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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Oct 11. 2024

역사를 즐기는 아이

하얼빈에서 만난 안중근 의사

1.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


 초등학교 2학년 봄 수업시간에 안중근 의사에 대해 배웠다.

원래 나는 영웅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레전드 히어로를 보면서 유비, 관우, 장비를 좋아했고, 가면 라이더와 파워 레인저도 좋아한다.

지금도 나는 영웅이 멋지고, 영웅이 되고 싶다.

학교 도서관에 가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책을 빌렸다. 세 권만 대출할 수 있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 책을 세 권 빌려서 집에 가져왔다.

집에 오는 길에 엄마한테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 권총을 세 발 탕 탕 탕 쏴서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 뜨렸대 ”

“ 태어났을 때 등이랑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일곱 개 있어서 이름이

안응칠이야 ”


도서관에서 빌려온 그림책에 한 손으로 권총을 들고 총을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 와아~ 와아~ ”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다음날도 도서관에 가서 안중근 의사 책을 빌렸다.

전에는 곤충이나 동물 책을 많이 빌렸는데 요즘은 매일 안중근 의사 책만 빌려온다. 어떤 책은 그림은 없고 글씨만 잔뜩 써 있다.

엄마가

“ 이 책 읽을 거야? ” 라고 물어보셨다.


“ 응, 다 읽었어 ”

라고 했지만, 글자는 하나도 읽지 않았다.

그림이 조금이라도 있는 책으로 다시 빌려야지!

사서 선생님께서

다음달에 새로운 안중근 의사 책을 구매해 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매일 안중근 의사 책만 빌려서 읽으니 친구들이

“ 넌 또 그 책만 빌리는 거야? ” 라고 한다.

“ 응, 나는 안중근 의사 좋아하니까 ”


안 중 근

집에 와서 엄마 휴대폰으로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나는 휴대폰이 없다. 유튜브나 게임은 할 수 없지만, 엄마가 검색하는 것은 괜찮다고 하셨다.

안중근 의사 사진은 거의 비슷하다.

흑백인데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사진이랑, 손을 뒤로 하고 있는 사진이다.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을 쭉 보고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로 그린 그림이 눈에 띄었다.


“ 엄마! 안중근 의사 뮤지컬도 있나 봐 ”

나는 뮤지컬을 정말 좋아한다.

콩순이, 미녀와 야수, 캐리와 친구들, 베토벤, 도깨비 방망이…

어렸을 때부터 뮤지컬 공연 보는 것을 좋아했다.


검색어에

안중근 뮤지컬

을 치니 뮤지컬 영상이 많이 나왔다. 노래 부르는 동영상도 있었다.

엄마도 뮤지컬 동영상을 보는 것은 뭐라 하지 않아서 계속 볼 수 있었다.

노래도 멋지고, 안중근 의사 역할을 하는 배우는 정말

안중근 의사와 얼굴이 똑같다.

“ 엄마~아! 우리 안중근 뮤지컬 보러 가요! ”

나는 안중근 뮤지컬을 꼭 보기로 마음 먹었다.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이었다.

가로수 사이로 바람에 날리는 현수막에 안중근 의사 얼굴이 보였다.

어제까지 전천당, 브래드 이발소 현수막이었는데….


“ 엄마!!! 안중근 의사 뮤지컬 하나 봐!!! 우리 저거 보러 가야 돼!!

엄마, 엄마 빨리 예매해요. 응? ”


“ 초등학생도 볼 수 있을까? 엄마가 알아 볼게 ”


나는 기도했다.

“ 초등학생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얼굴, 그 아래

영 웅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영웅이 좋다.

“ 엄마? 우리 안중근 뮤지컬 보러 가는 거지? ”


“ 그래~ 예매 했어. 00주 토요일에 보러 가자 ”


달력에 동그라미도 많이 그려 놓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 엄마 예매한 거 맞지? ”

“ 빨리 보고 싶어요 ”

몇 일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하는데, 하루는 왜 이렇게 긴 걸까?






 




2장. 영웅에 반한 아이


번개맨 옷 입고 망토를 휘날리며 영웅 놀이만 하는 아이가


“이건 뭐야?”라고 물어볼 때,


“음~ 그거? 한 번 찾아볼까?”

하고 책을 펼쳐 들면 아이도 곁에 앉아 답을 찾으려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렇게 집중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 맑고 예쁘다. 책 찾기를 몇 번하고 나면,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스스로 책을 꺼내서 찾아본다.


아이는 수업 마치고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매일 아침 독서시간에 읽을 거라면서 빌려온 책이 가방을 꽉 채웠다.

2학년이 되고 어느 날부터 ‘안중근 의사’ 위인전을 빌려오기 시작했다.

한 면이 그림으로 꽉 찬 그림책부터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책까지.

아이의 독서는 책장을 쓱쓱 넘겨 마지막 장을 닫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읽기가 아닌, 훑어 보기였다. 어느 날은 단편소설을 며칠째 가방에 넣고 다니길래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제목과 표지를 활용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데

‘요 녀석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거야?’

잔머리 굴리는 소리라는 표현대로 도로록 도로록 머리 굴리는 소리가 정말 들리는 것 같았다.

책을 왜 그렇게 성의 없이 보느냐고 잔소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빌리고 싶은 마음,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언젠가는 그 안에 쓰여진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바뀌겠지.’

더 이상은 학교에서 빌려올 안중근 책이 없다고 했다.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 휴대폰으로 ‘안중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엄마 안중근 뮤지컬이 있나 봐”


“응 ~ 있지. 엄마도 예전에 본 적 있어”


“진짜? 나도 보고 싶다”


“뮤지컬은 공연해야 볼 수 있으니까 공연하면 보러 가자”


그렇게 얘기하고 일주일도 안됐는데, 뮤지컬 현수막이 도로에 나부끼기 시작했다.


뮤지컬 공연장에는 초등부터 중고생,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대부분이었다. 때마침 뮤지컬을 각색한 영화도 상영되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가서 무대를 바라보니, 10여 년 전 뮤지컬 영웅을 관람했던 날이 떠올랐다.

흰 옷을 입은 배우가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노래를 우렁차게 뽑아내던 장면. 숨을 고르던

배우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전율이 일던 기억이.

공연 내내 많이 울었고, 종반부에는 통곡에 가까울 정도로 감정이 치솟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를 칠 때 나처럼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던 사람들의 모습까지 공연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아이에게 보여줘야 할 공연이라 생각했지만, 아이가 먼저 이 공연을 보자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이는 매일같이 뮤지컬 음악을 검색했다. 집에서도 차에서도 ‘영웅’ 수록곡을 들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들었던 노래를 실재 배우의 음성으로 들으려니 긴장됐는지 아이가 공연을 기다리며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땀이 배어 나온 촉촉하고 통통한 손을 꼭 쥐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나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10여 년 전 그 배우가 여전히 안중근 의사가 되어 무대 위에 있었다.


공연을 보고 온 후 아이의 안중근 사랑은 강도를 더했다.

생일 선물로 뮤지컬 대본집을 사달라고 하더니,

대사만 줄줄이 있는 대본집을 들고 집 안을 휘저었다. 종이를 오려서 콧수염을 만들어 붙이고, 베레모를 쓴 채 왼손 무명지를 접어 테이프로 둘둘 말아 무릎 꿇고 앉아서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비장하게 한 무릎씩 펴고 일어나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음은 안 맞아도 목청 높이 외치는 소리에 온 가족이 귀를 틀어막았다.

노래를 한다 기보다 고함을 지르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이가 노래를 마치면 우리 모두 두 손을 번쩍 들고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안중근 의사 놀이에 열심히 동참하면 퇴장시켜 줄 줄 알았는데… 한 곡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곡이 시작됐다.


책과 영화, 뮤지컬로 여전히 살아있는 ‘안중근’을 만난 후, 아이는 인간 안중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향, 가족, 나이, 사용한 총의 이름, 몇 발을 쏘았는지, 거사를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으로 든 갈증을 해소하려 했다.


“안중근 의사 박물관은 없어요? 박물관에 가고 싶은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남산 도서관 뒤편에 있다.

