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 끝에 남는 것

것 고향집 봄이 오는 길목에서

by 최순옥


프롤로그

별이 쏟아지던 밤이 있었다. 어린 나는 마당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세상은 끝없이 넓어 보였다. 별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그 아래의 나는 작고도 단순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고향집에 머물며 같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라진 것은 세월뿐이다. 부모의 나이가 보이고, 나의 책임이 보이고, 시간의 무게가 보인다. 그럼에도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변하지 않는 것 하나쯤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붙들어 준다. 머무름은 후퇴가 아니라

돌아봄이라는 것도 이제야 안다. 돌아본다는 것은 멈추는 일이 아니라, 다시 걸어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일이라는 것을.


사무실의 손 그날,

사무실에서 손을 잡아주던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잘 적응해 줘서 고맙고, 일처리 잘해줘서 고맙다.” 짧은 말이었지만 깊었다. 나는 늘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누군가는 이미 나의 애씀을 보고 있었다. 그 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그동안 긴장 속에서 애써 단단해지려 했던 나를 잠시 내려놓게 해 준 온기였다.

인정은 거창한 상이 아니라 따뜻한 손의 온도라는 것을 그날 배웠다. 그 이후로 나는 안다.

애쓰는 시간은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군가의 눈에,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손 병실의 창가,

부드러운 오후 빛. “오늘 며칠이에요?” “이월 말… 28일.” 나는 주소와 이름을 다시 묻는다.

주민등록번호도, 군번도, 내 전화번호도. 아버지는 또박또박 대답하신다. 나는 웃으며 “넘버원!” 사실은 확인이 아니라 안도였다.

혹시라도 나를 잊을까 봐, 기억이 한 겹씩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자꾸 묻는다. 기억은 시험이 아니지만, 나는 딸의 마음으로 자꾸 시험을 낸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답을 말할 때마다 안도의 숨을 쉰다. “군밤 때려봐.”

“안 된다.”

그래도 살짝 꽁.

“쓰담쓰담해봐.” 하얗게 마른 손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예전에는 거칠고 단단했던 손. 지금은 뼈가 도드라지고 피부가 얇아졌지만, 그 온기만은 그대로다.

그 손길 아래에서 나는 다시 어린 딸이 된다. 어떤 책임도, 어떤 역할도 없는 아이. 기억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이름 하나쯤 어긋나도 괜찮다.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대신 얼굴과 손을 닦아드리고, 로션을 톡톡 찍어 발라드렸다. 사진을 보여드리니 웃으신다. 그 웃음이 오늘 하루의 전부 같았다. 그 웃음 하나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장보기와 꽃 구입

병원을 나와 장을 봤다.

닭볶음탕 거리와 채소들. 비닐봉지 안에서 채소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박한 장보기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장을 본다는 건 누군가의 저녁을 준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함께 먹을 시간이 남아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화원에 들러 노란 수선화와 장미를 샀다.

구정 때 다녀온 뒤 집 안이 한동안 비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꽃을 들고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엄마가 쓰던 채반 위에 꽃을 올려두니 집이 환해졌다. 채반의 오래된 무늬와 꽃잎의 선명함이 묘하게 어울렸다. 시간과 시간이 나란히 놓인 듯했다.

대파를 화병에 꽂으며 생각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제 빛을 낸다고. 꽃을 사는 일은 사치가 아니라 마음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 알았다. 압력밥솥에서 김이 오르고 부엌에 냄새가 퍼진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한 끼를 준비하는 일로도 삶은 충분히 단단해진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하루를 차려냈다. 밥상 위에 놓인 따뜻함이, 말보다 먼저 마음을 데운다.


파주 헌책방

다시 가고 싶은 곳 며칠 전 나는 파주의 헌책방에 다녀왔다.

구정 연휴에 잠시 들렀던 곳인데, 이상하게도 자꾸 생각이 난다.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이유 없이 마음이 놓이던 자리. 낡은 종이 냄새와 바랜 글자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도, 인정받아야 할 사람도 아니다. 그저 문장을 읽는 사람으로 앉아 있으면 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간이 느려진다. 누군가 오래전 그어둔 밑줄이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오래된 문장은 다정하게 말한다. 괜찮다고, 충분하다고. 그곳은 내게 휴식이었다. 안정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였다. 그래서 나는 안다. 다시 지치면, 또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걸. 머무는 삶은 멈춤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일이라는 것을, 그 조용한 공간에서 배웠다.

에필로그

나는 완벽하지 않았다. 흔들렸고 지쳤고, 때로는 두려웠다. 그래도 매 순간 간절했다.

그 간절함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사무실의 손, 아버지의 손, 꽃과 밥 냄새, 헌책방의 고요. 그 모든 장면이 이어져 하나의 별자리가 되었다.

별은 여전히 떠 있고 나는 그 아래 서 있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머무를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멀리 간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살아냈다. 그리고 내일도, 별이 보이는 방향으로 조용히 걸어갈 것이다.


작가의 말

이 기록은 특별한 사건의 연대기가 아니다.

대신 아주 작은 온도들의 기록이다. 손을 잡아준 순간,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 밥 짓는 냄새, 책장을 넘기던 고요. 나는 이제 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온도라는 것을.


서두르지 않아도,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는 것을. 머무는 동안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두려움도, 책임도, 사랑도 모두 같은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어딘가에서 애쓰고 있다면, 당신은 역시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별은 멀리 있지만 우리를 비추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조용히 빛나고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오늘을 성실히 건너왔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다음 편 예고

다음 이야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편에서는 고향집의 아침을 기록하려 한다. 밤의 별 대신, 새벽의 빛을 따라가 보려 한다. 창문을 여는 손길, 부엌의 첫 물 끓는 소리, 마당을 스치는 바람. 아버지의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나의 마음이 어떤 표정으로 아침을 맞는지 천천히 적어보려 한다.


머무는 삶이 다시 움직임이 되는 순간을, 그 느린 변화를 따라가려 한다. 별이 사라진 자리에서 해가 떠오르듯, 우리의 내일도 그렇게 조용히 밝아오기를 바라면서.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