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포진, 고향집, 별들이 쏟아지던 밤

밤별들의 항연, 그리고 마음의 자리

by 최순옥


프롤로그

명절 전

아버지를 뵈었다. 구정에는 고향집에 모시고 다녀오시게 하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병실은 중앙 쪽이었다. 107세 어르신과 함께 계시다가 그 어르신은 근거리 요양원으로 이동하셨다.

병실을 정정하시고 환기시키며 늘 아버지를 챙겨 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조용한 배려가 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버지는 혼자 계시게 되었고 이후 옆방으로 이동하셨다. 같은 방 어르신의 이름표. ‘85세 / 치매 / 고혈압 / 뇌경색’. 간호사를 수십 번 부르시는 호출 소리. 짧은 방문이었지만 나는 쉽게 숨을 고르지 못했다.

공간의 공기가 아니라 마음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밀려드는 마음. 아버지를 집에 모시지 못하는 죄책감, 설명할 수 없는 미안함.


명절

오후 2시, 다시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는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계셨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자꾸 내려오셨다고 했다. 들뜨신 건지, 아니면 기다림이 길었던 건지.

“아버지, 다음 주에 가셔요.”

“됐다. 차 타고 가길 왜 다음이냐.”

굳어버린 표정. 짧지만 단단한 말. 나는 괜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말했다.

“아버지, 군밤 때리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다… 아프다…”

그리고 내 등을 쓰담쓰담. 그 손길이 이상하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많은 것을 또렷이 기억하신다. 주소도, 주민등록번호도, 내 휴대폰 번호도. 하지만 손을 잡아도 그날 아버지는 웃지 않으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아버지, 홍 씨 아저씨 보고 싶으세요?”

십 년 넘게 정기 검사 때마다 아버지를 모셔 주셨던 분. 아버지가 늘 “아들 같은 고마운 분”이라 말씀하시던 그분. 하지만 아버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신 채 나를 보실 뿐이었다. 누군지 기억을 못 하시는 듯했다.

“홍 씨 아저씨… 아버지 좋아하잖아요.”

내 말은 공기 속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꽃 피는 3월, 따뜻한 3월이 오면 나는 다시 그분께 부탁드려 아버지를 시골집에 모시고 갈 것이다. 그 다짐을 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기억의 지우개. 나는 문득 그 단어가 무서워졌다.

딸아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뵙고 큰할아버지, 큰할머니 산소도 다녀왔어요.”

“잘했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하셨지만 눈빛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돌아서는 길.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대상포진 붉은 반점

나는 대상포진으로 등에 붉은 반응들이 번져 나왔다.

통증은 살을 스치는 수준이 아니라 깊숙이 파고들어, 마치 몸 안쪽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불씨 같았다.

옷이 닿는 감각조차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고 가만히 기대어 앉아 있는 일마저 쉽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아도 아팠다.

움직이면 더 아팠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일상의 결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힘에 가까웠다. 밤은 길어졌고 잠은 얕아졌다.

어둠 속에서 통증은 더 또렷해졌고 나는 몇 번이나 뒤척이며 새벽을 건넜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 마음을 더 지치게 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몸의 병은 마음의 균형까지 흔든다는 것을. 참는다고 사라지는 고통은 없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버티는 대신 돌보는 쪽으로 마음을 틀어 보기로 했다.

조금 느리게 숨을 고르고 조금 더 나를 살피며 아픔 한가운데서도 나를 놓지 않는 연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비로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본문

명절 마지막날

연휴 마지막 날. 조금 회복한 몸과 마음으로 출판단지 헌책방을 찾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 오후였다. 서두를 필요 없는 시간, 조용히 흘러가는 공기.

문을 열자 특유의 종이 냄새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새 책에서는 맡을 수 없는, 시간이 켜켜이 내려앉은 냄새. 오래된 책등들이 빼곡히 꽂힌 서가 사이로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표지들, 접힌 모서리, 희미해진 제목들. 그 안에 각자의 시간이 조용히 눕혀져 있는 듯했다.


나는 한 권 한 권 시선을 얹으며 천천히 걸었다. 책을 고른다기보다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기분에 가까웠다. 사람 대신 문장이 머무는 공간. 말 대신 종이가 숨 쉬는 곳.


그때 눈에 들어온 책 한 권.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제목을 읽는 순간 괜히 손이 멈췄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 같은 것.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다섯 시간 동안 반을 읽었다.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른 채 문장 속을 천천히 걸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괜찮은 오후였다.

책은 마음을 ‘술 취한 코끼리’라 불렀다. 거칠고 느리며 쉽게 방향을 바꾸지 않는 존재. 그 위에 올라탄 기수는 이성이었고 의지였다. 읽는 동안 자꾸만 내 마음과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설득하려 했던 순간들, 끌고 가려했던 마음들, 기다리지 못했던 감정들. 나는 코끼리를 다그쳤지 함께 걸으려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책을 덮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배웠다기보다 조용히 들킨 기분.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말이 이상하게 깊게 스며들었다. 우리는 종종 버티는 자신을 당연하게 여기고 지친 마음을 게으름으로 오해한다. 책은 그 오해를 조용히 풀어준다. 마음을 길들이는 일은 결국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 연습이라는 것을.

읽고 난 뒤 내 마음이 갑자기 단단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덜 미워하게 되었고 조금 더 기다려 보게 되었을 뿐. 그 정도의 변화면 충분하다고 책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의 퇴직준비 꿈 로망

헌책방을 나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나도 언젠가 퇴직을 하면, 고향집을 작은 헌책방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 조용한 마당 한편, 볕이 드는 창가, 오래된 나무 책장.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 마음이 지친 누군가가 잠시 앉아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책과 시간이 함께 머무는 집. 그건 계획이라기보다 희망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고향집, 밤 8시

고향집에 도착한 시간. 밤 8시.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달랐다.

도시와는 다른 온도, 낮보다 더 선명한 고요. 마당 위로 쏟아지는 밤하늘. 샛별, 시리우스, 사자자리,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나는 한동안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 내 무거운 발걸음, 책 속 문장들이 별빛 아래서 조용히 가라앉는다. 말로 풀지 못했던 마음들이 빛 속에서 천천히 풀린다.

그 순간 문득 깨닫는다.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결국 마음의 방향이라는 것을.


에필로그

난 고향집이 좋다. 난 고향집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 그 단순한 문장이 이제는 감상이 아니라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고향집에서 살기로 했다.

도망이 아니라 돌아옴의 선택으로. 버티기만 하던 삶에서 머무르는 삶으로. 조금 느리더라도 내 마음이 숨을 고를 수 있는 방향으로.


작가의 말

삶은 늘 앞으로 가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가끔 돌아가도 괜찮다고 속삭인다. 우리는 멈추지 않는 것을 성실이라 부르고 버텨내는 것을 당연함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전진이 옳은 것은 아니고 모든 멈춤이 뒤처짐은 아니라는 걸 시간은 자주, 그러나 늦게 가르쳐 준다.


나는 오늘 그 속삭임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남들이 정한 방향이 아니라 내가 편해지는 방향으로. 조금 늦어도,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 예고

고향집에 머물기로 한 마음. 그 선택 이후의 시간들은 어떤 얼굴로 다가올까. 익숙한 마당의 공기, 계절을 그대로 품은 아침 햇살, 그리고 조용히 흘러가는 하루의 결.

머무는 삶은 정말 편안해지기만 하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질문들을 데려올까.


나는 이제 앞으로 가는 이야기 대신 천천히 살아지는 시간들을 기록하려 한다. 별들이 쏟아지던 그 밤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