조선시대 왕궁이 내려다 보이는 남산은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해, 일제는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남산에 ‘한양공원’을 만들었다. 왕궁을 내려다본다는 것 자체가 조선 왕실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공원을 만들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화합을 도모한다더니,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그 자리에 일본의 건국 시조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세운 ‘조선신궁’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사람들은 조선신궁 건물을 부수고 쓸만한 물건을 가져갔다. 폐허로 남아있던 자리는 한국전쟁 이후 스키장이 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신궁에서 참배하던 자리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해방 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과 묘한 대립각을 만들어갔다.

1949년 4월 27일 「건국공로훈장법」이 대통령령으로 제정되고 8월 15일에 첫 훈장을 수여했다.  수여자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사람이었다.

김구, 안창호, 김좌진, 안중근, 이준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 받았다.

이들보다 앞서 1953년에 제임스 밴 플리트(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육군), 장제스(중국 정치인)

1955년에 하일레 셀라시에 1세(에티오피아 황제) 1957년 응오딘지엠(베트남 정치인), 1958년

에 아드난 멘데레스(튀르키예 정치인)가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은 환국하자마자 일본,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동녕, 차리석의 유해를 수습해 효창원에 안장 했다.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도 사람을 보냈지만 중국 전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끝내 찾지 못하고 효창원에 가묘를 만들어 두었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인 문효 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성덕임) 등의 묘역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제는 효창원의 우거진 소나무 숲을 파헤치고 왕실 가족의 묘를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했다.

그들은 이 곳에 텐트를 치고 야전훈련을 하거나 독립군 토벌과 소탕을 위한 비밀작전지로 이용하고, 골프장을 만들었다.

일제에 의해 유린된 효창원이 해방 후 독립운동가의 묘역이 되었으나, 1956년 6월 ‘모처의 지시’로 효창원에 현대식 운동장 건설공사가 시작되었다.

운동장을 만들어 사람들이 웃고 떠들게 하는 것은 선열을 능욕하는 행위라는 여론이 있었지만 공사는 강행되었다.

이승만 집권 내내 안중근 의사의 형집행일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인 3월 26일도 묘한 신경전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사람들은 이승만 동상 목에 밧줄을 걸어 쓰러뜨리고 분수대를 설치했다.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운 것과 같은 의미로 본전이 있던 자리에 식물원과 동물원이 생겼다.


지금, 산 그 자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남산 중턱에 갑자기 나타난 넓은 평지. 어릴 적 기억에 산 중턱에 있는 동물원, 식물원은 그저 구경하러 가는 곳이었을 뿐,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산을 깎아 만든 공간이라는 아픈 역사는 알지 못했다.


안중근 기념관은 휘호를 새긴 검은 대리석 길을 휘돌아 내려가야 입구가 나오는 독특한 구조다. 걸어 내려갈수록 담장이 높아지고 그늘이 만들어졌다. 공기가 지하의 냉기로 대환 되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입구 문을 힘있게 밀고 들어서면, 거대한 좌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드넓은 중앙공간을 꽉 채울 만큼 큰 의자에 당당한 모습으로 그가 앉아 있었다.

동행한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묵념을 드리니,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하는 거야?”

“묵념. 속마음으로 인사 드리는 거야. 모자 벗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해”


안중근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정환경, 의거 활동, 감옥에서 남긴 유묵의 영인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책이나 인터넷 자료로 보지 못한 자료가 많았지만, 전시품이 유리벽 안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거미줄과 먼지가 붙어 있는 등 관리가 소홀한 흔적이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전시장 한 켠에 안중근, 유동하, 우덕순, 조도선이 재판을 받던 재판장이 꾸며져 있었다. 일본

인 재판관과 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제 크기일까? 좁고 작은 나무 의자가 앞 뒤 사람의 머리가 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피고석과 재판관과의 거리도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탕탕탕 판사봉을 내리치는, 마치 그 당시로 돌아간 듯함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안중근 의사의 유품으로 감옥에서 쓰고 손도장을 찍은 유묵이 가장 많이 이야기 되지만, 아이

의 최대 관심사는 그가 사용한 총이었다. 거사에 사용한 총과 총알이 이토의 몸을 어떻게 뚫고 들어갔는지에 대한 설명 앞에서 뿌리를 박은 듯 서 있었다.


“멋있다. 나도 저 총 갖고 싶어”

“총알 앞에 십자 표시 있는데 그게 엄청 강한 거래. 아~ 저렇게 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죽

은 거구나. 엄마, 나 진짜 안중근 의사 박물관 오고 싶었어”


“그랬구나~ 엄마도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어”


나오는 길에 초로의 일본인 방문객과 마주쳤다. 함께 온 한국인 안내자의 설명을 진지한 눈빛으로 좇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가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시절, 어린 마음에 일본인 관광객과 마주치면 미운 마음이 들었다. 식민지 시절을 기억하는 일본인 들이 옛추억에 빠져 한국으로 관광을 오고, 중앙 박물관에 꼭 들른다고 했던 선생님 말씀에 분의가 더 일었다.

괜스레 “여기 있는 것은 너희들 것이 아니야. 괜히 드나들면서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라고 외치고도 싶었다. 대신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럽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복수를 했다.

   

90년대까지 나라 전체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것 같다. 방송에서 일본어나 일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일본 만화가 수입되긴 했지만 작가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한국어로 바꿔야 했다. 3〮1절, 광복절이면 TV에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영상물을 하루 종일 방영했다. 잔인하고 끔찍한 그들의 행위에 울면서 화내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단단히 묶어두었던 미워하는 마음 대신 사과하면 용서할 수 있다며 손을 내밀고 있다. 용서할 준비가 되었으니 잘못을 인정하라고.


“누구한테나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해야 돼. 나는 잘못 안 한 것 같아도 친구가 나 때문에 속상하다, 아프다고 하면 사과해야하는 거야”


“사과했는데도 계속 화내면?”


“친구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사과 해야지. 반대로 너가 속상하고 아픈데 친구가 사과했으니까 됐지?하고 가버리면 어떨 것 같아?”


“속상하고 화날 것 같아”


“그러니까! 친구가 이제 괜찮아라고 할 때까지 사과하는 거야. 알았지?

친구가 나한테 나쁘게 했을 때는 친구한테 ‘나 너 때문에 지금 아파. 속상해!’ 하고 꼭 얘기하고!”


“친구가 사과 안 하면?”

“내가 아프고 속상하다고 얘기하는데도 사과 안 하는 친구가 있어?”


“응, ㅇㅇ는 사과 안 해. 야! 내가 언제 그랬어?하고 그냥 가”


“음…. 그럼 걔 하고는 친구 하지 마.

잘못한 거 사과할 줄도 모르는 사람 하고는 안 놀아도 돼”


















3장 안중근


아이와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본인을 저격한 독립운동가, 등과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때마침 방문한 파주 출판단지 한길사 건물에 홍범도 장군, 안중근 의사를 담은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각각 짙은 남색과 붉은색 배경에 카메라를 응시하는 흑백사진.

그늘이 없는 길은 걷기가 힘들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개로는 모자라 덥다고 짜증을 내려던 찰나 마주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 아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만날 사람이 있다는 듯 성큼 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두툼한 양장본을 집어 들었다.


“엄마 이 책은 꼭 사야 돼. 어? 홍범도 장군도 있네!”


‘두 권 합쳐 1000쪽은 넘을 것 같은데… 둘 다 내 숙제가 되겠지…’

순간 마음속에선 안돼. 내려놔! 어차피 너 이 책 못 읽잖아라고 외쳤지만,


“와~ 안중근 의사 책인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 배경이야. 와~ 진짜 멋지다~”


아이를 키우면서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안 돼라고 단정하기 전에

어떤 선택을 하는 게 현명한지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정의 단어가 갖는 파급력도 언제나 고려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이 입장에서 우연히 만난 가슴 떨리는 순간이

“안돼. 내려놔! 어차피 너 이 책 못 읽잖아” 한 마디로 인해

평생에 걸쳐 통제와 제한, 자기 부정의 기억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청 두껍다. 둘 다 읽으려면 오래 걸리겠다. 안중근 의사 책 먼저 읽고 다음에 홍범도

장군 책 읽는 건 어때?”


