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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의 '그냥 할 결심'

호랑이가 되어버린 시인이 다시 시인이 되는 법

by Aaaaana

운동, 글쓰기, 영어공부 등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일들을 꽤 규칙적으로 해왔던 9-10월에 비해 11월은 한없이 불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10월 중순쯤 본격적으로 시작한 AI 데이터 분석 아르바이트가 차라리 풀타임으로 회사를 다니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터프하기도 했고 아르바이트 마감을 쳐내고부터는 아이 학교 전학 문제로 이런저런 연락과 잡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11월 말이 되어버렸다.


사실 10월 말까지 회사생활을 회고하는 브런치북 한 권을 다 쓰고 나서 진짜 해보고 싶었던 건 소설 쓰기였다. 11월에 단편 하나를 완성해서 11월 말 ~ 12월 초가 마감인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는 원대한 꿈을 꿨다. 아르바이트 일이 바쁘긴 했어도 11월 초까지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짜내며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기도 했는데, 막상 어떤 식으로 단편을 써야 할지 몰라 인상 깊었던 단편들을 다시 꺼내 읽다가 그들의 훌륭한 글과 나의 조악한 아이디어 사이에서 영원히 좁혀질 것 같지 않은 간극을 느끼고 그냥 멈춰 섰다. 순수문학 대신 웹소설을 써볼까도 싶어 몇몇 추천 작품들을 읽다 말다 하고 유튜브 작법 강의를 몇 편 보다가 그마저도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진짜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인지, 글을 통해 그저 명성을 얻고 싶었던 것인지까지 돌아보며 결국 쪼다병이 도져 자학과 번뇌의 시간을 보내다 여기까지 왔다.


아직 시도랄 것도 안 한 내가 시대의 작가라 불리며 십수 년을 소설 쓰기에 몰입해 오신 그분들에 못 미친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데, 당장 필요한 건 허접한 글이건 뭐건 뭐라도 그저 써내며 글근육을 키우는 것이라는 걸 아는데, 머리로는 알기는 다 아는데,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짜잔~하고 그럴듯한 결과물부터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 걸 보니 오래된 이 습성은 참 변하지 않는구나 싶어 씁쓸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성향을 완벽주의(Perfectionism)라 하며 완벽하지 못할 바에는 시작조차 못하는 딜레마를 완벽주의의 함정(Perfection Trap)이라 부른다고 한다. 실패에 대한 공포가 너무도 크기에, 실패가 두려워 아예 시작도 못하다 자칫 무기력해지고 놓아버리는 완벽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에 빗대어 보면, 내가 단편소설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에게 단편 소설이란 그냥저냥 평범한 소설이 아니라 '위대한 소설', 즉 최근작 기준으로 꼽자면 나에게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던 김애란 작가의 「좋은 이웃」 같은 소설이었기에, 그 정도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은 비루한 지금의 나에게 실망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소설 쓰기를 포기해 버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완벽주의자의 실패공포증과 관련해 내 안에 저주처럼 자리한 한 권의 책이 있다. 대학 시절 한 학회 선배가 나를 콕 짚어 '네가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며 나카지마 아츠시의 「산월기」라는 책을 추천해 줬는데, 내 성향을 알아채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관통당한 느낌에 뒷골이 서늘해져 그 후부터 그 선배를 왠지 모르게 멀리했었다. 「산월기」는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노력을 하지 않고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을 그대로 방치할 때, 그 사람은 짐승으로 변해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이야기를, 호랑이가 되어버린 시인 '이징'의 회한이 담긴 내레이션을 통해 풀어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재능을 다 허비해 버렸던 셈이다. 인생이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지만 무언가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다는 둥 입에 발린 경구를 지껄이면서도, 사실은 부족한 재능이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각고의 노력을 꺼린 나태함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나보다 훨씬 재능이 부족한데도 오로지 그것을 열심히 갈고닦아서 이제는 당당한 시인이 된 자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호랑이가 되어버린 지금에야 나는 겨우 그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타는 듯한 후회를 느낀다." - 「산월기」 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십수 년간 회사생활을 핑계 삼아 말로만 글을 쓰고 싶다고 푸념하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저주처럼 이 책이 떠오르며, '부족한 재능이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각고의 노력을 꺼린 나태함'이 가득한, 실패가 두려워 막상 시작도 못하는 나 자신을 애써 무시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 회사까지 그만둔 마당에 더는 핑곗거리도 없는데, 여전히 나는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져, 허접한 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노력의 과정을 인내하지 못한 채 시작점 앞에서 우물쭈물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런 나를 한껏 마주하는 격정의 11월이 지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접한 가수 지드래곤의 인터뷰에서 새삼 그냥 하는 태도의 힘을 느낀다.

이번 컴백 자체가 그랬어요. 잘 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일단 부딪쳐보는 거. 결과가 어떻든 그 결과 또한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싶었죠...... (중략)...... 그런데 어떤 척도를 두고서 실패냐 성공이냐를 따지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어요...... (중략)...... 저는 뭐가 됐든 시작했다는 점에 대한 뿌듯함이 있어요. 해보니까 알게 되는 것도 있잖아요. 안 해보고서 머리로 계속 생각만 했다면, 그냥 시간만 흘렀을 수도 있어요. - 「W KOREA」 2025.11월호 지드래곤 인터뷰 중에서


미리부터 실패냐 성공이냐를 따지기보다, 일단 시작하고 해 보면서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것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 완벽해지기보다 완성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하루하루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 이제는 정말...... 「산월기」의 저주를 끝내고 싶다.


허접한 나를 솔직하게 마주할 용기를 내고, 실패하더라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그냥 일단 하는 태도.

이렇게 '그냥 할 결심'을 다지며, 오랜만에 브런치에 뭐라도 이렇게 써본다.


library.png 오랜만에 노트북을 들고 싱가포르 도서관에 와서 도서관에 가득한 집중의 에너지덕에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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