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충분히 받았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마음이 먼저 축하를 받았다

by 최순옥


출근길 라디오에서, 마음이 먼저 축하를 받았다

출근길마다 습관처럼 라디오를 켠다.

CBS 93.9, 김용신입니다.

이십여 년이 넘도록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 온 목소리다.

늘 거기 있었기에,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난주는 야근이 잦았다.

새로 옮긴 자리, 내일이라는 이름의 공간에 몸을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그래도 하루는 그렇게 시작됐다.

버텨내듯, 그러나 무너지지 않게.

라디오에서 사연이 흘러나왔다.


설마 했다.


요즘 딸아이는 많이 분주하다.

늦은 귀가, 연습과 학습으로 가득 찬 하루들.

사연을 보낼 여유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이름이 나왔다.


“김용신 선생님 안녕하세요.

출퇴근길마다 22년째 방송을 함께 듣고 있는,

연천에 사는 스물두 살 딸입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오늘은 연천의 아름다운 엄마,

최순옥 님의 쉰다섯 번째 생신입니다.”

목소리는 또박또박했고,

딸아이는 내가 지나온 시간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2024년 2월, 외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쉼 없이 간호하며 공무원으로의 일도 병행했던 시간들.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을 엄마를 보며

자신은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저희 엄마, 올 한 해는 아프지 말고

건강해지시라고 주문해 주세요.”

라디오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듣고만 있었다.

사랑해요,라는 말과 함께

마이클 부블레의 ‘Home’을 신청한다는 말까지.

퇴근 중에 이 방송을 듣고 있을 거라는 말에

그제야 나는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달력 속의 숫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이 어떤 날인지는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척 흘려보내기엔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라디오가 지나간 뒤,

오늘은 조금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조퇴를 하고 전 근무지 부장님 다섯 분과 동대문으로 향했다.

DDP 전시장을 함께 걸으며

말이 많지 않아도 통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미 각자의 자리를 떠났지만

함께 견뎌온 시간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말을 걸어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이렇게 늦게 와서 더 단단해지는 인연도 있다는 걸 느꼈다.


말없이 건네진 것들

그날 점심은 직원들에게 먼저 샀다.

퇴근 무렵 실장님이 고맙다며 스타벅스 음료를 건네주셨다.

망고바나나.

신맛이 살아 있는, 꼭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사소한 취향을 기억해 주는 일 하나가

마음을 조금 풀어놓게 했다.

환경 주무관님은 가래떡을 해오셨다.

지난주 발령 축하 겸이라 하셨는데

우연히도 날짜가 맞았다.

생일엔 떡을 먹는다는 말처럼,

겨울의 온기가 먼저 도착한 느낌이었다.

같이 발령받으신 든든한 연주무관님은

스타벅스에서 망고바나나 음료를 사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오늘 하루를 지탱해 주는 기둥 같았다.


도시락 반찬 중에 고추무침과 짠무무침이 있었다.

빛깔이, 참 익숙했다.

한 젓가락 맛보는 순간

겨울이면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게 울컥 올라왔다.

아무 일도 아닌 척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밥을 먹었다.

나는 안다.

이 하루가 얼마나 많은 마음으로 채워져 있는지.

행복은 요란하지 않다는 것도.


아버지가 주신 선물을 떠올린다.

그 무게와 크기보다

지금도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 하나가

눈물 나게 고맙고 감사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울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나는 충분히 받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