아이는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고 두 책을 손에 쥔 채 저울질하며 고민했다.


 “음~~~ 그래, 안중근 책부터 읽어야지. 나는 지금 안중근 의사가 좋으니까. 결정했어.”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는 그 책을 읽지 못했다, 않았다.

같이 조금씩 읽어보자 며, 한 두 쪽 읽는 동안 잠들었다.

하지만 책이란 지금 당장 필요하고 소용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책, 갖고 싶은 책을 발견하고 소유하는 과정 자체가 그 책의 존재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장에 꽂힌 책은 때가 되면 책장에서 나와 그 안에 들어있는 세상을 활짝 펼쳐 보인다.

책을 갖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아이가 전우용의 ‘민족의 영웅 안중근’을 품에 안고 이 책을 꼭 사고 싶다. 이 책이 꼭 갖고 싶다고 말할 때, 속으로 기쁜 마음에 박수를 한없이 보냈다.


위인전에는 나오지 않는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들려주었다. 아이는 제가 알던 이야기의 조각을 맞춰 나갔다. 한 사람의 일생 중 방점을 찍은 일들을 열거하면 바다에 둥둥 떠 다니는 부표 같아진다. 우연히 만난 안중근 평전을 통해 아이의 머릿속에 떠 다니는 이야기들이 하나로 이어져 나갔다.


안 중 근

세상에 태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생각에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마음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묵직한 책을 집었을 때, 혹시 이 책이? 이 인물이? 또?라는 기대와 설렘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어떨 때는 책 속의 인물과 정이 들어서 마지막 장을 덮지 못하기도 한다.

그가 내 삶 속에 존재하는 가족, 친구였다가 갑자기 헤어지게 된 것 같아 이별의 아픔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 만남이 또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기대로 첫 장을 열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 자(字)는 ‘응칠’.

‘중근’은 그의 본명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도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르던 이름과 호적이나 주민등록 등 공적 서류에 적는 이름이 달랐다. 아빠의 어릴 적 친구들이나 집안 어른들이 부르는 이름은 자식인 우리는 부를 수 없었고 서류에도 적지 않았지만 별명이 아니라 어엿하게 한자까지 있는 이름이었다. 아빠가 해방된 해에 태어났고 대대로 유교적인 가풍의 집안분위기를 떠올려보면 아명, 자, 본명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유교 문화가 최근까지도 유지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충효 사상이 근간이 되는 유교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 보다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이다. 부모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그들의 문화가 가장 뿌리깊고 엄격하게 자리한 것이 이름 아닐까.

‘아명’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부르는 이름.

‘자’는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 부모나 스승이 지어서 평생 부르는 이름이다.

‘본명’은 부르라고 지은 이름이 아니다. 족보나 호패(조선시대 주민등록증 같은)에 적는 이름이고, 부모나 임금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호’는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담은 이름으로 어른이 되어 ‘자’와 함께 사용한다.


정리하면, 본명은 부모나 스승만이 부르거나 서류에 기재하는 이름이고

자, 아명, 호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이나, 지은 시기와 내포된 의미가 다르다.


단, 이런 문화는 대개 양반 남성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족보에 버젓이 이름이 올라가는 남자들과 달리 여성들은 양반이라 해도 대부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죽어서도 묘비에 양천 허씨, 파평 윤씨, 경주 이씨 등으로 표기된다.

신사임당은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호’를 사용하였지만 그의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허난설헌은 호와 본명, 자가 전해지는 드문 경우다.

양반이 아니더라도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전까지는 쉬운

이름으로 부르다가 웬만큼 자랐을 때 정식 이름을 지어주는 풍습도 있었다.

인생의 시기에 따라 여러 이름을 짓는 문화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뱃속 아기에게 태명을 붙이고, 태어났을 때 본명을 지어주는 것도 이런 문화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안중근의 ‘응칠’은 아명이고 자다. 알려진 대로 태어났을 때 등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다고 해서 그의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다.

‘중근’은 무거울 ‘중’자에 돌림자 ‘근’을 붙여 아버지가 지은 ‘본명’이다.

무거울 ‘중’자를 이름으로 지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청년 동학군 대장이었던 김구는 청계동 안태훈의 집에서 기거할 때 만난 안중근과 정근, 공근 형제에 대해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진사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태건 씨와 숙질이 늘 동행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노루와 고라니 등을 여러 마리 잡아와 그것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안진사는 자기 아들과 조카들을 위하여 서재를 만들었다.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8, 9세의 정근, 공근에게는 ‘글을 읽어라’ ‘써라’ 독려하면서도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안응칠 역사’에 안중근 스스로가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친한 친구 학생들이 나를 타이르며 권고했다.

“너의 부친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너는 어째서 무식하고 하찮은 인간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너희들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봐라.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길이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내게 학업을 권하지 말라”


안중근은 어려서 부터 기개, 호방, 의협심, 용맹 등 무인의 가치를 좇았다.

평생 타고난 특성으로 즐겨하던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친구들과 의리를 맺는 것이오.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오.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오.

넷째는 날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협심 있는 사람이 어디서 산다는 말만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총을 지니고 말을 달려 찾아갔다. 그래서 과연 동지가 될 만한 인물이면 분통 터지는 일을 정의로운 기운을 발산하며 토론하고, 유쾌하게 실컷 술을 마시고, 취한 후에 노래하고 춤도 추고, 혹은 기방에서 놀기도 했다.

기방에서는 기생에게 이르기를, ‘너는 절묘한 아름다운 자태로 호걸 남자와 짝을 지어 해로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돈 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고 정신을 잃어 염치 불고하고 오늘은 장 서방, 내일은 이 서방과 금수의 행동을 즐겨 하는 것이냐?’이렇게 말했는데, 기생들이 수긍하지 않고 몹시 미워하거나 공손하지 않은 태도를 드러내 보이면 욕을 하거나 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친구들은 나의 별호를 ‘전구’(電口 번개입)이라 불렀다. 「안응칠 역사」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브라우닝 M1900은 최신식 무기였다. 안중근의 집안, 가족 등 성장배경을 모른다면, 당시 최신식 무기를 어떻게 구매하고 사용할 수 있었는지,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은 사격술의 배경은 무엇인지,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큰 일을 치룰 결심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안중근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까지 4대에 걸쳐 7명이 무과에 합격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전역에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인 박은식은 자신과 안태훈이 ‘황해도의 두 신동’이라 불렸다고 회고했다. 임오군란 이후 젊은 개화파였던 박영효가 전국의 영재를 모아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유학 시킬 계획을 세우는데 안태훈도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유학길에 오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안중근의 할아버지는 아들이 역적의 패당으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재산을 친척들에게 나눠주고 추수할 토지만 남긴 채 가솔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했다. 안태훈은 1891년 문과에 급제했지만 어지러운 정국에 중앙정치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청계동으로 이사한 때 안중근은 5살이었다. 다른 양반집아이들처럼 한문을 배웠고, 열서너 살 부터는 승마와 사냥을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기에 성능 좋은 외국산 총으로 사격술을 익혔다고 한다.

‘안응칠 역사’에 안중근과 그의 아버지가 동학군을 토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중략]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안응칠 역사에서 “글은 성명이나 적을 줄 알면 족하다”라고 했지만, 안중근은 유학자 집안의 자녀로서 꼭 배워야 할 기초 공부를 마쳤다.

아버지 안태훈은 사랑채에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모셨다. 안태훈의 집에 잠시 의탁한 김구 역시 이 곳에서 스승 고능선을 만나 학문과 의리에 대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아이의 기질이 호방하다고는 하지만 학문이 뛰어난 아버지였기에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공부를 가르쳤고 안중근 역시 이 때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뤼순 감옥에서 200여점의 휘호를 남긴다.

천주교를 믿고 복사가 되면서 천주교 교리와 세계 정세, 프랑스어도 배웠다고 한다.


러일 전쟁 이후부터는 국권회복을 위해 고민하면서

“날마다 신문과 잡지, 각국 역사를 살피며 지나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추측했다”고 했다.  


안중근을 단순히 일본의 유력 정치인에게 총을 쏜 암살자로 평가하면 안되는 이유를 그의 또다른 저서 동양평화론에서 읽을 수 있다.

