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만 살아남는 지혜
스스로 글쓰기를 잘한다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칭찬에는 많이 인색하신 편이었지만, 집에 오면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1인 다역 연극하는 것처럼 풀어내는 재주가 있어 두 분은 (귀 따가운 수다를) 들어줘야 하는 육아와 교육을 하셨어야 했다.
어머니, 아버지께 차마 부끄러워하지 못했던 말을 비유와 은유라는 마법과도 같았던 기운을 빌려서 시에 담아봤을 때는 그렇게 나의 온도에 비해? 칭찬과 인정에서 만큼은 냉장고의 밖과 안의 온도처럼 달리 느껴지던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녹이기도 했다. (물론, 속 시원히 잘했다는 칭찬을 듣진 못했었지만)
마음을 싸맬 필요 없이 날 것 그대로 내보일 수 있던 표현의 자유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라는 좋은 핑계로 '오글거림'이 되지 않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교내 신문에 나의 시가 빈번히 실리기도 했고 나고 자란 도시 지역을 대표하는 대회에 출전하거나 글쓰기 장이 열리면 소소하게 수상을 하기도 했었다.
조금씩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는 나의 doing이 아니라 being으로써 인정을 받는 말을 들어봤었더라면, 아쉽거나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잘했다.'라는 한마디가 듣고 싶다는 꿈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저 내가 느낀 바를 떠들어 재끼는? 일 외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공부머리를 타고난 학생도 아니었기에 담임 선생님의 눈에 들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현상에 대해 느낀 바가 있다면 그건 꼭 그 상대에게 전해주거나 돌려주거나 남겨주려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느낀 것이 표현한 것을 다 담지 못해 애쓸 때도 있었지만 때론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불편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거친 사회생활이라는 과목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중 일부를 미국에서 보냈던 것도 한몫을 했던 것 같고 이런 타고난 기질이 만났던 게 그 배움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정말 눈동자가 촉촉하게 빛나는 팀장님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팀장님, 정말 눈이 촉촉하고 예쁘세요. 막 반짝거리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던 일이 있었는데 돌아왔던 말은 "너는 그런 것 좀 하지 마! 나 그런 게 제일 싫어!"였다.
내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눈이 팀장님의 눈에 가닿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다는 눈치셨다. 내가 아부를 하듯 자주 그런 말을 했더라면 부담이 되셨겠다 싶었지만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진심으로 느꼈던 바를 말씀드렸던 것이라 조금 더 쓰리고 아팠다.
미국에서는 양말 색깔로도 칭찬을 받던 게 인사치레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맞다. 내가 성인이 된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임을 각성했다. 속상해하며 잔을 기울이던 내게 친구가 와서는 해줬던 말이 참 달게 느껴졌다.
"원래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이 더 잘하기도 하고, 더 못하기도 하는 게 있어. 그게 바로 인정이야. 인정에 있어서만큼은 모두가 정말 인색한 듯해.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인정과 칭찬에 정말 인색하잖아. 그래서 여기서 그걸 잘하는 사람이 더 잘나 지거나 특별해지는 것 같아."
친구의 말은 정말 암담한 현실을 좌시하게 만드는 것 같다가도 내게 위로처럼 와서 등을 두드려줬다. 물론 그걸 칭찬처럼 받지 못하고 부담으로 받는 분들에게 내가 원치 않는 선물을 줄 필요는 없지만, 그로 인해 힘을 얻거나 나의 곁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로 길을 밝혀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로 됐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승진에 배가 아프고 샘이 나고 (내가) 인정하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의식으로 겨우 뱉어내기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봐왔다. 나 역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 어떤 이의 승진에 약이 오르라는 식으로 와서 명함을 내미는 그 이의 명함을 남몰래 째려보다 못해 버려버리기도 했었으니까.
그랬던 일도 잠시, 그건 내게 오히려 큰 독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런 마음을 품는 건 내 발전보다는 그 이의 흥망성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내가 움직일 수도 없는 그 사람에게 나의 에너지를 모두 남용하도록 허용해 버리는 손해라는 것이란 걸. 그렇게 인정을 해야 비로소 열리는 다음 문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는 자에게는 하늘도 스스로 갇히기로 한 사람을 어찌하기 어려워하지 않을까.
나이가 어리던 회사를 나보다 늦게 들어왔던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얻거나 된 이유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해도, 내가 못 본 이면의 모습이 단 하나라도 있을 거란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훨씬 시간이 지나, 나 또한 그 자리에 앉아보게 되거나 그 입장이 되어보니 밉게만 보이던 사람들의 굽어진 등이 보이기 시작하듯 그들이 말하지 못했던 속끓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질책과 조언도 (인신모독이 아니라면, 당연히.) 적어도 포기는 하지 않았던 애처로운 애정의 표현이었을 수 있었겠단 것을. 그 눈망울이 정말 예쁘셨던 그 팀장님의 얼굴이 스쳤다.
