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년도 출간되었던 필름사진 전문 매거진 5ft.mag에 수록된 글입니다. :)
조용한 추석의 첫 날이 시작됐다.
명절 때마다 맏이의 몫을 톡톡히 해내던 언니가 시집을 간 후 하나 남은 딸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엄마가 준비해 둔 재료의 양을 보면 올해 추석은 얼마나 더 조용할지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엔 가짓수를 더 줄였다, 산적이랑 새우랑 파전만 하면 돼.”
지시를 끝낸 엄마는 서둘러 자리를 뜬다. 내가 산적을 구울땐 엄마는 나물을 삶는다. 내가 새우전을 구울땐 국을 끓이고 마지막 파전을 구울때는 뒷정리를 하고있다. 완벽한 분업으로 뚝딱뚝딱 해내는 모녀는 2시간을 채우지 않고 모든 일을 끝냈다. 지친얼굴로 아이스커피를 내리는 모녀에게 아빠는 툴툴거리며 이야기한다.
”뭐 그래 많이했노. 이제 더 하지마라.“
사실 나는 치열한 음식준비에 정신없던 옛 명절보다 지금의 명절을 더 좋아한다. 말 한마디 툭 던지고 티비를 보는 아빠와 편하게 커피를 마시를 엄마를 보니 유난스럽지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원래의 천성이었는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름의 풍파를 겪어서인지, 언제부터의 나는 아무일도 일어나지않는 평온한 매일을 바란다. 고단함 없이 일어나는 아침에 커피 한 잔 내려들고 시작하는 일, 햇빛 좋은 날 창문 활짝 열고 하는 청소, 가장 조용한 시간 집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다 친구의 시덥지 않은 연락을 받는 것, 하루에 한번 걸려오는 가족 영상통화로 조카의 애교를 보는 것도. 나열하면 끝도 없는 잔잔한 일상이 너무 소중해 매 순간 행복을 느낀다.
소박한 세 종류의 전을 부치고 조용한 추석을 맞이하는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기름 냄새 때문에 열어놓은 문틈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더위, 그 속에 아직 가시지 않은 여름 냄새와 선선히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까지. 다들 말 한마디 없지만 마음은 편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저기 위로 한 바퀴 돌고 올래?”
잠깐의 침묵을 깨고 엄마가 물었다. 혹여나 작은 딸이 심심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드라이브? 그러면 그때 갔던 절 있잖아, 거기 가볼까?”
몇 년 전부터 생각이 많고 불안할 때면 차분한 분위기를 찾아 절에 갔었다. 그 이후로 자연과 공존하는 특유의 조용함이 좋아 집 근처 절에 산책 겸 다녀오기도 했다. 아마 평온한 매일을 바라기 위해 하는 혼자만의 요행이었던 것 같다. 그 요행은 올 설에도 행해졌었는데 본가 근처 절이 있다는 이야기에 엄마와 함께 갔었다.
“그럴까? 그럼 절 갔다가 근처 한 바퀴 쭉 돌고 오자.”
동네 지리를 꿰뚫고 있는 엄마가 운전대를 잡았다. 추석인데도 이렇게 덥다며 몇 마디 주고받았더니 그새 도착했다. 좋은 기운 받겠다고 찾아온 몇 명의 사람들은 구석을 돌며 인사를 하고 있었고 우리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불경을 외우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흙냄새와 풀냄새도 숨 쉴 때마다 깊숙이 들어온다. 차분한 마음으로 시야를 넓혀 앞을 바라봤다. 사방에 깔린 높은 나무들 위로 하얗고 푸르고 붉은 하늘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 연한 노을이 초저녁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절에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자연과 가까이 자리한 큰 불상 앞에서 소박한 소원을 빌고 금세 내려왔다. 서로의 소원은 묻지 않은 채 얼른 한 바퀴 돌고 가자며 차로 향했다. 산 아래에서부터 삭막한 도로로 빠지는 순간까지 시덥지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편안한 침묵을 즐기기도 했다. 어느 순간 창 밖으로 시야를 가리던 건물들이 사라지더니 강이 나타났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밖을 바라봤다. 초저녁을 알리던 연한 노을이 그새 붉어져 하늘이 빨갰다.
붉은색은 열정을 상징한다. 아니면 공포 또는 사랑. 분명 활동적인 색상인데 노을은 굉장히 차분하다. 어떤 날의 노을은 겁날 만큼 새빨간데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과묵스럽게 아름답다. 심지어 그 자극적인 하늘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람도 많다. 지금 이 순간의 나도 마찬가지고.
왜일까 생각하니 대비되는 존재의 합이 좋아서가 아닐까 했다. 노을의 붉은빛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구름도 산도 송전탑과 건물들도 그저 어둡게만 보이는데 그 어둠이 붉은색을 차분히 잡아주는 듯했다. 푸르고 붉은 하늘 아래 받쳐지는 그림자 덕에 색의 아름다움은 극대화된다. 한순간 세상에 남겨진 색은 붉은빛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빛과 그림자의 아름다운 합 속에 웅장한 자연이 더해지니 마음은 차분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잔잔한 것에 대한 행복을 느끼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버거웠던 어두운 경험 덕에 보통의 하루가 극대화되어 이보다 좋을 순 없으니 말이다.
스멀스멀 사라질 기미가 보이는 노을 아래 엄마의 차는 열심히 달린다. 그 안에서 노을의 여운을 담기 위해 나도 열심히 눈을 굴린다. 내일은 추석의 둘 쨋날이 시작된다. 몇 가지 없는 전과 푹 끓인 국에 밥 한술 말아먹고 후식으로 커피 한잔하며 시덥잖은 몇 마디 주고 받겠지. 별일 없는 조용한 하루를 보낼 생각 하니 더없이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