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의 딸기밭 속 나무창고

Chateau Saint Mambert, Pauillac, 1994

by aalto

2025년, 1월 4일 저녁, 뉴욕 브루클린에서.


G: 맛이 완전히 열린 것 같다.

J: 지금 제일 맛있다.

G: 저번에 아빠가 말해줬던 길이감을 한번 느껴봐. 혀 전체에 와인을 굴리고 삼켜봐. 그러면 혀의 미각세포들 있잖아, 그게 규조토처럼 와인이 한 군데로 모여서 샥 날아가는지, 혀 양쪽 끝까지 착 가라앉으면서 여운이 느껴지는지 그걸 테스트해봐.

J: 길이감은 긴 것 같아.

G: 그치? 엄청 길지? 혀의 양끝까지 향이 퍼져. 그리고 타닌이 되게 좋은 타닌 같달까. 이게 안 좋은 타닌이면 혀가 까끌까끌하면서 아프잖아. 모래알이라고 치면 알갱이가 굉장히 고와. 혀를 입천장에 대고 문질러보면 알갱이가 굉장히 작아서 자글자글... 해서 되게 기분 좋은 타닌 같아.


G의 감상평:
딸기밭에 있는 창고. 창고는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졌고 모래가 바닥에 깔려 있다. 목수인 아빠가 딸에게 딸기잼을 만들어준다. 스푼으로 하나 푹 떠서 맛을 보니 과육이 물컹하게 씹히나 금세 목 뒤로 넘어가 버린다.


J의 감상평:

스쳐가는 행인의 향수를 맡는 찰나,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정도의 향. 아주 약한 건포도, 우디, 견과류. 향과 달리 연하고 긴 맛. 타닌과 나무맛, 약간의 과실 향.


G: 마셨을 때 우리가 지금 딸기잼을 먹고 있어서 그런 건지 딸기잼 생각이 계속 났어. 어떤 이미지가 생각이 났냐면, 딸기잼을 만들다 보면 거기 안에 과육이 있잖아, 그 과육을 씹는 느낌. 묵직하고 깊은 맛, 그리고 상큼한 맛이 나는 딸기 생각이 났는데, 딸기 자체는 아니고 딸기잼이었던 거는 조금 더 jammy 한 뉘앙스가 있어서. 그래서 잼이라고 했어. 근데 그거 외에 감상이나 이미지가 별로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뭔가 맛은 섬세한데 저번에 마신 부르고뉴처럼 섬세하진 않고, 왜 이렇게 이미지가 생각이 안 날까 해서 상상을 좀 더 해봤어.

딸기잼 외에 타닌과 올빈(Old vintage의 준말, 주로 20년 이상 숙성된 와인을 의미한다.) 느낌을 묘사할 수 있는 감상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와인에서 특유의 나무맛, 먼지맛 이런 게 느껴지잖아. 그래서 딸기과육이 막 펼쳐져있는 딸기밭에 있는 오래된 창고 생각이 났어. 근데 왜 아빠라고 했냐면, 조금 투박한 것 같아서. 아빠가 딸기를 때려 넣고 막 만들어주는 느낌. 근데 목수야. 그래서 뭔가 좀 섬세함 한 스푼.. ㅋㅋ 막 만드는데 그래도 잘 만들어준 그런 느낌이야. 그리고 딸이 기다리고 있어. 딸과 목수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이 와인에 섬세함이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서야.

J: 무슨 말인지 알겠어.

G: 근데 딸이 스푼으로 팍 떠서, 과육이랑 와작와작 먹어. 과육이 물컹물컹하게 씹혀. 되게 깊은 맛일 것 같은데 생각보다 되게 후루룩 날아가 버리는 맛이야. 금세 목 뒤로 넘어가 버리고 훌훌 마셔지는 느낌. 엄청 묵직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러진 않은.

J: 아까부터 계속 맛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은데.

