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

아버지의 작은 바람

by 최순옥


프롤로그 — 오후의 시작

2026년 3월 8일 오후 4시 30분.

아버지와 함께한 조용한 오후였다.

아버지의 눈은 조금 퀭해 보였고 두통이 있으신 듯 살짝 찡그린 표정이었다.

손수건을 이미 눈가에 가져가고 계셨다.

나는 조용히 얼굴, 귀, 목, 팔, 손을 닦아드리고 로션을 이마와 볼, 턱, 손에 찍어 발라드렸다. 귀도 살살 청소해 드렸다.

“시원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 말 한마디에 오후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작은 돌봄의 시간

나는 고향집 한 달 살기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꽃사진도 함께 둘러봤다. 이층 방수 이야기도 꺼냈다. 견적이 150만 원이라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가 드린 새 티셔츠를 보시며 웃으셨다.

“고맙다. 네가 최고다.”


나는 주소 번지 정정 신고 이야기도 꺼냈다. 주택 번지가 아니라 지산제로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씩 여쭈어 보았다. 주소, 주민등록번호, 군번, 통장 비밀번호, 내 핸드폰 번호, 날짜. 아버지는 대부분 기억하고 계셨다. 주민번호와 핸드폰 번호는 잠시 생각하셔야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난 군번은 절대 안 잊는다.”

하하 웃으셨다. 그 웃음 속에는 지나온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복권 이야기

아버지는 백학 친구 이야기도 하셨다. 긁는 복권에 맞아 덤프도 사고 차도 사고 빚도 갚고 잘 산다고 했다.

“잘되었구나. 축하할 일이다.”

나도 어제 로또 5만 원 당첨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1부터 45까지 한번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1

9

8

4

*

나는 그 숫자를 받아 적었다.


“일등이 20억 정도 된다는데 당첨되면 반 드릴게요.”

아버지는 아이처럼 웃으셨다.

“십억 부자 되겠구나.”

그 웃음이 참 맑았다.


군밤 장난

아버지는 내 머리를 보시며 말했다.

“염색해야겠다. 머리 하얗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예쁜데 더 예뻐지겠죠.”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군밤 해 주세요.”

“안 된다. 아프다.”

그러면서도 말씀하셨다.

“그래도 해봐요.”

콩.

아버지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셨다.

“그래도 예쁘다.”

그 짧은 장난 속에 아버지의 다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

나는 시골집 배나무 이야기도 꺼냈다.

“다래나무 울타리 쪽에 몇 그루 심을까요?”

“두 개 해라.”


나는 다시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저 승진하면 뭐 해주실 거예요?”

아버지는 웃으셨다.

“승진하면 우리 막내 뭐든 다 해주지. 큰 보물도 주고, 직장에도 귀한 떡을 방앗간에서 바로 만들어 돌리고, 마을에도 플래카드 달아주지. 우리 막내 승진했다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 저 내년에 대학원 가려고 준비 중이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잘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이 아비가 다 지원해 주마. 열심히 해라.”


아버지는 막내가 잘되기를 바라시는 듯 잠시 눈가가 젖어 보였다. 그래도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남아 있었다.


“난 널 사랑한다. 고맙다. 네가 고생이 많다. 내가 가진 것보다 네가 잘되는 게 더 좋다. 네가 이렇게 곁에 있어 주니 아비는 그저 고맙고 마음이 놓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용히 무거워진다.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기억을 붙잡는 마음

나는 가끔 두렵다. 아버지의 기억이 언제까지일지.

그래서 나는 늘 확인한다. 주소, 주민등록번호, 군번, 통장번호, 내 핸드폰 번호. 자식들 이름과 손주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과 처제 이름까지.

아버지 옆 벽면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붙어 있다.


엄마, 오빠, 언니, 그리고 나. 그리고 오빠 1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

벌써 두 번째다. 아버지가 오빠를 손주 양우라고 부르신 것은.

나는 잠시 사진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버지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속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가 그날까지 버텨 주시기를.

이 막내를 잊지 않으시기를.


나는 울지 않았다. 대신 원숭이 춤을 살짝 추며 웃어 보였다. 아버지도 따라 웃으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마에 손수건을 빨아 세 번 접어 올려드렸다. 그리고 하트와 엄지 척을 해드렸다.

“아버지, 사랑해.”


작가의 말

부모의 사랑은 늘 뒤늦게 더 크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와 손길 하나가 마음 깊이 남는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이루려 애쓰지만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이렇게 함께한 작은 시간들 인지도 모른다. 얼굴을 닦아 드리던 손길, 장난처럼 나누던 말 한마디, 그리고 잠시 함께 웃던 순간들. 그 평범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기억은 흐려질 수 있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게 될 때 그날의 오후와 아버지의 웃음, 그리고 따뜻했던 손길이 그대로 떠오르기를 바란다.

아버지와 함께한 평범한 하루가 나에게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렇게 조용히 적어 내려간다.

다음 예고 — 봄 마당

다음 편에서는 고향집 마당의 봄 이야기를 집수리이야기를 기록하려 한다.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서 봄은 아주 조용히 시작된다. 마당의 흙은 조금씩 따뜻해지고 작은 싹들이 고개를 내밀 준비를 한다.

햇살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과 봄이 스며드는 마당의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천천히 흐르는 아버지의 시간을 따라가 보려 한다.


집을 유지하는 시간들, 수리하는 시간들.

아버지의 터전을 지켜가는 시간들.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문득 울컥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눈물이 조용히 쏟아지기도 한다.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마당의 길, 오래된 의자와 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를 스치는 봄바람까지. 그 마당에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마당에서 우리는 다시 작은 하루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