안중근 일가는 황해도 지방의 양반으로 살아오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사재로 성당건축까지

지원한다. 안중근은 프랑스인 신부들을 대면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인종 차별의식과 동양의

여러 나라를 침범해서 식민지로 삼는 서구 국가에 대해 저항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극동 지

방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바탕으로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은 일본의 잘못을 꼬집으며, 한국, 중국, 일본이 힘을 합쳐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서야 하기에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려고 할 때, 한국과 중국이 지난날의 앙금을 잊고 한 마음으로 도우려고 한 것인데, 도리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과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했다고 비난했다. 그 모든 행위의 중심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고, 그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분개했다.


하얼빈 역에서 뤼순 감옥으로 끌려간 안중근은 일본 헌병들에게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지사의 천직이로다.

너희들이 나를 이와 같은 기차에 앉히다니 지사에게 너무나 무례하다”


“나에게 사람이 먹지 못할 거칠고 냄새나는 음식을 주다니 네놈들 무례하다.

이와 같이 박대하지 말고 나에게 대신의 예의를 갖추기 바란다”

 

재판장에서 안중근은 자신을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이라고 밝힌다.

그의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침략자에 대한 심판이자 경고였던 것이다.


안중근이 남긴 유언을 소개한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느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노라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사후 그의 온 가족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옌추에 1년 정도 머물다가 중국 지린성 무

링현 동청철도 조차지로 이주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동청철도 연선에까지 미치고, 장남 분도가 홍역으로 사망했다.

신해혁명으로 중국 전역에서 내전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지자 이갑 가족과 함께 러시아령 니콜리스크로 이주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죽음을 떳떳하게 맞으라고 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만큼 담대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중국 전역은 지주의 압제와 폭력에 순종하기만 하던 농민들이 폭력에 항거하다, 밭을 갈

던 쟁기를 들고 비적이 되어 사람들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안중근 일가와 이갑 일가는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향하는 길에 총을 쏘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비적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리자,

조마리아 여사가 일행들에게


“이 놈들아, 독립운동 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하기냐?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며 말고삐를 쥐고 달렸다고 한다. (이정식,김학준,김용호, 「혁명가의 항일회상:정화담 편」 민음사.2015)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이주한 후에 안중근 일가는 안창호에게 1만 불을 받아 벼농사를 시작했다. 만주보다 북쪽에 위치한 니콜리스크에서 200여석의 벼를 수확하며, 벼농사의 북방 한계선을 밀어 올리는 성과를 이뤘다. 그 이후 시베리아에서 벼농사를 짓는 한인이 급속히 증가했다. (「조선일보」 1924. 7. 30)

19세기 말까지 두만강 너머 만주지역은 기온이 낮고 강수량이 적으며, 쌀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이 없어 논농사를 짓지 않았다. 하지만 한인들이 이주하면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20세기 중후반에는 곡창지대를 이루게 되었다.


안중근의 첫째 동생 안정근은 가족을 위해 형의 빈 자리를 대신했다. 니콜리스크로 이주한 후 포그라나치나야역 부근 산속에서 밀정 김정국을 처단하고 러시아인으로 귀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귀국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벼농사와 잡화상을 경영했다. 신천군의 대지주인 장인 왕재덕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벼농사는 결국 시베리아 지역에서 한인들이 벼를 경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안정근은 해방되기 전까지 청산리 전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등 독립을 위한 일에 투신했다.

해방된 이후에는

“형님을 놔두고 어떻게 나만 고국에 돌아갈 수 있느냐?”며

상하이에 남아 한인 구제총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굳세고 씩씩하며 바르고 곧았다”고 평했다.


그의 부인 이정서는 친정에서 받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달했다.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킬 한국 청년들을 모집할 때는 비밀리에 왕래하며 연락 사무를 담당했다고 전한다. (오영섭,「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 기반과 성격」 교회사 연구, 2010. 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09. 도진순 「안중근 가문의 유방백세와 망각지대」 역사비평, 2010. 「안현생의 수기」 시사인, 2010 참조)


막내 동생 안공근은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가 소속된 한일애국단의 본부가 안공근의 집이었고,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전 태극기를 들고 사진 찍은 곳은 안공근의 차남 안낙생의 집이었다.(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09)

안중근의 다른 가족들도 독립운동을 하거나 ‘안중근’ 이란 이름 아래서 회오리 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삶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안중근 일가와 김구의 인연도 특별했다.

동학농민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던 1895년 2월 안태훈은 황해도 일대에서 열아홉의 나이로 동학군을 이끌던 김구에게 밀서를 보낸다.


“군(君)이 나이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동을 침범하다가 폐멸 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


이후 김구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

는 조건으로 부모님과 함께 청계동 안태훈의 집으로 이주해 몇 개월간 지냈다.


아이에게 고증된 자료를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아이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상 때문이었다.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신분의 차이, 고증이나 사실확인 없이 동학농민혁명을 중심으로 대립적인 관계로 몰아가는 등 자극적인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단순히 빨간색과 파란색, 높음과 낮음, 선함과 악함으로 쉽게 해석하고, 화제성만 키우려고 하는 편향된 정보를 아이는 너무도 쉽게 믿고 있었다.

분별력이 부족하고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극적인 내용을 진실로 믿게 된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사실과 진실, 관계의 복합성, 시대에 따른 인간의 다변적인 모습을 완전

히 이해할 수 없지만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양을 갖출 수 있게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안중근’이란 인물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졌다.

그리고 장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한 인물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불태운 현장 하얼빈.

수많은 이들이 한 편으로 가슴을 졸이고 한 편으로 뜨거운 결의를 다지던 낯선 땅이 궁금해졌

다.























4. 얼음의 나라


“겨울 방학에 어디로 여행 갈까?”


“하얼빈”


“진짜 가고 싶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쐈대.

나 거기 가고 싶어”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지만 왠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

마치 환상의 섬 같은 곳 하얼빈.

아이는 단호하게 가겠노라 했고, 나는 당황했다.


하얼빈,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두 도시. 위도상 블라디보스토크 보다 위쪽에 있는 하얼빈은 중국의 도시이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항구도시이고, 하얼빈은 두만강 위쪽의 내륙도시다.

겨울 최저기온은 영하 30도 여름 최고기온은 40도에 육박하는 극강의 기후지역이다.

하얼빈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공중에 물을 뿌리면 그대로 얼어서 떨어지는 모습을 검색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버린 송화강 얼음이 도시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얼음의 도시다. 눈의 여왕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얼음성과 화려한 러시아풍 건축물, 하얼빈 역에 설치된 안중근 기념관, 731부대 전시관이 도시 외곽에 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설레임보다 걱정이 커져가는 것이 낯설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고 기대되는 것인데.


겨울 여행지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중국 외곽지역이라는 점.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와 접경지역이라는 것.

코로나 이후 강화된 중국 정부의 통제.

경험한 적 없는 혹한의 추위.

이 모든 것이 여행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을 만큼 감동을 주는 곳일까?


“여기 가면 안중근 의사가 총 쏜 자리를 볼 수 있대”


“어디?”


“바닥에 표시돼 있어. 여기서 탕탕탕 세 발 쏘고 옆에 있던 사람들한테 한 발씩 쐈대. 사실 안중근 의사는 누가 이토 히로부미인 줄 모르고 쏜 거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나, 여기 꼭 갈 거야.”




“그래”







가자, 하얼빈으로


출발 전날 오후에 대설특보가 발령됐다. 유난히 눈이 자주 내리는 겨울이다. 쌓이는 눈이 아니라 바로 질겅질겅 물로 변해서 녹아버렸지만, 한나절 내내 소복소복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오전 9시 출발. 공항에 6시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 전날 저녁부터 대설특보가 발령된다고 해서 공항에 미리 가서 기다릴지, 눈 내리는 길을 천천히 달려가야 할지 고민되었다.

3일이나 집을 비워야 하니 혼자 집에 있을 고양이 샤샤가 걱정되었다.

품에 꼭 안는 건 싫어. 손 끝으로 살살 쓰다듬는 것만 좋아하는 깍쟁이지만 하루 이틀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어디 갔다 왔냐?”