팀장이 되어, 실무 면접을 볼 때 "팀장인 제가 지원자 분보다 나이가 어린데, 저와 같이 일을 하시는 것이나 더 나이가 많으신 임원 분들과 지내시는 건 불편하지 않으실까요?"라는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면 십중팔구 모든 지원자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보다는 그분의 경력을 존중하기에 열심히 배우겠다."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말했던 지원자의 퇴사사유가 "내가 (어린 팀장보다)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회사의 분위기가 싫다."였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쓰린 고배를 마셨다.
어느새 나도 승진을 경험해 보니, 아주 두드러지게 두 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이 나뉘는 걸 경험했다.
1. 다른 사람의 승진이나 잘됨, 또는 그 직위를 (자신의 잣대로) 인정하지 못하면 그 이전 직급을 계속해서 부르는 등으로 어떻게든 그 못마땅한 마음을 표현하며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사람
* 보통 계속해서 이전 직급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 까먹었다는 말로 괜히 마음과는 다른 핑계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버릇이 있다. 아니면 자신의 방어기제 중 하나로써 의식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생각 등을 무의식으로 밀어 넣어 저지하려는 '억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 빈번히 잊어버린다 해도 의식적으로 바뀌어 보려는 노력 자체를 하려 하지 않는 사람도 감히 나는 이런 사람으로 분류했다.
2. 우선 (자신은 적어도) 보지 못했던 승진자의 이면에 있는 성과나 측면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사람을 자신과 협력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서로가 잘되게 하는 사람
어떤 세계 속에 살게 되는지는 자신이 선택할 몫이지만, 회사의 사장이나 임원이라면 더더욱이 이상향으로 바라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하며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믿는 바로는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그 회사에서 훨씬 빠르게 인정받고 성숙해 간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그저 그 사람의 성과를 받아들이거나 인정만 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런 사람의 성향은 나아가 그 사람에게서 배울 점을 찾아내곤 한다.
그 배울 점이 보인다는 것 또한 재능인데, 마음이 없다면 보이지 않고 들을 귀가 없으면 들리지 않는단 말이 괜히 있지는 않으리라. 그 재능을 키워가다 보면 자신의 세계를 그 사람에게까지 확장시켜 가며 더 큰 세상을 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물론 예외가 되는 것은 승진자가 부정하거나 불합리한 방법으로 쟁취한 경우 등이다.)
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또는 그 직급으로 호명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당위성과 (일정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마치 개명을 한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이전 이름으로 자꾸 부르는 일과 같다. 이 중요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참 많다는 걸 알았다. 특히 성장에 대한 기동력이 낮은 문화를 가진 조직일수록! 사람의 깃을 세워주는 것만으로도 기둥이 세워지는 일을 경험해 본 적이 드물거나.
실제로 다른 부서의 한 팀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표님이 주임이 된 지 1년도 넘은 자신에게 그냥 이름으로 호명한다는 것이 서운하다 했다. 나 또한 자신이 부탁할 일이 있을 땐 팀장이 되었다가, 아닐 땐 대리가 되기도 했었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넋두리를 할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 3서 1-2) 너의 영혼이 잘된 것처럼 범사에까지 잘되길 강하게 원하고 구해준다니. 이 보다 더한 응원이 있을까 싶었다. 이런 응원을 삶으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회사와 조직은 참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사람을 얻기도, 잃기도 한다.
나 또한 인정을 받기 위해, 먼저 인정을 하려 노력했다. 마치 내가 제일 힘들 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메아리로 돌아와 나를 울리던 그런 날들처럼.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 나도 그냥 똑같이 저 사람을 낮춰서 부를까..!!'라는 생각이 물론 욱하고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나도 그들과 같이 되고 싶지도, 될 필요도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인생 중의 많은 부분은, 특히 회사생활은 GIVE & TAKE다. 어차피 GIVE 하고 TAKE 할 거라면 돈이 들지도 않는 인정으로 생각보다 많은 TAKE를 얻는 것에 투자를 하는 것이 현명하다.
2024년은 감사일기 쓰는 일을 꾸준히 지켜오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감사를 하는지 궁금해서 감사일기 오픈채팅방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전부 그럴듯한 감사제목들 사이에서 유난히 빛이 나고 있던 겸손하면서도 가장 부유해보이던, 소위 '귀티'가 나던 익명의 분의 감사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을 먼저 인정할 줄 아는 통 큰 사람들이 밥을 사주는 선배들만큼이나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갑에 뿐만 아니라, 인품에도 여유가 있는 (나이와 직급 상관없이) 이런 선배들이라면, 퇴근길에 그 어떤 스트레스를 향하여 에스파의 'NEXT LEVEL'를 크게 외쳐 부를 특권과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