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메릴 스트립과 셰프 알랭 파사르
It’s not about me, It’s about poor Emma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가엾은 엠마의 이야기야)
넷플릭스 제작 뮤지컬 영화 <더 프롬>에서 배우 메릴 스트립이 부른 ‘It’s not about me’의 일부분이다. 미국 인디애나 주에 한 고등학교 졸업 파티 프롬(prom)에 한 여고생 엠마(Emma)가 커밍아웃를 하면서 프롬에 동성의 연인을 데려가겠다는 선언이 파문을 일으켜 프롬이 무산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메릴 스트립은 <더 프롬>에서 엠마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지켜내는 ‘디디 앨런’을 연기했다. 디디는 브로드웨이 스타로, 연기력에 대해 세간의 혹평을 받자 동료 배우들과 함께 무너진 명성을 되찾으려 한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엠마의 사연을 접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받게 된 부당한 사회적 시선에 디디와 동료 배우들은 곧바로 달려가 이 여고생의 영웅 역할을 한다. ‘Actors(배우)’들이 한데 모여 ‘Activists(사회 운동가)’가 되어 여전히 사회에 만연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맞선다.
메릴 스트립은 ‘디디’로서 뿐만 아니라 배우-개인으로서도 성소수자와 같이 차별 대우를 겪는 이들을 대변하는 영웅이다. 그녀는 2017년, 성소수자 권리옹호단체인 ‘Human Rights Campaign’이 수여하는 ‘전국 평등 동맹상(National Ally for Equality Award)’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찾아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 선생님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했다는 소개하기도 했다. “무식과 억압, 그리고 우리 자신을 숨기는 나쁜 시절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권리를 위해 죽은 사람들, 성소수자 운동의 선각자들, 모든 인권운동의 맨 앞줄에 섰던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녀는 <더 프롬>에서 배우-역할로서, 그리고 배우-개인으로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지지하고 독려한다. 마치 메릴 스트립은 디디를 통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펼친 느낌이다.
물론, 한 배우의 성격 혹은 외모가 맡은 배역의 특성과 완벽하게 일치하기란 불가능하다. 때로 배우는 캐릭터에 흡수되어서 오히려 가상의 인물을 위해 잠시나마 자신의 존재의 일부를 포기해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배우는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역할로 인해 자기 자신이 훼손된다면, 즉 자신의 가치관과 반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과연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위대한 배우들은 자신과 역할과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 같다.
여기서 배우는 “역할 자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을 연기하는 예술가의 본질과 역할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28쪽)”는 <배우의 철학>의 저자 게오르그 짐멜의 주장이 떠오른다. 배우는 연기 할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배역의 특성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스스로의 한계와 개성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배우의 철학>에서 “배우의 독특함이 인물 전체를 바꾸게 하고 인물에 변천, 풍부함과 색조를 더하며 인생을 만들어 낸다(24쪽)”며 “연기가 변하고 배우의 독특한 존재가 열리는 것이다. 존재가 바뀌고, 확장되고 체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배우-개인과 배우-역할의 관계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배우야 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메릴 스트립은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더 프롬>속에 메릴 스트립은 대본 속의 디디도 아니며 배우 메릴 스트립도 아니다. 그녀의 주체는 ‘디디’라는 역할 속에 녹아 캐릭터 디디와 배우 스트립의 합작품이 완성되었다. 디디가 부른 노래 ‘It’s not about me’에서 가사에 “Equality should be his country’s norm(평등이 이 나라의 표준이 돼야 해)”처럼 그녀는 전 세계 편견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당당하게 외친다. 그렇다고 디디를 볼 때 인간 메릴 스트립이 불필요하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허구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면서 동시에 두 세계의 완벽한 화음을 이룬다.
