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기 가득

눈 내린 아침과 아버지의 손

by 최순옥
프롤로그 — 느린 아침의 빛

3월의 초입, 계절은 이미 봄을 향하고 있었지만 새벽 공기에는 여전히 겨울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3월 6일 아침. 출근길에 집을 나서니 밤새 눈이 내려 마당 위를 조용히 덮고 있었다. 장남교를 건너는 길, 멀리 보이는 감악산은 하얀 설산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속도를 늦추었다. 산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눈은 그 위에 잠시 머물다 다시 봄에게 자리를 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삶도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 머무는 시간과 움직이는 시간이 모여 결국 하나의 계절을 만든다는 것을.



본문 — 작은 손의 하루

눈 내린 아침, 장남교와 감악산

눈 내린 아침의 공기는 특별하다. 소리가 줄어들고 마음은 또렷해진다.

장남교 위에서 바라본 감악산의 능선은 눈 덮인 하나의 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차를 세우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은 잠시 세상을 덮지만 결코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그 아래에는 여전히 길이 있고 나무가 있고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삶도 그렇다. 잠시 덮여 있을 뿐 사라지는 것은 없다.



주소 하나를 바로잡는 일

아버지 집의 주소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았다.

88년 동안 살아온 집이지만 실제 주택 번지가 아니라 지산제, 제사를 지내는 곳의 번지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그대로 사용되어 온 주소였다.

이번에 실제 주택 번지로 정정을 요청했다.


담당 공무원은 주소 정정이 아니라 전입신고 절차로 처리해야 한다며 민원 사유를 기재해 달라고 안내했다. 설명이 간단하게 이루어져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면사무소를 나서며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랫동안 민원 창구에서 일을 해 온 사람으로서 민원인에게 행정은 단순한 서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직접 연결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달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려 노력해 왔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나를 돌아본다. 나는 과연 그 다짐을 지금도 잘 지키고 있는지.


시골 행정의 아쉬움

시골에는 고령의 독거노인이 많다. 대부분 스마트폰 사용도 익숙하지 않다.

연천은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되어 2026년부터 2027년까지 2년 동안 월 15만 원의 지역화폐가 지급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정책도 어르신들에게는 쉽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는 현재 관외 요양원에 입소해 계셔 조건에 따라 두 달 정도만 지급 대상이 된다고 한다.

행정 안내가 조금 더 세심하게 이루어졌다면 어르신들이 이런 제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정은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직장 위원 접수와 또 다른 준비

직장 위원 접수가 진행 중이다. 접수 마감은 9일까지다.

3월 6일 오후 4시 기준으로 6명을 모집하는데 이미 5명이 접수했다. 이 흐름이라면 인원이 초과될 가능성이 높다.


인원이 넘으면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관련 규정도 다시 확인하고 필요한 절차도 차분히 정리해 보고 있다.

일이라는 것은 늘 그렇다. 지금의 상황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장면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다음 일을 준비한다.



톱질의 오후, 벽돌 선반

3월 7일, 퇴근 후 작은 작업을 시작했다. 벽돌과 나무판을 준비해 작은 선반을 만들기로 했다.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니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다. 몇 번의 톱질이 지나자 팔에 알통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쓰는 일에는 묘하게 마음을 맑게 하는 순간이 있다.

벽돌을 쌓고 나무판을 올려 균형을 맞추자 작은 선반 하나가 완성되었다.

위에 화분을 하나 올리고 책 몇 권을 놓았다.

그리고 오래 보관해 두었던 아버지의 족보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데이트 두 번째 날 찍으신 사진과 결혼기념사진을 사진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 멋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내 손으로 만든 선반 위에 시간들이 차곡차곡 올라앉은 느낌이었다.


수선화와 올리브

마당에는 수선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노란 꽃잎이 봄의 시작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나는 올리브나무 화분을 들고 나와 아버지가 만들어 두신 나무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만든 의자, 그 위에 놓인 올리브나무, 그리고 옆에서 피어 있는 수선화. 서로 다른 시간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버지는 늘 손이 정교하셨다.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고 균형을 맞추는 일을 언제나 반듯하게 해내셨다.

나는 그 의자를 바라보며 그 손의 시간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일상

아버지께 새로 산 봄 티셔츠를 드렸다. 블루와 화이트가 섞인 부드러운 천이었다.

아버지는 옷을 받아 들고 조용히 웃으셨다.


가끔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노란색 맥심 커피를 종이컵에 타서 함께 마시고, 옛이야기와 웃음을 나누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작은 희망이 있다.



세수를 도와드리고 수건으로 얼굴과 귀, 손과 팔을 닦아 드렸다. 로션을 발라드리고 가볍게 어깨도 안마해 드렸다.

“고맙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시간이 담겨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 논두렁 이야기와 어린 시절 마당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웃고 계셨다.

아버지의 하루는 이제 조용하다. 하지만 그 조용한 시간 속에는 여전히 삶의 결이 남아 있다.



에필로그 — 손이 남기는 것

눈 내린 산도, 톱질의 오후도, 수선화의 노란빛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손이 닿은 자리에는 시간이 남는다.



아버지의 의자처럼, 내가 만든 작은 선반처럼 우리가 남기는 것은 거창한 결과가 아니라 정성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아도 작은 장면들이 모여 하루를 아름답게 만든다.


작가의 말 — 최순옥

눈 내린 아침의 감악산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사람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올라가려 하기보다 제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계절을 건너가는 것.

아버지가 만든 의자와 내가 만든 작은 선반 사이에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삶은 손으로 이어진다는 것.

누군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누군가의 하루가 놓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이어 하루를 살아간다.



다음 편 예고 — 봄 마당

다음 편에서는 고향집 마당의 봄을 기록하려 한다.

햇살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과 아버지의 느린 걸음, 그리고 마당을 채우는 작은 숨소리들.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서 봄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조용히 따라가 보려 한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