G: 맞아, 계속 변하고 있어.

J: 지금은 좀 다른 것 같아 내가 글 썼을 때랑.

G: 그래도 설명해 줘.

J: 난 일단 향은... 어떤 와인들은 되게 향이 강해서 향이 확 느껴졌다가 점점 무뎌지기 시작하잖아. 근데 얘는 향이 그렇게 강하진 않은 거 같아. 그래서 계속 맡을 수 있는 느낌이야. 비유를 하자면, 길에서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이랑 나랑 엇갈려서 지나가는데 그 사람이 되게 좋은 향수를 뿌렸어. 근데 엄청 꾸미는 사람이 아니고 약간 검소한 사람이라 한두 번 정도 향수를 뿌린, 옅게 잔향처럼 지나가는... 그래서 한번 뒤돌아보게 되는 그런 거지.

G: 그게 누구야?

J: 너? ㅋㅋ

G: ㅋㅋ

J: 암튼. 그런 향인 것 같고. 맛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건 약간 건포도? 우디한 냄새랑, 견과류 냄새 살짝?

G: 우디한 그 냄새가 맛을 보면 그렇게 많이 안 나는데, 향에서 진짜 많이 나. 우리가 향수를 설명할 때,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가 있잖아. 향수로 치면 탑 노트에서 우디 향이 엄청 많이 나.

J: 맞아, 다시 맡아봐야겠다.

G: 더 줄게. 그리고 처음에 땄을 때는 향이 좀 셌거든. 그때는 이런 우디함, 딸기잼 같은 냄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좀 셌는데 놔두면서 점점 열리는 거 같아. 더 조화로워지고 맛있어지고 있어.

J: 아까 처음에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아껴 마실걸. 네가 이 와인이 투박한데 섬세한 것 같다고 했잖아. 나는 어떤 점에서 그걸 동감했냐면, 이게 30년 된 와인이라서 그런지 섬세한 재료들을 넣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다양한 향과 맛이 있었던 와인인 것 같아.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로 일체화된 느낌, 통일성을 딱 가지게 된 느낌이야.

G: 그 말이 맞는 게, 원래 올빈이 그게 좋잖아. 이제 막 만든 와인은, 겉절이 김치랑 비슷한 거지. 처음 먹으면 파맛, 마늘맛, 젓갈맛, 배추맛 이런 게 다 느껴지잖아. 재료의 맛이 다 느껴지는데 그 김치를 1년간 숙성해서 묵은지로 먹으면 각각의 맛이 안 느껴지고 하나로 느껴지잖아. 그게 올빈의 특징인 것 같아.

J: 맞아, 이게 그래서 통일감이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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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이게 보르도의 뽀이약이라는 지방의 와인이거든. 유명한 지방의 와인인데 나도 보르도를 진짜 몰라서, 오빠랑 같이 배우면 될 거 같아.

J: 내가 이 와인이 좋은 점은, 한국인들이 소주를 많이 먹잖아. 무향 무맛의 술을 많이 먹잖아, 약간 달지만. 근데 내가 이 와인이 좋은 점은 이 와인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맛이 나지 않아서 좋은 거 같아.

G: 맞아. 맛이 좀 직관적인 거 같아.

J: 어떻게 보면 되게 투박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근데 또 맛은 소주나 위스키나 이런 거에 비하면 굉장히 섬세해. 그래서 난 이 와인이 꽤 괜찮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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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프랑스 보르도 지도, (우) 뽀이약 지도

G: 자, 이곳이 뽀이약 마을이야. 보이지? 보르도에는 지롱드 강이라는 큰 강이 하나 흐르는데, 이 강의 왼쪽 밭이 있고 오른쪽 밭이 있어. 그래서 이걸 좌안(Left bank), 우안(Right bank)이라고 부른대. 여기가 메독인 거야. 여기의 이 지방이 뽀이약이야. 우리가 마신 건 샤또 생 맴버드(?)... 지도에 안 보이네.


