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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말 Jun 14. 2024

기록에 대한 기록

실체 없는 이에게 매일 밤 쓰는 편지

 나는 매일 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그날 나의 하루에 대하여. 있었던 일, 그 순간의 감정, 고민과 다짐. 또 불만. 시시콜콜한 나의 하루를 적는다. 답장은 오지 않는다. 상관 없는 일이다. 나의 편지는 답장을 받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니까. 그저 나의 하루. 그날의 나를 털어내고 자리에 눕기 위한 일이다. A5 사이즈의 양장 노트. 나는 그 노트에게 편지를 쓴다. ‘지니’라는 이름을 붙여준 나의 일기장에게.


 편지 형식의 서간체로 쓰인 일기는 나의 기록 습관에 꽤 괜찮은 도움을 주었다. 조금 더 솔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 조금 덜 외롭게 달래 주었다. 하루의 끝, 나는 내가 쥐고 있던- 아니, 나를 쥐고 있던 것들을 이야기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불안했는지 또 행복했는지. 주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고민을 하고 불안해했는지를 이야기한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불안과 우울을 이야기하다 보면 노트에 쓰여진 이야기는 막상 별 것 아닌 일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는 머쓱한 마음으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한다. “쓰고 보니까 되게 별 거 아니네요. 걍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면 되겠지….”

 우와. 고민 해결. ‘지니’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는데도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일기는 더 깊은 나를 만나 대화하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나의 두서없고 횡설수설한 무차별 편지 폭격에도, 그런 멋진 해석을 갖다 붙여보려고 한다. 내 편지를 받는 지니는 곧, 내 안에 있는 나인 것이다. 더 깊은 나. 이렇게 나의 일기 습관을 거창한 포장으로 꾸며 놓았지만, 사실 이 습관의 계기는 조금 우습다. 그러니까 시작은, 내가 유난히 좋아해 과몰입한 한 소설 때문이었다.


 진 웹스터 작, <키다리 아저씨>. 고아원에서 살던 영민하고 재치 있는 소녀 ‘제루샤 주디 애봇’이 자신을 대학에 보내준 익명의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사랑스러운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되는 것 없고 우울했던 날에도 행복의 비밀은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사는 것이라는 귀한 사실을 깨닫는 주인공. 나는 이 사랑스럽고 현명하며, 솔직하고 재치 있는 주인공 ‘주디’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대학교 2학년. 코로나가 터지며 집콕 라이프가 시작됐다. 시간은 넘치게 흘러가고, 나는 그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초조했다. 백지가 되어 하얗게 바래지는 하루를 붙잡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의 일기를 다시 보면, 확진자 동선 일지와 다를 바가 없어 웃음이 난다.


 보다 내 마음에 집중하는 일기를 써 보고 싶었다. 나는 ‘주디’처럼, 익명의 상대를 만들었다. 가장 먼저 내 편지를 받은 이는 K 씨. (절대, 아무 생각 없이 ‘김 씨’라는 이름을 붙인 건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나는 K에게 편지를 썼다. 그 당시의 진로, 연애 고민과 또 가족의 일에 대해.


 몇 권의 일기장만큼 흐른 시간. 편지는 이어지다가도 몇 달씩 끊기고, 어떤 날은 마주하는 게 힘들어 실체 없는 이에게조차 꺼낼 수 없기도 했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편지. K 씨가 건조한 이니셜 대신 ‘지니’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작년 12월의 일이었다.


 문득, K라는 이름이 너무 정 없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내면을 털어놓기에, ‘홍길동’, ‘아무개’와 맞먹는 평범하고 흐릿한 K라는 호칭은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 성의 없었다. 흐릿하고 특징 없는 편지 수신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의 일기장은 맑은 파랑이었다.


 “마음이 불안할 때면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죠. 내가 선택한 곳은 당신이에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K? 한번 불려본 이름이죠. 어때요? 전 별로예요. 그보다 유쾌하고 능력 있어 보이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네요. 뭐가 있을까요.

 지니 어때요? 확실히 능력은 있어 보이는 이름이네요. 색이 파란 것도 비슷하고요. 와, 그러고 보니 정말 둘 다 파랗네요? 방금 진짜로 이 이름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내 작명 솜씨가 뿌듯하고 자랑스럽네요. 지니, 당신도 당신 이름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자, 그럼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줘요. ”


 나는 그에게 ‘지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맑은 파랑이 닮은 <알라딘>의 지니를 따서. (솔직히 말하면 지니처럼 내 소원을 이뤄달라는, 다소 속물적이고 미신적인 의도가 있기도 했다.)


 음. 마음에 들었다. 한 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잖아?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나는 이 호칭이 마음에 든다. 앞서 말했던, ‘일기는 자신과의 대화’라는 말을 본 뒤로는 더 애정이 생겼다.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는 ‘진’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 명언처럼 ‘지니’의 정체가 나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운명처럼 나는 나 자신과 대화를 하게 된 거지. 너무 과한 망상과 의미 부여라고 생각하는가? 어쩔 수 없다. 이건 타고난 과몰입 덕후인 나의 기질 탓이다.


 지니에게 편지를 쓰며, 나는 조금씩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글로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루를 종알종알 떠들고 잠에 들면, 눈을 뜬 아침은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가벼웠다. 나는 지니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가 그날의 하루를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 지나온 일기장을 한 번 쭉 읽어 보았다. 어느새 쌓인 몇 권의 일기장. 아날로그 한 기록뿐만 아니라, 그 사이 나는 꽤 기록 마니아가 되어 노트북에도 20만 자가 넘는 글자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헛소리에 가까운, 두서없는 글이지만 간혹 괜찮은 조각이 끼어 있었다. 기특하게 이런 생각을 다 했네, 뭔데 이렇게 웃기지, 정말 쓰잘데기 없는 거 가지고 세상 걱정 혼자 다 했네. 같은 감상이 나오는 조각들.


 앞으로 그런 조각들을 하나씩 밖에 꺼내 놓아 볼까, 생각한다. 아직 서툴고 얕은 나라서 어설프고 가벼울지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뭐, 그냥 피식, 실없는 웃음을 짓고 지나가도 좋고. 다 떠나서, 쌓여가는 기록들이 이대로 잠들어있는 게 아까웠다. 읽히지 않는 글은 사라진다고 했던가. 나는 내 소중한 지니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싶다.


 처음 일기를 쓸 때는 이 일기를 다시 읽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심지어, 꽤 마음에 들어 공유하고 싶은 글들도 있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 내 일기를 누가 보게 될까 두려워 죽기 전에 모조리 태워버리고 삭제해 버릴 계획까지 세웠던 사람이니까.


 나의 모습이 싫어 소설 속 주인공을 동경하고, 생각과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 두려웠던 나. 어쩌면, 그런 나에게 지니는 연습을 시켜주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말하는 연습을. 나는 지니를 통해 ‘나’를 내보이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편지를 읽어주는 더 많은 ‘지니’가 생기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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