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해방촌
드라마 <청춘시대>는 셰어하우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기 다른 성격과 취향을 지닌 다섯 명의 여대생이 셰어하우스에 모여 살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극 중 인물인 은재는 지방에서 처음 올라와서 셰어하우스에 들어오고 방을 누군가와 함께 사용하게 된다. 같은 방을 쓰던 다른 친구는 은재가 하는 행동에 대해 사사건건 조심해달라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붙인다. 할 말을 못 하고, 조금은 내성적인 은재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 못 하고 상상으로만 대적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 포스트잇을 쓰기 위해 고민했던 룸메이트의 흔적을 본다.
말로 하면 괜찮은데 쪽지로 하면 상대방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말에는 감정이 들어가지만 쪽지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쪽지는 말보다는 정제되어 정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쪽지로 부탁을 했을 때, 그 이후 나타나는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건 태도에 달려 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내가 셰어하우스에 들어가서 산 지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주인장 솔지가 말한다. 같이 살던 오빠가 집을 나가게 됐다고. 그래서 아는 언니가 이사를 온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난 그 기간까지 단 한 번도 그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이사 올 아는 언니는 솔지가 일하는 바에서 일하다 만난 언니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목소리가 걸걸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이라며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태닝을 한 듯한 구리 빛 피부를 그녀는 성격이 좋아 보였다. 처음에 호감이었던 그녀가 며칠 뒤부터 비호감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평안했던 나의 마음은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한다. 그녀, 아닌 그년으로 인해.
이태원 바에서 일을 하는 친구들이라 이들의 일과는 새벽에 끝이 난다. 솔지 혼자였을 때는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새벽에 아주 가끔씩만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 새벽 3~4시가 되면 어김없이 큰 소리가 난다. 내가 그때부터 새벽 형 인간으로 살았더라면 알람 소리라 생각하며 그러려니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 시간에 들어와서 각자의 방에 들어가면 괜찮은데, 그들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파티를 하기 시작한다. 남녀, 국적 불문의 친구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그들은 항상 취해 있었다. 새벽 5~6시 정도 내 방문이 활짝 열리며 이름 모를 서양 남자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내 방을 화장실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하고 말겠지 생각했던 그들의 새벽 음주는 계속 이어졌고, 참다 못 한 나는 쪽지를 썼다. <청춘시대>에 나오는 친구처럼 몇 번이나 고쳐 쓰지 않았다. 화를 그대로 담아 거침없이 썼다. 같이 사는 집인데 새벽에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난 그녀의 방 문 앞에 쪽지를 붙여 놓았고, 하루 뒤 답장을 받았다. 그녀는 죄송하다며 조심하겠다고 하는 내용을 쪽지로 써서 내 방 문에 붙여 놓았다. 미안함은 아는 아이 었구나 생각하며 화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죄송하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이 바뀔 거라 기대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아무것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아마 쪽지가 대 여섯 번은 오갔을 것이다. 매번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고쳐지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난 다른 작전을 쓰기로 했다.
나 또한 일찍 자지 않고, 밤에 나가서 질펀하게 놀다 오는 것이다. 매일 그럴 순 없어도 가장 스트레스받을 확률이 높은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에 실행을 하기로 했다. 나의 이런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준 사람은 나의 친구 쩌멜리였고, 우리는 금요일 밤마다 이태원으로 향했다. 밤을 불태운 다기 보다 집에서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때만 해도 아직은 밤새 놀아도 체력이 괜찮은 20대였다.
또 일주일에 하루밖에 놀 수 없었던 사실은 쩌멜리가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쩌멜리가 일을 마치고 올라올 수 있는 금요일 저녁을 어느 순간 난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금요일 저녁, 우리는 이태원으로 향했고 이태원의 바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그날은 유독 흥이 나서 새벽 3시 정도 집에 들어갔다. 그 시간에도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큰 메리트였다. 아직 노는 게 좋은 20대니까.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 불은 켜있었고, 문을 여니 국적 불문의 아이들이 거실에 한가득 모여 앉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취해 있었기에 그 장면에 화가 나진 않았다. 피곤함이 느껴져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고, 몇 시간 정도 눈을 부치고 우린 일어났다. 쩌멜리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그녀가 말을 한다.
“거실에 무슨 물을 쏟았나 봐.”
“아, 그래? 치우겠지 뭐.”
우린 다시 잠이 들었다. 점심 즈음에 일어났을 때 방문을 열어 보니 아직 거실에 물이 흥건한 상태였다. 그리고 외출했던 솔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 다녀왔어?”
“일하고 왔어요.”
“부지런하네. 잠도 얼마 못 잤겠네?”
“이제 자야죠.”
“솔지야, 그런데 바닥에 물이 있어. 뭐 쏟은 거야?”
“아, 언니 이게 말이죠.”
말 뒤끝을 흐리는 솔지. 그리고 잠시 후,
“이거... 오줌이에요.”
“오마 갓! 뭐라고?”