“나만 두고 다니는 게 어디 있냐?”며 양양 거린다.

집을 비운 시간의 갑절만큼 삐지는 뒤끝 긴~ 고양이다.

날씨도 추운데 공항 벤치에서 밤을 새우기도 그렇고, 이래저래 고민하다 새벽녘에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4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도로에는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내리는 양도 많고 새벽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물기 많은 눈이 그대로 쌓이는 것 같았다. 바퀴가 눈 속에 풍덩 하고 잠기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쌓이는 눈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온신경을 곤두세우고 최대한 천천히 주행했다.

운전하는 내내 기도하면서 핸들을 꽉 쥐었다. 도로에 달리는 차는 거의 없었지만, 도로를 덮은 눈으로 차선은 보이지 않았고, 가로등에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방화대교를 건널 때쯤 대형트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형 트럭이 지나가면서 바퀴가 퍼 올린 눈이 앞유리창에 끼얹어져서 몇 초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공포감이 밀려왔지만 핸들을 놓치지 말고 앞을 보고 달리자는 생각으로 전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인천공항에 가까워질수록 대형트럭과 택시의 수가 늘어났다. 도로선은 물론 가로등도 눈에 가려 제 역할을 못했다. 내리는 눈으로 뿌옇게 번진 빛이 멀리서 보이는 듯했다.

길이 익숙한 듯 택시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거북이처럼 부지런히 가고 있는데 앞서가던 차가 미끄러졌는지 해드라이트를 이쪽으로 향한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천천히 가자’

차들이 쌩하고 지나갈 때마다 흩뿌리는 물과 얼음덩어리에 얻어맞는 것 같았다. 겨우겨우 도착한 공항주차장에서 차를 살펴보니, 번호판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두껍게 덮여 있었다.


차에서 내린 안도감으로 바라본 눈 내리는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공항은 종착역이 아니었다. 탑승 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비행기를 타고 이륙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정비사가 조종석 앞 유리창을 열고 쌓인 눈을 긴 빗자루로 쓸어내고 있었다. 이내 빗자루 대신 걸레로 툭툭 치기도 하면서 눈을 털어냈지만 그칠 줄 모르는 눈발에 포기한 듯 사라졌다.

예상대로 탑승 후 이륙하지 못한 채 50분이 넘게 활주로에서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상공에서 눈구름을 뚫고 지나는 동안 장맛비 같은 물줄기가 차창에 수평선을 그렸다. 승무원들도 서비스를 하는 대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창 밖으로 뿌연 구름이 걷힐 줄 모르고, 착륙할 때까지 손에 땀을 쥐는 비행이었다.

시작부터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영웅을 만나러 가는 길이 평탄할 리 없었다.








중화 바로크 거리와 러시아 문화


하얼빈 타이핑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중화 바로크 거리 근처의 숙소까지는 1시간 거리였다. 공항에서 도심까지 전철이 잘 연결되어 있고, 하얼빈의 대중교통이 편리하다고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에 인원도 많고 짐도 많았다.

하얼빈은 택시비가 저렴한 편이다. 여럿이 이동한다면 지하철이나 버스보다는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리하다.

여행 기간 중 단 한 번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내릴 때까지 줄곧 서서 가야 했다. 시내에서 운행하는 택시의 차량 수도 많고, 모두 미터기에 표기된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일부러 돌아가거나 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중국어를 못해도 목적지 주소만 보여주면 되니, 택시 이용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공항에 내려서 휴대폰을 켜자마자 주중 대사관에서 보낸 안전문자로 알림음이 정신없이 울렸다.

-감염병 조심

-위급 상황이 생기면 연락할 수 있는 긴급 연락처


그리고

‘중국의 반간첩법이 강화 강화 시행된 바, 우리와의 제도〮개념 등 차이로 예상치 못한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 유의 바람. 지하철 노선, 기관시설물 등 공공시설을 촬영하거나 휴대폰에 사진을 소지하고 있는 행위도 반간첩법으로 검열될 수 있다.’

는 내용이었다.


출국하기 얼마전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한국인이 간첩행위를 의심받아서 출국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한국인 여행객의 수첩 안에 대만이 표기된 세계지도가 문제되었다는 것이다.

마음 한 켠으로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했지만,

예전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사진 찍거나 택시기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기사에게 숙소 주소를 보여주고 바로 출발했다.

중년의 택시 기사가 자신의 휴대폰을 켜더니 통역 어플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꼭 안전벨트를 매더라”


“우리는 안전밸트 매는 게 습관이예요”


“하얼빈에 처음 방문하냐?”


“네, 한국인들이 많이 오나요?”


친절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끝없는 평야와   이국적인 가옥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서양식 저택 한 채와 이를 중심으로 지붕이 낮은 여러 채의 중국식 가옥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 것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풍경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두었다. 우리끼리 하는 모든 대화에 택시기사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대사관에서 보낸 문자내용이 떠올라 풍경이든 건물이든 사진보다는 눈에 담아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했다.

시내와 가까워지자 고층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조금 전 보이던 농가주택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시내 중심부에 다다르면서 풍경은 또 한 번 바뀌었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바로크 풍의 장식이 돋보이는 건물이 많아졌다.

택시 기사가 고풍스런 건물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저기가 중앙대가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관람차를 향해


“겨울에 운영되던 놀이기구인데 지금은 멈췄다”


출국 직전 2월말까지 운영된다던 빙설대세계가 방문객의 급증으로 안전문제와 예년보다 기온이 높아져 2월 중순에 폐막한다고 공지했다.

너무 추운 날씨가 동행하는 가족들의 건강을 헤칠까 염려해서, 2월 중후반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우리 일정 바로 전주에 폐막했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여행가방에서 아이젠을 꺼내 면서,

‘추위 때문에 병 나는 것 보다는 낫지’

기대했던 마음을 접어보려 했지만, 얼음 미끄럼틀과 화려한 얼음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중앙대가를 이루는 바로크풍 건축물과 아이스크림 콘을 얹은 것 같은 러시아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성은 못 보지만 동화 속 나라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얼빈의 특색인 바로크 양식 건축물에 대한 기대감이 중앙대가의 풍경만으로도 높아졌다.

숙소에 짐을 두고 100년 전 만들어졌다는 중화 바로크 거리를 둘러볼 생각에 긴장감이 설레임으로 바뀌었다.


중화 바로크라고 불리는 거리는 유럽의 비잔틴,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하고 박쥐, 석류, 모란 등 중국 전통 문양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독특한 건물이 대규모 건축군을 형성한 것을 보고 일본 학자가 ‘중화 바로크’라 명명했다고 한다.


16세기 여진족은 청을 세운 후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동북부 지역을 신성한 장소라 규정하고 여진족이 아닌 민족의 거주를 제한했다. 그러나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후 많은 여진족이 중앙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동북부의 거주 인구가 점차 감소되었다.

20세기 들어서 청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이주를 제한하는 정책이 느슨해 졌다. 이 때 조선인, 중국의 한족, 러시아, 유럽의 많은 민족이 하얼빈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특히 러시아는 동북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1903년 모스크바와 하얼빈을 철도로 잇고, 하얼빈을 중심으로 남쪽의 다롄, 동쪽의 수이펀허로 내려가는 철로를 개설했다.

동북지방으로 영역을 확대하려는 철도 개설 사업이었다. 그러나 하얼빈을 러시아령으로 편입하려는 계획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중단된다.

이 당시 하얼빈에는 33개국 16만 명의 교민이 생활하고, 19개국의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다양한 국가, 인종이 교류하면서 건축, 음악, 음식 등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이국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현재 중화 바로크 거리는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지역으로 100년 전통의 맛집과 기념품, 골동품을 파는 거리가 되었다. 고풍스런 분위기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관광구역으로 인사동을 떠올리게 했다.

바로크 거리에 위치한 노포는 대부분 대기자가 많았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번호표를 받아 들고 가게 안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기다렸다.

