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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rti 아띠 Feb 10. 2021

<블러바드>에서 정체성 마주하기

로빈 윌리엄스의 여운 남는 연기

<블러바드(Boulevard)>, 로빈 윌림엄스의 (거의) 유작. 난 그를 <쥬만지>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팬> <굿윌 헌팅>에서 만났다. 그때까지 왜 그의 연기가 호평을 받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이제는 이해가 간다. <블러바드>에서 그의 연기는 무덤덤하는 듯하지만 자연스럽다. 과장하지 않는다. 그의 눈빛은 깊고 강렬하다. 마치 그레이트 블루 홀(Great Blue Hole)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갈 것 같은 매력을 풍긴다. 우리가 찾는 진짜 맛집의 음식은 간이 세지 않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것처럼, 그의 연기는 과하지 않지만 여운이 남는다.

 


승진을 앞둔 평범한 은행원 놀란은 나이 60이 다 되어간다. 어느 날, 그는 레오라는 젊은 남자를 우연히 길(boulevard)에서 마주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다. 그는 레오에게 낯설지만 묘한 감정을 느끼며 수십 년간 숨겨왔던 그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이제껏 쇼윈도 부부 생활했던 놀란은 아내와 아버지에게 베일 싸매어 꾹꾹 누르던 자신의 본모습을 선언한다. 자신만의 길을 갈 것이라고.




놀란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며 이것은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감내해야 하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것만큼이나 큰 죄와 고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되찾는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는 대단했다. 그가 연기한 놀란이라는 캐릭터는 인생 전반을 가짜로 살아왔기에 그의 말과 눈빛에서 맺힌 한이 느껴졌다. 로빈 윌리엄스는 어떻게 짧은 대사 속에서 그 한 눈과 몸짓에서 뿜어낼 수 있었을까? 그는 정말 놀란으로살아있는 연기를 했다. 배우와 배역이 하나가 될 때 관객은 신비감을 느낀다고 하던데, 난 그것을 체험했다.


이 영화를 본 것이 우연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최근 카페에서 읽은 <다시, 연습이다>에서 저자 기타리스트의 섬세한 열망에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할 때마다 100미터 달리기한 마냥 숨이 차올랐다. '냅킨이 구겨지는 소리'와 같은 세밀한 표현과 형언할 수 없는 그의 진하고 불꽃같은 감정은 나의 마음 어떤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그 버튼은 오래전부터 내가 외면해와 먼지가 수북이 쌓인 감정과 감성의 버튼이었던 것이다.


그때, 카페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귀를 닫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가요나 팝송을 거의 듣지 않았다. 일부러 거부했다.(그래서 나는 옛날 가수 음악밖에 모른다.) 음악을 들으면 가끔 일상생활이 어려울 때가 있었기에 이성을 부여잡기 위해서는 감정에 휩싸이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집에서 부모님이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비긴 어게인> <히든 싱어> 등의 음악 프로그램을 즐겨보곤 했었는데, 그들은 언제나 음악에 심취하고 눈물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혀를 내두르며 한심하듯 고개를 저으며 귀를 닫고 방으로 들어갔었다. 내가 감추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그들이 보여줬던 것일까? 왜 난 그토록 음악을 들으며 마음껏 춤추거나 영화를 보면서 실컷 웃고 울지 못했던 것인가?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가끔 그 화가 엉뚱한 곳으로 튕겨나갈 때가 문제지만....)



<블러바드>에서 레오를 만난 놀란처럼,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었던 나처럼, 우리의 '정제되지 않는' 진짜 모습은 아무리 부정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되돌려야 한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남은 생에 자신으로서 살아가면 이미 아름답고 성공한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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