서 사장님에게 "혹시 좀 예쁜 암벽화는 없나요?"라고 여쭤봤다. 같은 매장에 다녀온 분들의 후기를 읽을 때 예쁜 신발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가 사장님에게 혼났다는 내용을 봤는데, 나는 이미 발가락이 부러질 것 같다고 한 차례 소란을 피운 후라 그런지 혼나지는 않았다. "예쁜 암벽화를 신으려면 발은 포기해야 해요"라는 대답을 듣고 군말 없이 타란튤라를 사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암벽화를 넣고 다닐 신발주머니는 서비스로 받았고, 암벽화 관리에 필요한 신발 탈취제를 함께 구매했다.
암벽화가 든 쇼핑백을 들고 집에 오는 내내 너무 들떠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빨리 클라이밍장에 가서 대여화가 아닌 나만의! 새! 신발을 신고 강습 때 배운 내용을 연습해보고 싶었다.
집에 오자마자 가족 단톡방에자랑할 인증샷도 찍고 이미 매장에서 몇 번이나 신어본신발을 다시 신었다 벗었다 하며 수선을 떨었다. 낯선 냄새가 나는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자 간식이라도 사 온 줄 알고 달려왔던 우리 집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