우리가 처음 들어선 백 년 식당은 바로크 거리 초입에 위치해 있었는데, 밖에서 본 분위기만

으로도 진짜 현지 맛집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리창으로 보니 숯불에 고기를 굽거나 탕류를 먹는 곳이었다. 양고기 구이나 훠궈를 상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홀이 꽤 넓었는데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향토색이 짙은 실내 분위기가 독특했다. 입구 중앙에 박제된 호랑이, 곰, 여우와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겨냥하는 사냥꾼이 밀납 인형으로 장식돼 있었다. 모두 실제 크기이고 사냥꾼은 털옷까지 입고 있어서 야성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 준비된 전통 의상과 털옷을 입어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100년 전 조선사람들은 이 추운 도시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따라 온 여행이지만 너무 심취한 것일까?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고 입고 나갈 의복이 없어 한겨울에 온기 한 점 없는 냉방에서 죽음을 기다린 채 누워있었다는 이회영 선생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식당 안은 숯으로 굽는 고기냄새와 연기도 자욱했지만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많아 담배 연기가 짙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아무도 일어서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술과 담배를 즐기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어떤 음식이 있는지 궁금해 메뉴판을 보여달라고 했다.

간체자로만 쓰여진 메뉴 사이에 음식 사진이 간간히 보였지만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이미지 번역기를 사용해서 메뉴판을 읽고 난 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그냥 나가야 할 것 같아. 다른데 가자”


개구리 한 마리가 그대로 올라가 있는 개구리 탕과 곰 요리, 어떤 동물의 간을 요리하는 식당이었다. 원래 어느 나라로 여행을 하든 현지음식을 잘 먹는 편이었지만, 익숙한 음식을 먹기로 하고 바로크 거리 안쪽으로 향했다.

검은 벽돌로 된 2층 건물에서 100년 넘게 영업중인 만두집으로 향했다.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바로크 거리의 명소다. 별다른 장식도 없이 조명이 환하게 켜진 넓은 홀에 놓인 간단한 모양의 탁자와 의자에 빈자리가 없었다. 대나무로 만든 찜 판에 담긴 만두를 어른도 아이도 저마다 한 개씩 공평하게 먹고 있었다.

만두는 간단한 모양이지만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내기에 질리지 않고 언제나 먹고 싶어

지는 음식, 먹고 나면 뿌듯한 음식이다. 호사롭지 않고 자기 몫만큼 먹을 수 있다. 권하기도 쉽

고 양보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디로든 가져가서 먹을 수 있다.

만두를 기다리면서 아이와 뮤지컬 영웅에 나오는 노래를 조그많게 불렀다.

    “고달픈 청춘이여~ 먹고 먹어도 배가 고픈 건 어머니가 그립고 따뜻한 정이 고픈 것. 허전한 마음이 고~픈 것 고달픈 청춘~~~~ 달랠 만두 하지”


만두와 함께 나온 꿔바로우는 하얼빈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했다.

러시아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튀긴 고기에 새콤달콤한 소스를 함께 묻혀서 만들었다고 하는

데, 한국에서 먹던 꿔바로우보다 튀김 옷이 얇고 바삭하고, 소스는 너무 시지도 달지도 않은데

간이 적당했다.


아이는 하얼빈에 가면 중국식 탕후루와 마라탕을 꼭 먹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길가에 세워진 삼륜차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든 탕후루가 꽂혀 있었다. 길이가 한국에서 파는 것보다 두 배나 길었는데 너무 단단하게 얼어 있어 한 입도 베어 물지 못했다.

  

 “그냥 밖에 꽂아두는데도 꽁꽁 얼어 있네”  


늦은 저녁시간이라 바로크 거리에는 사람도 드물고 불을 켠 상점도 많지 않았다. 기념품 가게만이 몇 군데 불을 밝히고 있었다.

짭쪼름하고 꾸덕한 하얼빈식 소시지와 러시아 인형, 러시아식 장신구, 책가방만 한 러시아 빵, 러시아 전통의상을 입은 소녀가 그려진 초콜릿. 하얼빈의 대표적인 기념품들이다. 가격표만 위엔화(¥)로 표시된 러시아 제품으로 소시지를 제외한 공산품들은 러시아에서 수입되어 온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기념품은 왠지 그냥 돌아설 수가 없다.

‘거기까지 갔는데 그냥 왔네.’

‘그냥 사 올 걸’ 하는 후회를 꼭 하기도 하고,

‘괜히 샀어. 별 것도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러시아식’은 쉽게 접해보지 못한 문화라는 생각에 왠지 색다른 구매욕을 자극했다.

아이는 색유리와 돌로 장식한 손거울을 고르느라 고심에 빠져 있었다.


“동생들 주려구?”


“아니? 나 쓰려고”


서양식 건물들 사이로 홍등으로 장식한 청나라 전통 가옥이 있었다. ㅁ자 구조로 건물 외벽에 있는 계단으로 2층으로 올라가면 중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는 검은 벽돌 건물이었다. 건물이 둘러싼 중앙 공간은 중정이라기 보다 작은 광장 정도로 공간이 넓어서 체험행사나 장사를 하는 가판대가 놓여 있었다.


중화 바로크 거리는 하얼빈의 지난 100년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100년 역사 안에 우리의 역사도 찾아볼 수 있었다.

타향살이로 고달픈 몸과 마음을 달래며 나눠먹던 만둣집,

일본경찰을 피해 숨어 다니던 회색빛 벽돌 골목,

중국식 옷을 입고 객잔에 앉아있을 것만 같은 그들.


100년 노포가 성업중인 바로크 거리에서 잠시 벗어나면, 훼손된 채 방치된 서양식 건물과 새로 지은 현대식 고층 건물이 뒤섞여 있다.

겨울 축제는 끝났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송화강 방향에서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중화 바로크 거리 주변의 폐가 안에서도 폭죽을 터뜨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행 첫 날 중화 바로크 거리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거리를 제대로 찾지 못해 2시간이나 길을 헤맸다. 지도에 표시된 숙소 주소는 자꾸만 다른 곳을 향하고, 날은 춥고 어두워서 점점 겁이 났다. 자꾸 주변을 맴돌게 하는 지도 어플을 끄고 숙소에서 나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신축 공사장을 지나 베이지색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다음날 아침 숙소 창밖으로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크 거리 입구가 보였다.




안중근 기념관, 자오린 공원


중국 여행할 때 곧이 곧 대로 들으면 안되는 얘기.


“조금만 가면 돼”


중국인이 얘기하는 ‘조금만’의 의미는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다.


“하얼빈 역으로 가주세요”


아침시장이 열리는 중앙대가에서 육포와 소시지의 중간쯤 되는 꾸덕하고 짭쪼롬한 하얼빈식 소시지와 배, 통후추, 설탕을 넣고 끓인 배숙과 똑 같은 맛의 뜨끈한 배 음료, 아무 간도 되어 있지 않은 팥 빵, 기름 없이 얇게 부쳐서 돌돌 말아주는 전병, 어묵탕을 든든하게 먹고, 안중근 의사를 만나러 하얼빈 역으로 출발했다.

가까운 거리지만, 날씨가 추워 택시를 탔다.

택시가 내려준 지하 승강장에는 버스, 택시, 일반 차량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상까지 길게 에스컬레이터가 연결되어 있었다.

중앙대가에서 아침 시장을 찾아갈 때도 사람들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목적지도 쉽게 찾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담배 냄새를 참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서 하얼빈 역을 바라보며 왼쪽에 있다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광장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 건물 외벽에 빨간 글씨로 기념관이 적혀 있었는데, 글씨는 커녕 들어가는 출입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역을 지키는 공안에게 물어봤지만, 그런 곳이 있었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서로 아는 사람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여행오기 전 캡처해 둔 안내를 찾아봐도 있어야 할 곳에 있던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서 마음이 동요되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고도 싶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려면 열차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입구에서부터 보안 검색이 철저히 이뤄지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광장 앞에서 헤매기만 했다. 날씨는 춥고,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 춥다, 도대체 어디냐 칭얼대는데, 모든 가족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 설움과 답답함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래도 혹시 길을 알려줄 곳이 있을까 싶어 주변 관광호텔에 들어갔더니, 프론트의 젊은 직원들은 모른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연세가 지긋한 남자 직원이


“아, 안중근 기념관! 거기 한국사람들 많이 찾아온다”며 젊은 직원들에게 위치를 설명했다.


