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명절, 고향집 그리운 어머니 손맛
프롤로그
등에 발진이 올라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통증은 생각보다 깊고 집요했다. 가만히 있어도 저리고, 스치기만 해도 전기가 흐르듯 아팠다. 옷깃이 닿는 감각조차 조심스러워지는 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면 늘 아프다. 어김없이 몸이 먼저 변화를 알아챈다.
공기의 결이 달라지고 바람의 온도가 바뀔 즈음이면 어디선가 작은 신호처럼 통증이 올라온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신호.
아픔은 사람을 쉽게 눕히지만 쉽게 재우지는 못한다. 밤은 길고, 뒤척임은 잦았다. 통증은 몸에 머무르지만 생각은 자꾸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흘러갔다.
몸이 먼저 계절을 안다
거울 앞에 서서 등을 살핀다.
붉게 번진 자국들, 손끝에 닿는 뜨거운 감각.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통증은 더 또렷해진다.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었던 감각들이 이름을 얻는 순간이다.
이럴 때면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기분이 든다. 통증은 분명 몸에 있는데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흐른다. 그래도 나는 길을 나선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 익숙한 아픔을 안고도 결국 향하게 되는 방향.
통증은 묘하게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평소엔 무심히 넘기던 소리, 빛, 공기의 온도까지 또렷하게 느껴진다. 옷을 입는 동작 하나에도 잠시 숨을 고르게 되고, 몸을 돌리는 사소한 움직임에도 조심스러운 계산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준비를 멈추지 않는다. 아픔이 하루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마음들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아버지를 뵙는 순간
아버지를 뵈러 들른 시간은 짧았지만 마음은 오래 머물렀다. 나는 준비해 간 티셔츠 새것을 조심스레 꺼냈다. 구정 선물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아버지께 입혀드렸다. 얇고 부드러운 면의 감촉,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려 소매를 맞추고 구겨진 옷깃을 천천히 펴드린다.
사소한 동작인데도 괜히 더 조심스러워지는 순간.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셨다. 익숙한 눈빛, 그러나 어딘가 어린 표정.
“아버지, 모레 고향집 모시고 갈게요.”
그 말을 건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주름 사이로 번지는 미소가 그 어떤 대답보다 또렷했다. 기다림이 기쁨으로 바뀌는 찰나.
나는 그 표정을 조용히 마음에 담는다.
아버지의 웃음은 늘 짧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는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잠시 바라본다. 예전보다 조금 더 가늘어진 선,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체온. 손끝에 닿는 감각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조용히 느껴진다.
부모를 바라보는 일은 늘 현재와 과거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아버지는 얼마나 고향집 땅을 밟고 싶으실까.
마당의 공기, 문턱의 감촉, 익숙한 냄새.
고향은 장소라기보다 감각에 가깝다. 냄새와 온도, 소리와 빛으로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마음을 두드린다.
어머니 손맛 — 그리움
어머니가 계실 때였다.
가마솥에 장작을 때어 두부를 하시고, 녹두를 갈아 녹두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으시던 명절 전날의 부엌.
고기를 먹지 못했던 스물일곱 살까지의 막내를 위해 어머니는 늘 김치만두를 따로 해주셨다.
말없이 챙겨주던 사랑은 언제나 조용하고 따뜻했다.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오셨다. 하루쯤 굳힌 뒤 떡을 썰어주시던 손놀림, 단단하고도 반듯했던 움직임.
가래떡을 해온 날이면 조청에 찍어 먹고, 거실 벽난로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 다시 조청에 찍어 먹던 밤.
그 시간 속에는 말보다 많은 웃음과 온기가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집 땅
“올해는… 춥지 않겠지?”
아버지의 그 말이 다시 들리는 듯하다. 날씨를 묻는 문장이었지만 사실은 계절보다 더 깊은 그리움의 표현이었음을 나는 안다.
돌아가고 싶은 시간과 붙잡고 싶은 기억이 함께 담긴 문장이었다.
고향집 손두부
고향집에 들렀을 때였다.
옆집 아주머니는 담 너머로 아버지 안부를 물으셨다. 명절이면 늘 두부를 직접 만드신다는 그분은 아버지가 잠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두부 한 모를 주신단다.
아버지는 지금 콧줄을 하고 계셔서 드실 수 없지만,
나는 그저 두부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향기를 오래 맡았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두부를 부치시던 날들의 온기, 말없이 건네지던 사랑의 냄새.
아버지도 이 향기 속에서 그리운 시간을 느끼실지 모르겠다.
나의 계절변화
등은 여전히 저리고 몸은 자꾸 신호를 보내지만 마음은 이미 길 위에 올라 있다.
아픔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사람은 선택이 아니라 버팀을 배운다.
그리고 버팀은 의지라기보다 익숙함에 가깝다.
돌봄이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결국 이렇게 작은 움직임들의 반복이라는 것도, 나는 이런 날들 속에서 조용히 깨닫는다.
티셔츠 한 장, 짧은 약속 한 문장, 잠시의 방문.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모여 관계를 지탱하고 하루를 건너게 한다.
에필로그
파스와 약, 그리고 조심스러운 움직임.
나는 오늘도 몸을 달래며 내일을 준비한다.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어도 괜찮다.
조금 아픈 몸으로도 누군가를 향해 가는 마음은 멈추지 않으니까.
내일, 나는 간다.
저린 등을 안고도 결국 가게 되는 길 위로.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시던 그 표정을 다시 한번 만나러.
작가의 말
몸의 통증은 삶의 속도를 늦추라 말하고, 마음의 방향은 여전히 누군가를 향한다.
나는 계절을 몸으로 견디고, 아버지는 시간을 마음으로 견디신다.
돌봄과 일상, 아픔과 책임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균형이 아니라 하루를 건너는 법을 배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음 편 예고
고향집으로 향하는 길.
따뜻하게 데워질 방 안의 공기,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실 아버지의 시선.
짧지만 깊게 남을 시간 속에서 나는 또 어떤 마음을 만나게 될까.
구정이라는 이름의 하루는 늘 그렇듯 기쁨과 긴장, 온기와 피로를 함께 데려올 것이다.
그리움은 기대가 되고, 기대는 조심스러운 두려움이 된다.
나는 그 사이에 서서
아버지와 내가 마주하게 될 하루의 결을 조용히 기록하려 한다.
고향집이라는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질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