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명분 변태의 진화기라 할 수 있다.
무릇 디자이너를 떠올릴 때 우리들은 보편적으로 스타일리시하고 미적감각을 가진, 굉장히 유니크한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미대를 나온 본인의 주변에도 그런 디자이너, 혹은 예비 디자이너가 많다. (아직은 나이의 앞자리가 2여서 주변에 예비 디자이너 친구들도 여럿 있다.) 그들은 각기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어도 자신의 옷 스타일에 대한 세계관이 형성되어있고, 집 꾸미기에는 또 다들 얼마나 열성적인지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집꾸미기 컬렉션 저리가라다. 실제 집의 모습은 인스타그램 그 이상으로 훌륭했다. 사진을 찍고, 핫플을 발견하는 센스들은 기본이다. 그들에겐 유니크의 아우라가 물씬 풍긴다.
본인의 재학시절 공부하면서 알게된 디자이너들도 그러했다. 그들의 사생활이라던지 인스타그램 계정들의 상태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작업물의 스타일이 바로 연상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카림 라시드하면 떠오르는 과감한 색과 곡선이라던지 아릭 레비하면 떠오르는 바위형상이라던지, 그런 자신만의 시그니쳐 스타일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본인에겐 그런 유니크가 없었다. 그래서 본인은 이 점에 대해 회의를 갖기 마련이었고 약간 컴플렉스까지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본인도 “안그렇지만 그런 척 보여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로, 말 그대로 특정 스타일만 선호하기 보다 각 스타일의 느낌들이 다 긍정적이기에 그 여러가지 안에서 특정 한가지 유형을 고수하기가 어려운 마음이 하나 있다. 난 키치한 것은 키치한대로 좋고, 모던은 모던대로 좋은 참으로 줏대없는 사람이다. 근데 내 눈엔 그들이 모두 공평하게 예쁘니, 이것을 어떡하란 말인가. 나는 넨도 디자인의 심플한 느낌도, 멘디니의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느낌도 공평하게 사랑한다.
두번째로 사람의 유니크함이란 본인이 만들어낸 작업물 외에도 자신이 가진 것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인데 본인이 물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는 선호보다 항상 명분에 반응했다. 뽀짝한 핫핑크색 미니백에 마음이 요동치다가도 결국에 백배는 더 매고 다닐 것 같은 휘뚜루마뚜루 검은 백을 택하고, 가끔 입을 것 같은 원피스보단 부담없이 여기저기 입을 수 있는 청바지가 좋다. 최근에 집을 이사했을때는 ’키티버니포니‘의 강렬한 패턴이 마음에 들어 수십번 고민하다가 결국 할인을 잔뜩하는 무지이불을 구매했다. 그래도 약간의 야욕이 남아 꽃무늬 베개를 하나 구입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명분‘이라는 것은 소비상황 외에도 내 모든 라이프스타일을 관통한다. 나에겐 뭐든 ‘그냥‘ 하는 것이 없다. 집청소를 하는 행위는 공간을 정리해 쾌적함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고, 일기를 적는 행위도 나중에 볼 때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선호보다는 정말이지 목적과 명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본인이 재학했던 대학교는 1학년 때 디자인학부로 입학하여 2학년이 되기 전 산업 디자인과 시각 디자인 두 커리큘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본인은 산업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그 과정에서도 나는 줏대는 없고 명분은 있는 선택을 했다. 시각도 산업도 둘다 비등비등하게 재밌어 보이니 차라리 산업 디자인 커리큘럼에 가서 시각디자인까지 배워보고 최종 결정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아 이러지 말아야했는데..... 말잇못)
아무래도 산업디자인이 사람이 사용하는 물체를 디자인하는 것이다보니 그때부터 모든 작업물에 본격적으로 명분이 대입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보편적으로 아름답게 여겨지는 컵을 디자인 했더라도 잡는 행위가, 마시는 행위가 불편하다면 그 가치는 하락된다. 사용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사용하는 이유가 있어야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의 작업은 유달리 명분에 있어 진심이었다.
본인은 훗날 산업 디자인을 버리고 시각 디자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던 때처럼 목적과 명분은 본인에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돌이켜보자면 작업물이 항상 생긴건 개성없는데 제각기 목적과 명분은 늘 존재했고, 그를 바탕으로 나는 나의 작은 산출물들을 피력해왔다.
명분변태로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A라는 이유로 A'한 컨셉의 제작물이 필요하고, 그 컨셉을 위해 B한 형태의 레이아웃, C한 폰트가 필요하다 등 항상 업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두루뭉술함이 거의 없었기에 의사 전달에 용이했다. (물론 이런 커뮤니케이션을 잘 이해해준 상사분의 노고도 절대로 존재했다. 다행인 일이다.) 게다가 브랜딩 디자이너로 일하지만, 대체로 맡은 업무가 없던 브랜드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그 기초를 다지는 일이 아니라 수입하는 브랜드를 한국 시장에서 표현하기 위해 재해석하고 가공하는, 로컬라이징이 메인이었기에 아예 새로운 것을 제작해야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참 안분지족하고 잘 살고 있었다.
잘 지내는 와중 한계점을 발견한 것은 매너리즘을 이겨내고 디자이너로서 개인을 발전시키려는 시점이었다. 일을 하면서 브랜딩에 대한 매력을 굉장히 느꼈고, 우야무야 '내가 하는 일이 일단 브랜딩이니까...'라고 생각하던 시절과 달리 진실로 브랜딩 디자이너로서 성장하고 싶었다. 그래서 브랜드를 생성하는 관점에서의 브랜딩을 시도했다. 그런 과정에서 명분만 앞세우며 등한시한 나의 처참한 시각화 스킬을 직면하게 되었다. 심미성보단 명분을 택한 자의 최후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나는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배움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내가 유니크와 거리가 먼, 그저 명분에 눈먼 변태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각화 스킬을 배운다는 것은 인정하기 이전과 많이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전엔 디자이너의 유니크함이 없는 나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주로 '어떤 개성을 가진 디자이너로 성장할까?'에 많은 고민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특정한 것에 대한 선호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판단한다.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내 주관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데 훈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굉장히 여러 스타일을 표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각화 스킬을 배우고자 한다. 마치 정글에서도 사막에서도 자라는 잡초처럼 나는 내 뚝심보다는 상황에 따른 대응을 하는 쪽으로 진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더이상 '유니크 하지 않은 디자이너'라는 것에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이 글을 적은 이유는 근래 디자이너들의 개인적인 생각이 담긴 글들을 뒤적이는 과정에 자신만의 세계가 없어 아쉬워하는 이의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디자이너 개인이 유니크하고 자신의 세계가 확실하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세계를 동경하며 그것이 없는 당신을 그만 야단치라고 나는 전하고 싶다. 무릇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막연하게 가지고 싶어하기 보다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가장 나에게 맞는 옷을 입히는 것이 어쩌면 더 맞는 방향이 아닐까? 나는 유니크를 가지고 싶었지만 항상 그것을 가진 척 따라하려 했을 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고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니크가 없음을 인정하고 늘 현실적인 준거에 대응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이후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