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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물결 Jun 15. 2020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태풍이 부는 날 제주에서 02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200




한 3-4시간쯤 잤으려나. 빗소리에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잤는데 생각보다 눈이 일찍 떠졌다. 어디를 갈까 고민을 했다. 비가 많이 내렸고 앞으로도 많이 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카페 투어를 갈까 하다가 걸으면서 결정을 내리려고 일단 집을 나왔다. 


밤새 비가 꽤나 왔나보다. 길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슬리퍼 신고 나왔기에 젖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가져온 신발이 슬리퍼 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걸어야지 뭐.




제주가 좋은 이유는 고층 건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집 앞 가로수와 1층짜리 건물의 조화가 참 아름답다. 전에 댓글에 어느 분께서 내가 생각하는 조화로움이 무언지 물으셨는데 한번도 조화로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적잖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조화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걸 처음 알았다. 조화로움이란게 뭘까. 1과 1이 만나 2가 아닌 3 이상의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닐까. 단조로울 수 있는 그림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당신이 생각하는 조화로움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길을 걷다가 엄청 큰 개와 마주쳤다. 진돗개 같은 종류의 개였는데 목줄도 없고 주인도 없이 돌아다녔다. 거의 내 허리정도까지 올 것 같은 엄청 큰 개였다. 작은 개도 무서운데 큰 개를 보니 더 무서워서 일단 편의점으로 피했다. 제주도는 정말 다 좋은데 이렇게 큰 개 마주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사실 처음부터 개를 무서워한 건 아니었다. 어릴 때 사진 봐도 개랑 찍은 사진도 있고 우리 집에서도 백구를 키웠다고 하니까. 근데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기억에 호적메이트가 강아지에 물리는 걸 눈으로 봤던 적이 있었다. 엄마 가게 옆 치킨집에서 키우던 삽살개였다. 그 모습을 본 이후로 개가 무서웠다. 나를 지켜주는 존재가 아닌 나를 공격하는 존재로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강아지들이 나한테 와서 애교를 부리는 것도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다. 그냥 나를 신경 안 썼으면 좋겠다. 


편의점엔 고양이가 주인마냥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쯤되면 제주도는 동물의 천국이다. 고양이는 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인지 개보다 더 좋다. 



편의점을 갔다 오다가 버스를 놓쳤다. 배차 간격이 30분이나 되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택시가 지나가길래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는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퇴직을 하고 집에서 놀기만 하니까 재미가 없어서 제주에 내려온 이후 이 곳에 정착을 했다고 했다. 운전하는게 힘들지 않냐 물었더니 매일이 드라이브 다니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 일을 하는게 아니었으면 자기가 어떻게 아가씨랑 이런 대화를 하면서 제주 풍경을 보겠냐고 농담도 했다. 인생 2막을 멋지게 보내시는 분 같아서 존경스럽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어디를 가면 좋겠냐는 내 질문에 택시 아저씨는 여미지 식물원을 추천해줬다. 그래서 갔다. 여미지 식물원으로.




여미지 식물원은 처음이었다. 사실 누가 혼자 제주에 여행 와서 식물원에 갈 생각을 할까. 초록초록한 식물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근데 사실 다른 식물원들과의 차별점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비 오는 날 가기엔 참 좋은 곳이었다. 


작년 9월에도 제주에 있었는데 그때는 비오는 날 환상숲 곶자왈에 갔었다. 숲 해설가 분과 숲 속을 걷는 거였는데 비가 엄청 많이 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비에 젖은 풀 냄새가 참 좋으니까.



식물원을 걷다가 어디를 갈까 지도를 살펴보는데 근처에 천제연폭포가 보였다. 수학여행 필수 코스였던가?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안 와서 모르겠다) 어쨌든 천제연폭포는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을 갖고 갔다.


티켓부스에서 직원분께 여쭤보았다. 폭포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그분은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아 뭐 30분 갈 수 있지 라고 생각하고 티켓을 끊고 폭포를 향해 갔다. 


아주 멍청한 짓의 시작이었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비가 엄청 내렸다. 바람도 엄청 불었다. 안그래도 바람이 많은 제주에 그것도 높은 곳에 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 아니었을까. 슬리퍼 때문에 미끄러질 뻔한 것이 여러번이다. 이때 그냥 나왔어야했다.



내가 생각을 못했던게 폭포는 산 속 깊숙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로 이 폭포를 보기 위해선 산을 타야한다는 이야기다. 천제연폭포 가는 길 이라고 써진 표지판 앞에 계단이 쭉 놓여있었다. 이 계단을 따라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때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어느 노부부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냐고. 그랬더니 금방 가요~ 라고 대답해주셨다. 그때 나는 잘 판단했어야 했다. 그들은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슬리퍼 신은 건 나 뿐이라는 것을.


비가 오고 덥고 습해서인지 모기가 엄청 붙었다. 으 극혐. 더 극혐은 내리막이 꽤나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내리막이 지속된다는 것은 나중에 이만큼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건데 이왕 시작한 거 폭포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려갔다. 슬리퍼 질질 끌고.


폭포를 보니 시원하긴 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물 양도 많고 좋았다. 좋았는데. 그 기분은 진짜 딱 5분 갔다. 사진 대충 찍고 다시 올라가려고 하니 막막했다. 그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었던 내가 제일 원망스러웠다. 체력이 꽤나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쓰레기였다. 계단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진짜 너무 화가 났다. 나 자신을 욕을 하며 올랐는데도 끝이 없었다. 진짜 너무 짜증이 났다. 비 오는 날 어느 누가 산을 타지? 그것도 슬리퍼를 신고? 지금 생각해봐도 진짜 짜증난다. 


누군가 비오는 날 폭포를 보러 간다고 하면 진짜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다. 그것은 엄청난 훈련을 받은 등산인들만 가능한 것이라고. 더위와 습기를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자만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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