쩌멜리와 내가 동시에 시선이 간 곳은 바로 쩌멜리의 발이었다.
“말도 안 돼. 무슨 오줌을 이렇게 많이 싸! 코끼리도 아니고. 대체 누구야?”
“치울게요. 언니 죄송해요.”
오줌을 싼 범인은 솔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솔지 방에 있는 오줌싸개를 본 솔지는 노발대발했다. “넌 또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일어나서 빨리 네가 싼 오줌 치워!” 오줌싸개는 외국인이었고, 이 모든 말을 솔지는 영어로 했다.
“언니, 더 끔찍한 사실은요. 제가 봤어요.”
“뭘 봐? 오줌 싸는 거?”
“네. 식탁 의자에 조준하고 있는 그 아이 걸 봤어요.”
“대박이다. 의자는 어디 있어?”
“의자는 밖에 내다 놨어요.”
“와우! 식탁 의자를 변기로 본 거야? 의자가 동그랗긴 하지만...”
“당분간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아요.”
솔지의 아주 디테일한 말에 잠깐 상상을 해 본다. 아! 그만하자. 그 아이와 그 아이를 들인 다른 아이가 함께 거실 바닥 청소를 했지만, 그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난 거실용 실내화를 샀고, 거실에선 절대 실내화를 벗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동안은 집이 조용했다.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계속해서 친구를 들이고 파티를 벌이면 그 아이는 진짜 배려심이 1도 없는 거라 생각했다. 이제 그 아이는 다른 곳에서 파티를 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이후 그 아이가 집에 들어오는 날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딴살림을 차렸나? 오히려 난 그게 편했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난 여느 때와 같이 외출 준비를 하고, 일을 하기 위해 나가려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뮤지컬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일하러 가는 건 싫지만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난 당분간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줌 사건 이후에 집이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 이상한데?’ 하면서 있는 힘껏 문을 밀어보았지만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문이 잠긴 상태도 아니었다. 문 앞에 묵직하게 뭔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건은 아닌 거 같고, 생명체다. 갑자기 머릿속이 스릴러 모드가 된다. ‘혹시 문 앞에 죽은 사람이 있는 거 아니야?’ 생각이 확대가 된다. ‘아니겠지? 그런데 진짜 죽은 사람이 있는 거라면 어쩌지?’ 아, 이런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만하자. 상상은 두려움을 가속화한다.
문제의 그녀는 집에 안 들어온 것 같고, 솔지는 미군 남자 친구와 함께 자고 있는 것 같다. 깨울 수도 없고, 고민이 되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좀 있었기에 기다리면서 방안을 강구하기로 한다. 시간만 가고 방법이 없어 용기를 내어 솔지 방문을 두드렸다.
“솔지야, 미안한데 현관문이 안 열려.”
“네? 잠깐만요.”
바로 솔지와 그녀의 남자 친구가 나왔다. 그들은 현관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그래도 현관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 남자 힘으로도 안 되는 거였어. 잠시 후 생각한 그들, 솔지 방 창문을 넘기로 한다. 다행히 솔지 방엔 방범창이 있지 않아서 넘을 수 있었다. 창문을 넘은 솔지 남자 친구, 그리고 잠시 후에 현관문이 열렸다. 집에 있던 솔지와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밖을 확인한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사람이 있긴 했다. 솔지도 아는 사람인 듯했다. “알렉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솔지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한다.
다행인 건 죽은 사람이 아닌 지금 막 잠에서 깬 사람이라는 거다. 그리고 난 그 사내 옆에 있는 먹다 남은 컵라면에 눈이 갔다. 그 옆엔 맥주병이 있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라면이 당기는 다분히 한국적인 정서까지 몸에 담은 이 외국인! 술병과 컵라면을 들고 각각 손에 들고 이곳까지 와서 그대로 쓰러진 건가? 목표를 고지에 두고? 아니면 여기가 방이라고 생각을 한 건가? 어쨌든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장면이다.
아직 술이 안 깨 비몽사몽 한 상태의 남자를 솔지는 그녀의 방으로 인도한다. 솔지는 자기 몸도 못 가누는 남자에게 사과하라고 말을 한다. 나의 답변은 “죽지 않았으면 된 거야. 내가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다고. 그 짧은 시간에.” 역시 그 남자는 그녀의 친구였고, 미군 장교라 했다.
이런저런 사건이 계속되고 그녀는 그때마다 미안하다고는 말했지만 행동이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솔지가 행복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녀가 이 집에서 나간다는 것이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던 그녀는 이제는 독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다고 했다.
“그래. 친해질 시기도 없이 이렇게 보내네. 아쉽네.”라고 말을 했지만 내 맘 속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라도 나가서 정말 좋다. 내가 생각해도 넌 한 곳에 정 붙이고 살 팔자는 아닌 거 같아.’
독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면 누군가와 함께 살 텐데, 누가 또 스트레스를 받으려나. 아, 나 이건 또 무슨 오지랖이지. 그러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