“나가서 직진, 지하광장을 지나 광장 왼편에 있다”고 했다.


그제서야 하얼빈 광장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측광장’만 찾아가면 된다.

휴대폰에 저장된 안내에도 남측광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호텔 직원들께 감사인사를 하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북측 광장으로 돌아왔다.

길을 찾으면서 감정이 고조되어 서로 섭섭한 말을 했는데, 아이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엄마, 춥고 다리 아프다고 짜증내서 미안해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나보다 나을 때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엄마도 화내서 미안했어. 너무 당황해서 좀 무섭고 화도 났어. 미안해”


아이에게도, 부모님께도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여기가 아니라 광장이 또 하나 있대요. 남측 광장. 남측 광장으로 가는 법 다시 물어 볼게

요”


역사 입구에 있던 공안은 친절하게도 우리를 남측광장으로 가는 길까지 안내했다.

지하 승강장으로 내려가서 반대편 계단을 지나 400m이상 직진하는 긴 통로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북측광장과 똑 같은 모습의 광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역사 왼편에 붉은 글씨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적혀 있었다.

남의 나라에 있는 기념관. 허울 뿐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사라졌다. 입구에 앉아 있는 보안 요원에게 여권을 보여주고 바로 입장했다.

검색대를 지나자 옷깃을 휘날리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입상이 보였다.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곧바로 안중근이 들고 있던 브라우닝 M1900으로 탕 탕 탕 세 발을 얼굴이 누렇고 키가 작은 노인에게 명중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이토의 얼굴을 몰랐으나 신문지상에서 사진으로만 보아왔고, 그 현장에서는 즉 군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은 것과 또 노인인 것으로 이토일 것이라 짐작하고 발포하였으며, 포박될 때 세계 통용어로써 ‘코레아 후라’를 삼창한 사실이 있다.

  재판관은 내가 이미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했으나 나는 이 일만으로는 아직 전체 목적을 수행했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이번 하나의 성공은 우리 단체의 최대 목적인 대한독립의 한 기회를 만든데 불과하며, 그 때 양도(洋刀)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은 자살 또는 저항의 뜻이 아니다. 이토를 죽이는 일이 악사(惡事)가 아니거늘 어찌하여 자살 또는 도망을 기도하리오.”

재판장에서 안중근의 태도에 대한 기록.


    안씨가 발언시에 자기 일은 숨기지 아니하고 각 방면의 동지는 비호하는 듯하며 그 태도는 부단히 재판관을 똑바로 바라보며 두 손을 앞의 횡목에 걸치고 때때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으며 극히 평정하게 심문에 답변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3일)


 그는 혹시라도 방금 총을 쏜 사람이 이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옆에 서 있던 세 사람의 일본인도 각각 한 발씩 저격했다. 나머지 한 발을 남기고 잠시 고민하던 중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힌 채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이 때가 9시10분이다.

안중근 입상 위의 시계 바늘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총을 쏜 시간은 정각 9시. 긴 바늘은 왜 12가 아닌 6에 맞춰진 것일까?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비해 하얼빈의 기념관은 규모는 작았지만, 1909년 10월 26일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형을 선고받고도 꿋꿋하게 글을 썼다. 넷째 손가락이 짧은 손도장을 찍은  유묵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기고 싶었던 생각. 장부의 뜻을 담은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기념관에는 ‘동양평화론’과 ‘안응칠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진품인지 필사본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힘있게 꾹 꾹 눌러쓴 글씨가 묘한 감흥을 주었다.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동학농민군에 대항해 싸우던 이야기, 자신의 성격,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되기 까지를 적은 ‘안응칠 역사’

대한국, 중국, 일본이 힘을 합쳐 동양을 침략하려는 서양 민족을 막아내고 동양의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제의 ‘동양평화론’

당시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항소하는 대신 ‘동양평화론’ 저작을 마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항소를 포기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3월 중순, 안중근에게 사형을 집행한다고 통보했다. 항소를 포기했기 때문에 ‘동양평화론’은 결론을 짓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았다.


집행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금요일에 해당하는 3월 25일로 요청했지만, 이

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토가 총에 맞은 날, 시간에 맞춘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을 집행했다.

하얼빈에 방문했을 때 나는 인생 중반을 돌아보며,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삶이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그 가치를 이루기 위한 일을 하자고 생각했지만 막상 용기도 확신도 들지 않아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 힘있게 눌러 쓴 글씨를 보면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용기를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은 매우 작았지만, 사람들로 북적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관람객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대부분 동양인이었지만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고, 서양인 관람객도 간간히 입장했다.

기념관 가장 안쪽 유리창 너머로 기차 탑승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낮은 계단으로 단을 높이고 안중근 의사가 서 있던 자리를 흰 화살표,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던 곳을 붉은 네모 안에 동심원으로 표시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둘 사이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탑승장 앞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도 바닥에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는 흰색 화살표와 동심원이 그려져 있는 곳을 왔다갔다했다.


“여기서 총을 쐈나 보다”


“무척 가깝다”

아이가 안의사의 자리에서 총을 겨누는 동작을 취했다.


“엄마는 여기 설게”

나는 동심원을 밟고 섰다. 저격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아이의 표정과 작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거리였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나온 우리는 하얼빈의 중심 거리인 중앙 대가를 지나 소피아 성당으로 향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진한 녹색의 돔형 지붕, 검붉은 벽돌로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소피아 성당은 하얼빈의 명소다. 러시아가 1903년 중동철도를 개통한 후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파견되었다. 그들을 위해 지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처음에는 목조로 지어졌지만 이후 벽돌로 개축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중앙의 둥근 돔 지붕과 이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각 기둥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복도가 십자가 모양을 이루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아치로 연결하는 비잔틴 양식 건축이다.

넓은 광장 한 켠에 서 있는 성당을 배경으로 러시아식 드레스를 입고 가발과 화장으로 변장한사람들이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고, 성당을 배경으로 컨셉 사진을 찍는 것이 요즘 하얼빈의 유행이라고 했다. 한복을 입고 고궁 나들이를 하는 서울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 금발, 검게 칠한 입술, 검은 드레스.

금발에 화사한 화장, 순백색 또는 진한 장미빛 드레스를 입고 비둘기를 날리거나 장식이 달린 막대기를 휘두르는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녀, 공주, 마녀, 공주”

아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검은 드레스는 마녀, 흰색과 장미빛 드레스는 공주라고 중얼거렸다.

“그만해”


“마녀, 공주, 마녀, 공주, 왜 마녀랑 공주만 있어?”


“그러게 왕자나 마법사는 한 명도 없네”


한낮이지만 영하 12~3도인 기온에서 마녀와 공주들은 어깨를 드러내고 소매가 짧은 드레스를 입고 광장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흡사 디즈니랜드에 온 듯한 착각도 들었다. 광장 한 켠에서는 회전목마와 범퍼카, 꼬마기차가 운행 중 이었다.

소피아 성당은 키 120cm이상인 어린이와 65세 미만 성인은 유료입장으로 다른 전시관,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QR코드로 결재하고 입장할 수 있었다.

소피아 성당의 외관과 광장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우리는 내부의 모습도 궁금했다. 성당 옆에 설치된 매표소는 폐쇄되었고, 광장 반대편에 위치한 관광 안내소에서 입장권을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비잔틴 양식의 화려한 외관만큼 내부는 어떨지 기대감을 갖게 했다. 낮은 돌계단,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십자모양의 복도를 지났다. 외형에 비해 공간은 넓지 않았지만 돔 아래 중앙 홀은 막

힌 것이 없었다.

기둥 벽마다 성화가 그려져 있던 자리에 시멘트가 덧발라져 있었다. 돔 천정은 색채감 없이 화려한 샹들리에만 설치돼 있었다.