그녀가 창조한 캐릭터와 세계는 여러 영화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메릴 스트립은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감독 로버트 벤턴)에서 한 가정 주부 ‘조안나’로 나온다. 그녀는 수년간의 남편 뒷바라지와 육아로 인해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해 남편과 아이를 떠나지만, 이혼 소송과 양육권을 갖기 위해 1년 반 만에 돌아온다. 법정 장면에서 메릴 스트립은 조안나의 그동안의 주부로서 겪었던 어려움과 부당함을 토로해내는 독백 대사를 직접 썼다. 메릴 스트립은 ‘조안나’를 통해 미국의 한 여성을 대변한 셈이다. 실제로 그녀는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다. 그녀는 알려지지 않는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여성들이나 억압받고 산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녀의 사고와 가치관은 영화를 통해 넌지시 비추어지곤 했다. 그녀는 수많은 영화를 통해 가정 살림과 자녀 양육으로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주부들의 내적 갈등과 그들이 자아 실현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또한 비교적 최근 영화 <줄리&줄리아>(감독 노라 애프론)에서 늦은 나이에 외교관 남편을 따라 프랑스에 간 미국 여성 ‘줄리아’를 연기했다. 그녀는 남편이 일하는 동안 그저 집안에만 있지 않고 밖에 나와 프랑스어를 배우며 프랑스 남자들이 가득한 요리학교에 간다. 그녀는 요리에 취미를 붙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요리책까지 출간하게 되어 대스타로 성공한다. 남성 가득한 요리학교에서 주변의 시선을 뛰어넘고 도전하는 줄리아의 모습은 마치 메릴 스트립이 남성 중심적인 할리우드 영화시장에서 유리천장 깨는 모습과 닮았다.
이와 같이 자신의 신념과 상응하는 배역을 맡는 배우야 말로 연기의 기교를 부리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창조해내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책 <배우, 말하기, 자유>에서 저자 피터 브리몬트는 “연기를 잘 하는 것은 어쩌면 연기력보다 배우의 의식 상태와 훨씬 더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연기를 잘한다’는 평가는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외의 모든 예술 행위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그 분야의 장인 혹은 대가가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같다. 한 요리사가 있다고 하자. 그의 음식은 중독성 있고 남달라서 모든 사람들이 맛있다고 감탄하고 그의 식당에는 웨이팅이 끊이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봤을 때 실력 있는 요리사일지언정,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 한 요리사를 예술가로 만드는가? 요리도 창조 행위를 하는 예술가다. 요리사도 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이 드러나는 음식을 하면 비로소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프랑스편>에서 프랑스 셰프 알랭 파사르는 그의 요리에 자신만의 철학을 넣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 Arpège라는 미슐랭 3스타 식당의 메인 셰프다. 그는 어느 날, 요리에 대한 철학을 완전히 바꿨다. 그는 토양, 햇빛, 바람, 비, 등의 자연과 우리는 분리할 수 없다는 가치관을 요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육식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게 되어 채식 지향의 식당으로 바꿨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요리를 통해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단순히 가치관의 실현만이 그들을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을 투자하고 실질적인 노력을 하는 수행가이기도 하다. 메릴 스트립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연기하기 위해 대본을 스스로 수정하고 그 긴 대본을 단번에 소화해내기도 했다. 알랭 파사르는 하루에 14시간씩 요리에 전념하며 30년 이상 요리를 해야 진정으로 셰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배우는 가면을 쓰면서 대본을 현실화하는 봉사자가 아니다. 셰프는 타인에게 밥해주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연기와 요리를 통해 내면을 예술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의 장인 정신으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한 움직임은 특별한 존재라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은 우리보다 삶의 본질을 먼저 깨우친 것이 아닐까? 삶의 본질,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말이다. 온전히 자신으로서 살아가며 소신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동시에 주변 소수자와 자연에 대해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이유다. 그래서 그런지, 삶의 본질을 먼저 실천한 예술가를 과거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메릴 스트립(아니 디디라고 해야하나)가 "I won't play blind, deaf, and dumb"라고 외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이와 같이 ‘It’s not about me’의 가사 처럼,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각자의 신념과 장인 정신을 예술로 승화해야 할 것인가?
I won’t play blind, deaf, and dumb(난 더 이상 눈감지 않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