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 책을 읽다가 작가의 식습관을 훔쳐 보게 되었다. 훔쳐 봤다는 말이 웃기긴 하지만 작가는 내가 그의 책을 읽는지 모르니까 훔쳐 봤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내가 그저 재미로 곧잘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비건 지향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오랫동안 잔잔히 생각하고 있는 분야라 더욱 주의깊게 쳐다보게 되었다.
채식주의가 아닌 채식 지향적 식습관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비건이 되기 위한, 비건에 관심을 갖게 하는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것 같다. 역시 단어가 주는 힘은 대단하군.
내가 왜 비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채소를 먹지 않는 내 식습관에 대한 반성이었나. 마침 제일 지양해야 한다는 소고기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그간 채우지 않은 채소 섭취량을 늘리기에 채식이 좋을 것 같았다. 어리석게도 환경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육류에 열광하지 않는다고 해도 채소를 거의 먹지 않으니 식단을 바꾸면 먹을 수 있는 게 없다. 육류와 채소 둘다 썩 좋아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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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달 전 아무도 없고 냉장고마저 텅텅 빈 집에서 눈을 떴다. 배는 고팠지만 역시나 챙겨먹는 건 더 귀찮았다.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배에 뭘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갔다. 문을 열고 나오기 전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려 봤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식재료를 보면 무언가 먹고 싶을 거라는 생각으로 편의점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먹고 싶은 음식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즐겨 먹는 몇 가지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를 열 힘도 없어 사온 것들을 식탁에 풀어놨다. 봉투도 받지 않고 맨손으로 들고 왔다. 식탁 위에 어수선하게 풀어진 콜라, 커피, 물을 바라봤다. 대학생 시절 내 자취방 냉장고 속을 보는 것 같았다. 먹는 게 귀찮으니 씹는 게 귀찮고 그래도 먹긴 해야 하니 마시는 걸 택하는 편이다. 너무 배가 고플 땐 초코우유를 먹곤 했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먹는 외식을 빼면 나는 씹는 것보단 마시는 게 좋다.
채식에 대한 선호가 높아질 때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채소를 몇 가지 떠올려 본다. 구운 팽이버섯, 깻잎, 양배추, 고추, 궁채, 오이, 각종 과일 정도?
파, 양파, 가지, 피망, 당근 등 우리 집 반찬으로 흔히 올라오는 채소조차 먹지 않으니 채소 식단은 여러 모로 나에게 어려운 일이다. 당석 식습관을 바꾸면 하루에 한 끼 제대로 먹는 지금보다 더 안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남의 식습관을 훔쳐보는 내내 완전한 비건은 어려울 지라도 비건 지향 식단은 어느정도 도전해볼 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식단을 도전해본다는 말이 우습지만 먹는 행위를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겐 음식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먹는 일에 대한 관심을 조금 더 깊게 하기 시작했다.
일단 채식 위주의 식단을 먹기 위해서는 먹는 행위를 열심히 해야 한다. 먹는 일을 우선순위 가장 나중으로 빼는 나는 밥 시간에 맞춰 밥을 챙겨 먹어야 채식을 먹을 수 있다. 순서가 조금 웃기다.
그리고 최소한 일 년 동안은 육류든 채소든 다양하게 먹어야 한다. 끼니 때에 맞춰 먹는 습관을 들이고 먹는 양을 늘리고 영양을 고루 섭취해야 한다. 어쨌든 먹는 일은 내 안에 영양소와 에너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사 말고 영양이 고루 풍부하고 지방을 조금 붙일 수 있는 식단을 챙겨 먹어야겠다. 그리고 비건 지향 식사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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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준비를 하면서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챙겼다. 올 초엔 반찬까지 챙겨 먹기 귀찮아 볶음밥만 챙기곤 했는데 요즘엔 쌀밥과 세 가지의 반찬을 챙기고 있다. 반찬은 주로 언니가 만들어 둔 것으로 담는다. 언니가 먹고 싶은 반찬이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늘 "글쎄" 혹은 "없다"고 대답했지만 며칠 전부터 감자조림, 두부조림, 노각(늙은 오이)무침 등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의 채소와 한 가지의 육류, 소시지나 햄을 챙겨 점심으로 먹는다. 채소 반찬을 두 가지로 늘렸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다.
오늘은 언니가 사준 팽이버섯으로 점심 도시락을 꾸렸다. 구운 팽이버섯에 단무지 무침, 마른 김까지. 세 가지의 반찬과 쌀밥은 엄청 맛있었고 마음까지 편했다. 고기 없는 식단을 고민하고 상상만하다가 고기 없는 식사를 하고 나니 해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두어 번 더 같은 메뉴로 점심 도시락을 챙겼다.
엊그제 저녁엔 언니와 함께 장을 보다가 채식 위주의 식단을 말해봤다. 돌아올 대답을 알면서도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어"라는 말도 뱉었다.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넌 못 할 걸"이었다. 한 마디 더 해 "잘 먹지도 않는 애가, 채소도 안 좋아하면서.."
나는 정답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으며 "그치?"라고 대답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준비하면서 못다한 말을 이어 붙였다. "맞아.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면 팽이버섯만 먹어야 할거야. 애초에 난 잘 먹지도 않으니 굳이 따지자면 소식주의자지?"
언니도 정답을 들은 것마냥 웃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예정에 없었던 양배추 채를 씻어 소스를 조금 뿌리고 저녁 식탁 위에 올려놨다.
아무도 미래를 단언하지 못하지만 나에 대해 단언하자면 나는 결코 완전한 비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육류가 없는 한두 번의 식사는 상상 가능하지만 평생의 식사는 아직 상상도 할 수 없다. 비겁하게도 채소만 가득 먹고 건강하게 살 자신이 없다. 익숙한 육식 섭취자의 변명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비건 지향 식습관은 나를 돌보는 방법 중의 하나로 자리 잡을 것이다. 내 입에 무엇이 들어가고 내가 무엇을 먹는지 꼼꼼하게 챙기는 일, 되도록 먹지 않았던 음식들을 골라 입에 넣고 맛을 즐기는 일, 좀더 다양한 먹거리를 먹고 나에게 맞는 음식을 찾는 일. 이런 일들은 나를 조금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어리석게도 환경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나를 위한 변화는 분명 언젠가 환경에도 도움을 끼칠 것이다. 그럴 수 있게 변화할 것이다. 끝단 거의 모든 문장이 미래 지향적 서술어로 끝났지만 그건 일생에서 꽤 중요한 "식(食)"에 관해 고민을 하는 "과정의 불안함" 탓으로 돌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