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딸이였나

1. 나는 이 집 아이?

by 사람이되는중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건, 내가 대학 1학년 2학기,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였다.

처음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집 청소도, 냉장고 정리도, 화장실 청소도.
그저 어릴 때 동생에게 자주 해줬던, 남은 반찬들을 볶아 만든 볶음밥 하나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혼자서는 서툴고 어설펐다.
그럴 때마다 친구가 와서 도와줬다.
수건을 예쁘게 개는 법, 옷을 각 맞춰 개는 법,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문득, 아빠가 왜 늘 "아이들한테 집 정리하는 법 가르쳐야 한다"며 화를 내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이 깨달은 건,
‘내 곁에 어떤 어른이 있었는가’가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그 단순하지만 무거운 진실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혹시 *『나는 이 집 아이』*라는 웹소설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된 작품인데, 학대받으며 자란 여주인공이 입양을 통해 사랑을 받아가며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전형적인 육아물, 치유물이다.

이야기 중반쯤, 여주인공이 마탑에 붙잡혀 끔찍한 실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과 의식을 분리해 버린다.
몸이 어떤 고통을 겪어도 의식은 그것을 느끼지 않게,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반복한다.


“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울지 마.
울지 마.

저 자식에게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지 마.”

나는 이 집 아이 43화 中


나는 이 소설을 중학교 1학년, 열네 살 때 읽었다.

당시 우리 집은 사랑과 평화와 약간의 다툼보단 공포와 두려움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안폭탄을 껴안고 살았다. 여기서 시안폭탄이란 불과 기름 같은 아빠와 엄마를 말한다.


중학교 시기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었다.

“아빠를 따라갈 거야, 아니면 나랑 이 집에 남을 거야?”
이혼서류는 내가 공부하던 지금은 아빠가 쓰시는 방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시기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동생들을 데리고 근처 놀이터나 지역 도서관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밤마다 엉엉 울며 내게 말했다.
“아빠 같은 남자 만나면 여자는 불행해져.”

내가 엄마말에 동조하면 엄마는 나를 사랑해 주셨다. 나는 그 사랑이 너무나 고파서 엄마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면 나는 다시 엄마한테 맞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내가 굼뜨고, 멍청하고, 무식하니까 맞아도 싼 돈 잡아먹는 벌레라서.


그래서 그저, 맞았다.


솔직히 말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집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학교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가깝던 친구들이 하나둘 나를 피했고, 나는 급식 시간마다 혼자 밥을 먹었다.
사춘기 시절, 친구 없이 혼자 급식을 먹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지, 겪어본 사람들은 알 거라고 생각한다.
넓은 급식실, 내 양옆으로는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수다 떠는 친구들 무리들.
그 가운데 나는 급식판에 코를 박고, 누가 볼까 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밥을 먹었다.

정말 쓸쓸했고,
너무나 힘든 시기였다.

숨이 막혔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집에서는 부부싸움이 나면 동생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애들을 데리고 가야만 했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의 센드백이 되어야만 했고 집안은 늘 거지꼴이였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나는 정말 자주 아팠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숨을 쉬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나는 이 집 아이였다』는 책을 읽게 되었다.
당시 이 웹소설은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다행히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단행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 책은 총 3권이었고, 제법 두꺼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밤, 그 책을 몰래 읽었다.
그리고 위의 대목—주인공이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를 반복하며 자기 최면을 거는 장면—을 읽다가 엉엉 울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렇게 자기 암시를 반복하며 살아보려 했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정말로 그렇게 외치며 버텨봤다.

그랬더니 덜 힘들었냐고?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힘듦도 변함없었다. 그치만 위로 받긴 많이 받았던것같다. 책속의 주인공은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면서 끝나니까. 나도 언젠간.... 그런 생각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빠가 내가 엄마에게 맞고 다닌다는 사실,
그리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고등학교 졸업여행으로 아빠가 계신 베트남에 가서 대화를 나누다가였다.

그때까지 아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도 네가 왕따 당하는 거 아는데 그냥 넘기래.”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 집에는 내 편이 없구나.’
‘나는 완전히 고립됐구나.’

그렇게 생각했고, 결국엔 그냥 순응하고 받아들였다.

내 마음은 마치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다리 하나 잘린 채로 서커스 묘기를 부리는 원숭이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누르고, 그렇게 버텨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엄마는 일부러 우리가 아빠를 미워하게 만들었고,
내가 왕따를 당한 사실조차 자신의 이야기 속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는 내 아픔은 봐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아픔과 고통만 알아달라고 했던 거였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착한 딸이고 싶어서,
내 마음과 목숨과 생명을 갈아 넣어가며 맞춰주려고만 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게 허탈해졌다.
그때의 심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