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봄봄

대추나무 앞에서

by 최순옥


프롤로그 — 오래 서 있던 나무

어제 고향집 일을 몇 가지 정리했다. 이층 난간 방수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고 집 뜰 하우스 정리와 대추나무 처리 문제도 업자분과 금액 협의를 마쳤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묘하게 무거웠다.



고향집 마당의 대추나무는 집을 짓고 함께 자라온 지 어느덧 50년이 된 나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가을이면 대추를 따고 말리는 일이 집안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붉은 대추를 널어 두면 가을 햇살 속에서 천천히 말라갔다. 한 번씩 뒤집어 주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웃이 한마디 건네기도 했다.


201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수확도 더 많았다. 대추를 말려 팔기도 하고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 나무는 우리 집의 가을이었다.

베어야 할까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아버지 기력이 약해지시고 낙과가 많아지면서 마당 관리도 쉽지 않았다. 5년 전쯤 아버지도 “이제는 베어야겠다.”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만 비용이 부담되어 그때는 정리하지 못했다.

그 사이 나무는 조금씩 기울어 갔다. 지금은 마을회관 담장 밖 컨테이너 쪽으로 닿을 듯 기울어 있다. 관리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라 마음을 정하고 업자분과 정리 비용까지 협의를 마쳤다.


그런데 오늘 아침 사장님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생전에 계신 분 나무는 베는 게 아닙니다.

나무 베는 것은 차후에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문자를 읽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괜히 눈물이 났다. 나무 때문이라기보다 그 나무 아래에 있던 시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멍석 위에 널려 있던 대추들, 가을 햇살, 마당을 오가던 부모님의 모습. 그 모든 시간을 그 나무가 다 보고 있었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뵈러 가다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신 지 이제 2년이 되었다.

나는 원장님께 아버지 안부를 여쭙고 대추나무 이야기를 전해 드리며 아버지 의견도 한번 여쭤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를 찾아갔다.


2026년 3월 14일 오후 3시. 요양원에 도착하니 사회복지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오전에 언니와 형부가 다녀갔는데 아버지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였고 기력도 없어 보였다고 했다.

병실로 올라가니 아버지는 나를 보자 손을 흔드셨다.

“아버지 머리 아파요?”

“응.”

“병원 가야지요.”

“안 가.”

오늘이 며칠이냐고 여쭈니 달력을 가리키신다.

“삼월… 14일.”

언니가 왔었다고 하신다. 달력에 색칠해 둔 것을 형부가 했다고 하신다.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으니 아버지가 한 거예요.”


시계를 가리키며 몇 시냐고 물으신다.

“세 시 이십오 분.”

내가 사십오 분이라 하니 아버지는 웃으신다.

“틀렸다. 바보인가?”

“난 바보 딸 안 해요.”

“그러지 말고 천재 딸 해야지.”

그 말에 나도 웃었다.


작은 돌봄

아버지 목과 등에는 붉은 발진이 올라와 있었다. 에어매트를 오래 사용해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얼굴과 손, 손목, 목과 귀를 조심스럽게 닦아 드리고 로션을 발라 천천히 문질러 드렸다.


사진 속 노란 수선화를 보여 드리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예쁘다. 나 꽃 좋아한다.”

그리고 잠시 후 말씀하셨다.

“엄마는 빨간 꽃 좋아했어.”

아버지도 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아버지의 한마디

나는 집 이야기를 꺼냈다. 이층 베란다 방수 공사 이야기와 비용 이야기, 그리고 대추나무를 정리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듣고 계셨다. 그리고 한마디 하셨다.

“베지 마라.”

나는 다시 물었다.

“많이 기울었는데도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도 베지 마라.”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팔씨름

나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말했다.

“아버지, 팔씨름 한 번 하실래요?”

아버지는 웃으셨다.

“그래, 해보자.”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아버지와 손을 맞잡았다.

“준비… 시작.”

잠시 힘이 맞섰다. 그리고 곧 아버지 팔이 내려갔다.

“아버지가 이겼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웃으셨다. 나는 일부러 크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 아직 힘세다!”

아버지는 더 크게 웃으셨다. 나는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아버지 최고.”

아버지도 하트를 만들어 보이셨다.


에필로그

요양원을 나와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마당에는 대추나무가 그대로 서 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 온 나무처럼 오늘도 조용히 마당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 당분간은 그대로 둘 것 같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에는 우리 가족의 시간이 남아 있다. 멍석 위에 널어 두었던 대추와 가을 햇살, 마당을 오가던 부모님의 발걸음, 그리고 아이들이 뛰놀던 오래된 오후들까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나무를 그냥 바라본다. 오래 서 있던 것들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살다 보면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집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기울어지고 언젠가는 손을 봐야 할 때가 온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쉽게 손대지 못한다. 그 안에 사람이 살았던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베지 마라.”

말속에는 설명보다 더 많은 기억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해 둔다. 잊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시간을 조금 더 오래 마음에 두기 위해서.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에는 수선화 한 송이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적어 보려 한다.

아버지가 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노란 수선화를 보며 잠시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른다.


봄이 오면 꽃이 먼저 피고, 그다음에 마음이 따라온다. 작은 꽃 한 송이지만 아버지 곁에 두면 병실도 조금 밝아질 것 같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수선화를 들고 요양원으로 가는 길을 기록해 보려 한다.


봄이 오고 있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