이게 보르도와 보르고뉴의 차이가 뭐냐면, 부르고뉴는 과거에 대부분 소작농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래서 '샤또(Chateau)'라는 명칭보다는 '도멘(Domaine)'이라는 말을 써. 그래서 도멘 드 라 로마네 꽁티(Domaine de la Romanée-Conti)처럼 아무리 유명한 와이너리라도 대부분 도멘이라는 이름을 쓰거든. 대부분 가족 중심이고. 건축에 비유하자면 아뜰리에 같달까. 반면에 샤또는 대기업이야. 엄청 큰 가문이 몇백 년동안 대대로 이어온, 일종의 대기업 같은 거거든. 그래서 보르도는 대부분 샤또라는 이름을 써. (중략) 아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우리가 나 결혼하면 따려고 하는 샤또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 Rothschild) 있잖아. 같은 지역이었구나. 샤또 라피트(Chateau Lafite Rothschild)도 여기야.


Screenshot from Vivino

J: 여기 유명한 지역이구나. 꽤 좋은데 평이?

G: 맛있어. 난 사실 기대를 별로 안 했는데 괜찮네.

J: Cedar, vanila, oak, earthy, plum, blackberry... 맛있네, 잘 샀네.

G: 보르도... 역시 30년은 돼야 맛있는 건가.

J: Cigar box spice라고도 쓰여있어.

G: 아, 시가박스가 우리가 말한 나무향을 말한 것 같아. 훈제향 이런 것도 난다는 건가?







G: 보르도 지역 중 최고의 지역 하나만 선정한다면 논쟁의 여지없이 뽀이약을 선정할 거래. 그랑크뤼 클라쎄(Grand Cru Classé)가 18개... 저번엔 엄청 실망했는데 이번엔 괜찮네.

J: 가끔 이런 거 하나씩 하나 사보고 싶긴 한데,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봐야 아니까 좀 그렇네.

G: 근데 이렇게 가끔 사 마시다 보면 우리가 좋은 구매처를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J: 저번에 마셨던 건 어디였어? 맛없던 거? 관리를 잘 못 한 건지... 내 생각엔 우리가 이게 제일 맛있을 때 먹는 거 일수도 있어.

G: 이게 그런 것도 있어, 빈티지별로 언제 여는 게 제일 좋은지, 몇 년 숙성이 제일 좋은지 시음 적기가 있거든. 그걸 알고 먹으면 이걸 사도 되겠다 아니겠다를 판단할 수 있는데, 모르면 뽑기를 해야지. 마시면서 배우는 거지.


(중략)


오메독(Haut-Medoc)이야. 그때 우리가 마셨던 것도 오메독 지방이야. 우리가 그때 마셨던 게... 샤또 라네싼(Chateau Lanessan, Haut-Medoc 2000)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곳이에요. 안 보이죠?


(짠)


J: 여기 맨 위에가 물처럼 보이는 게 신기해.

G: 굴절 아닐까?

J: 어쩌라고.

G: ㅋㅋ

J: 와 지금 먹어봐. 더 맛있는데 지금? 어 근데 바디감이 엄청 적어졌다.

G: 바디감을 표현하려면 물과 기름을 생각하면 돼. 물같이 가벼운 게 라이트 바디, 기름같이 묵직한 게 풀 바디.

J: 물 같아. 빨리 마셔야 될 것 같아.

G: 알겠어, 맛이 가고 있구나. 이제 보내주자.

J: 마셔봐 지금.

G: 그러네, 진짜 물 같네 이제. 오 신기하다. 우리가 열어놓은 1시간 동안 엄청 맛이 변했어. 처음엔 좀 강했는데, 열고 좀 있으니까 확 살아났다가 지금 확 꺾였어. 진짜 신기하다.

J: 빨리 먹어 없애버리자.


(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