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삶의 온도
프롤로그
고향집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돌아온다는 감각은 언제나 낯설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마음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예전의 나는 늘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고, 역할에 밀리고, 책임에 스스로를 다그치며 쉼 없이 움직였다.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았고, 느려지면 불안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고향집은 내게 다른 질문을 건넨다.
“정말 그렇게까지 서둘러야 했을까.”
본문
머무는 삶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고향집 살기는 예상보다 편안하고 따뜻하다.
며칠 전만 해도 매서웠던 공기가 조금씩 누그러졌고, 밤바람에도 겨울의 날이 덜 서 있다. 추위는 물러가고 계절은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저녁이면 나는 마당으로 나선다.
아버지 점퍼를 걸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어느새 하루의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별은 여전히 많고, 고요는 여전히 깊다.
마당을 천천히 걷는다.
운동이라기보다 숨을 고르는 걸음. 생각을 비우는 시간. 고향집의 밤은 사람을 조용히 느리게 만든다.
아버지의 옷장을 정리하며 문득 웃음이 났다.
깔끔하게 개켜진 옷들, 단정하게 놓인 점퍼들. 그 질서 속에는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시간, 묵묵한 습관, 그리고 말없는 성실.
대상포진 통증도 거의 가라앉았다.
통증의 흔적은 남아있다.
몸이 회복되자 마음도 함께 숨을 돌린다. 아픔이 물러난 자리에는 묘하게도 안도와 고마움이 남는다.
한 시간의 거리, 그럼에도 좋은 이유
출퇴근 편도 한 시간.
예전 같았으면 피로를 먼저 떠올렸을 거리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아침 길은 하루를 향하는 준비의 시간이고,
퇴근길은 별을 향해 돌아오는 기대의 시간이다.
도시에 남겨둔 긴장과 소음, 역할과 속도.
그것들을 뒤로하고 다시 고향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묘한 설렘을 느낀다.
오늘 밤에는 어떤 별이 떠 있을까.
마당의 공기는 또 얼마나 고요할까.
피곤함보다 기다림이 앞선다.
이 감정이 스스로도 낯설 만큼 좋다.
후회와 사랑은 닮아 있다
친구는 작년에 어머니 수술 후 긴 시간을 보냈다.
요양원 다섯 달, 병원 입원, 그리고 보름 뒤의 이별. 아버지와 동갑이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의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24년,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살았다.
정신을 놓을 만큼,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쓰며 버텨냈던 시간. 선택의 여지도, 계산의 여유도 없던 날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친구처럼 ‘수술’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어야 했을까.
조금 더 편안하게 모셨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러나 삶은 늘 결과를 알고 선택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고,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후회와 사랑은 닮아 있다.
돌아보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동시에 놓지 못하게 한다.
지혜의 숲, 그리고 다른 온도
지혜의 숲은 갔다. 공지영 소설을 구입했다.
포장된 이름표로 책 선물을 하려고, 아들에게 줄 책을 샀다.
지혜의 숲은 헌책방처럼 아늑하거나 편안하지는 않았다.
정돈된 공간이었지만 마음이 쉬어가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더 또렷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의 결,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온기.
다음 주부터는 헌책방 블루박스로 향하기로 약속했다.
장단콩 두부전골.
그리고 7시 반, 고향집 마당에는 별빛잔치가 펼쳐졌다.
무생채의 기억
나는 젓갈을 먹지 못하고, 비린 음식도 거의 못 먹는다.
그래서 무생채를 만들면서도 늘 맛의 균형이 어렵다.
청사 근무 시절, 정애주 주무관.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 아이가 늘 이야기하던 시어머님의 무생채.
젓갈 없이도 깊고 시원하고, 아삭하고 따뜻한 맛.
이상하게도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딸과 함께 무 두 개, 배 반 개, 당근 한 개.
소금과 설탕에 절여 아삭함을 살리고, 새콤달콤 조심스레 맛을 맞췄다.
그리고 돌솥밥.
계란프라이. 바로 짠 들기름.
그토록 그리던 맛이 식탁 위에 놓였다.
봄과 함께 행복하다.
에필로그
고향집의 밤은 여전히 별로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아래에 서 있다.
예전보다 덜 서두르고,
예전보다 덜 다그치며,
예전보다 조금 더 나를 이해하면서.
완벽한 선택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선택들은 모두 간절했던 선택이었다.
지금의 나는 판단보다 수용에 가깝다.
부정 대신 이해, 후회 대신 받아들임.
나는 오늘도 별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조용히 안도한다.
잘 살아내고 있다고.
작가의 말
우리는 종종 ‘버텨낸 시간’을 너무 쉽게 평가한다.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다른 선택이 있었을 거라고, 결과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한다.
하지만 그 순간의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 존재였다.
삶은 정답을 주지 않은 채 선택을 요구하고, 시간은 뒤늦게 의미를 알려준다.
지금 돌아보는 마음이 아픈 이유는
잘못해서가 아니라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안다.
후회가 남는 선택일지라도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머무는 삶이 가르쳐 준다.
스스로를 조금 덜 몰아붙여도 괜찮다는 것을.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 주, 나는 다시 고향집에 머물기로 했다.
머무는 삶은 조용히 사람을 바꿔 놓는다.
익숙한 마당의 공기, 계절을 그대로 품은 아침 햇살,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가는 하루의 결.
그러나 평온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작은 질문들을 길어 올린다.
편안함은 지속될까.
아니면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을 데려올까.
고향집의 아침과 밤,
그 사이에 놓인 생활의 온도.
나는 앞으로 전진하는 이야기 대신
천천히 살아지는 시간들을 기록하려 한다.
별들이 쏟아지던 그 밤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