현재는 예배 기능을 상실하고, 중국어로 ‘수어페이야’, ‘하얼빈 건축예술관’으로 불리며 문화행사를 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중앙 홀의 정면 단상에서 클래식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성당의 외부도 벽돌이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이 시멘트로 덧발라져 있었는데, 내부 역시 땜질을

해 놓은 것처럼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돔, 샹들리에, 벽화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비잔틴 건축 특유의 경건함과 시

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중국에서 만나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낯설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기독교 문화를 접할 수 있

다는 것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공간이 갖는 역사와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민과 노력 없이 관광자원으로만 활용하는 모습이 씁쓸했다. 더욱이 아이와 함께 입장권도 구

매 했는데, 들어서는 순간 입장권을 사려고 광장을 몇 번이나 다니며 애태웠던 시간까지 아까

워졌다.

‘차라리 드레스 입고 밖에서 사진이나 찍을 걸.’


그래도 아이는 소피아 성당을 바라보며 회전목마를 탄 것이 좋았나 보다. 기온은 낮았어도 한 낮의 햇볕은 따뜻해서 광장 주변 벤치에 빈자리가 없었는데, 잠시라도 동화 같은 풍경 속에서 햇볕을 쬐며 쉼을 누릴 수 있었다.

성당을 관람하고 광장 한 켠에 있는 기념품상점에서 성당 모형이라도 하나 살까 했는데 내부를 보고는 그런 마음도 싹 가셨다. 기념품 종류도 대부분 러시아제 소품들이었다. 기념품상점에는 우리와 러시아인 가족 뿐이었다. 요즘 한국에서도 여행하는 러시아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나라도 있는데 한가롭게 여행하는 러시아인들이 고와 보이지 않는 것은 나의 편협함 일까.


하얼빈 시내는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중앙대가를 중심으로 도시의 주요 시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했다. 하얼빈 역에서 중앙대가까지 택시로 이동하면 10분 정도의 거리이니 걸으면서 여기 저기 둘러볼 수도 있지만 영하 15도 이하의 날씨에 불필요한 체력소모를 하지 않으려고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소피아 성당 광장에서 자오린 공원까지는 직선으로 걸어서 15분 거리이고, 한 낮의 햇볕이 무척 따뜻했다.

관공서 건물과 중학교가 나란히 있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일상을 느낄 수 있는 들뜨지 않은 골목, 주택가, 한적한 거리를 걷던 때다.

자오린 공원까지 걸어가는 거리 중간에 중학교가 있었다. 철제 문 너머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 보였다. 좁은 인도에서 털이 사자처럼 북술북술한 사자개와 산책하는 아저씨도 마주쳤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도로를 달리는 사람도 지나갔다.

한적한 도로 끝에 아치형 철문이 보였다. 빨간 등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철문 위에 兆麟公园(조린공원) 이라는 붉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해빙기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폐쇄한다는 안내문을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공원에 못 들어간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공원 정문 앞에서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횡단보도 맞은편으로 깔끔하게 관리된 건물이 한 채 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직전 동지들과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철제 울타리 사이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송화강으로 향하면서 공원 담장을 따라 걸었다.


 공원 안쪽에 얼음이 된 눈 덩어리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는지 물기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멀리 작은 정자 아래 다듬지 않은 비석이 하나 보였다.

‘청초당(淸草塘)이란 초록색 글씨와 붉은색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못가에 푸른 풀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안중근 의사가 서거 이틀 전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뜻으로 쓴 휘호다. 경치가 아름답다는 자오린 공원은 둘러보지 못했지만, 안중근 의사로 인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여행의 소기의 목적은 다한 셈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자오린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해방이 되면 고국으로 함께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 후 일제는 가족들에게 안의사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 정확한 매장 위치도 모른 채 그저 추정할 뿐이다. 중국의 내전이 끝나면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주변지역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아직도 그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송화강


자오린 공원에서 직진방향으로 15분쯤 걸어가면 하얼빈을 가로지르는 송화강이 있다.

일 년 중 5개월이 겨울이라 강물은 아주 단단하게 얼어붙는다.

강이 얼면 강물을 잘라 도시 곳곳을 얼음으로 장식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얼음 축제인 빙설

대세계와 자오린 공원, 송화강변의 빙등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강폭은 꽤 넓은 편이다. 겨울이면 강이 단단하게 얼어붙기 때문에 강을 건너기 위해 설치된 케

이블카를 타고 건너편에 있는 태양도와 러시아식 장원으로 갈 수 있다.


하얼빈은 축복받은 도시인 것 같다. 그리고 영리하게 그 축복의 자산을 잘 활용하고 있다. 비

옥한 토지에서 풍족하게 농산물이 생산되고, 길고 혹독한 추위가 만들어낸 자연 환경과 과거의 유산을 문화 콘텐츠로 풀어내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송화강은 중국 동북 지역 최대의 내륙 수로다. 하류는 하얼빈에서부터 기선이, 상류는 지린까지 범선이 다닐 수 있다. 해빙기에는 배로, 결빙기에는 썰매로 물자를 실어 나른다. 넓은 평원 지대인 하얼빈은 옥수수, 수수, 콩, 사탕무, 아마 등의 주산지로 비옥한 농업지역이다. 이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 임산물과 지린, 자무쓰 등 신흥공업단지의 공업제품이 송화강을 통해 운송된다.


  하얼빈을 여행하는 동안 이 곳이 중국인지 러시아인지 헷갈렸다. 동양인이 많이 거주하는 러시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할 때 어떤 곳은 그 땅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닮았다고 느껴 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얼빈을 여행하면서는 왠지 갸우뚱하게 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자오린 공원에서 출발해 송화강까지 걸어가면서 머릿속에서 자꾸 ‘송화강’이 맴돌았다.

‘익숙한 이름인 것 같은데?’

‘왜 낯설지 않지?’

‘송화강’

‘맞아!’

생각이 다다랐을 때 강이 모습을 활짝 드러냈다. 한강만큼 강폭이 넓고 주변에 막힌 것이 없어 강바람도 셌다.


백두산에서부터 동북지방을 관통하는 송화강은 하얼빈의 땅을 비옥하게 했다.

하얼빈에 살던 민족이 각기 수렵, 어로, 농사 등 자신의 영역과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땅이 인간에게 풍성하고 비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을 포함한 동북지역에서는 구석기 유적을 비롯한 인류의 흔적이 발견된다. 생존을 위한 도구부터 정치 권력자를 위한 옥으로 만든 공예품, 청동검, 토기류도 발견된다.

겨울이 길지만, 인간과 짐승 모두에게 넉넉했기에 오랜 세월동안 인류가 이 곳에 정주했고, 무장한 근대 국가들이 군침을 흘리며 모여 들었을 것이다.


하얼빈을 포함한 아시아의 동북부 지역은 고조선 약 1000년, 부여 약 700년, 고구려 705년,

발해 238년 동안 우리 민족이 역사를 이룬 곳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물은 비룡 폭포를 지나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세 개의 지류가 되어 흘러가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부여를 떠나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건넌 강이 송화강이다.

현재 하얼빈의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지만 20세기 초 이 땅으로 건너간 조선족도 하얼빈의 47개 소수 민족 중 두 번째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까지 소수민족의 문화를 중국 문화로 흡수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1999년 겨울 베이징 사회과학원에는 자국에서 발행되는 자료는 물론이고,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서 발행한 지역 자료까지 수집되어 있었다. 표지만 한 번 보고 버렸을지도 모를 얇고 조악한 편집물에 지역의 문화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후 중국의 동국공정이 본격화되면서 한복과 김치를 자기 문화라고 우기는 행태에 저들의 치밀한 문화공정을 실감했다.

남분 분단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동북부 지역의 한민족 문화와 역사에 대한 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가 시작되고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자리를 잡았던 환도 산성 일대의 수많은 고분군과 문화유적도 중국의 문화로 소개되거나 도굴된 채로 남아있다.

심지어 이 지역 문화를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가 한반도 이남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은 중국 동북 지역에서 도굴한 것이 아니냐는 굴욕적인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있다.


926년 발해가 멸망한 이후 동북지역을 점유한 여진족은 12세기 초에 금나라를 세웠다.

중국은 하얼빈의 역사를 12세기부터 소개한다.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는 시기는 구석기부터

이고 우리 민족의 국가들이 동북 지역을 다스린 시간은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후 10세기 까지다.


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송화강은 단단하고 광활했다. 이 강의 발원지가 백두산인 것도 놀라웠지만, 우리의 역사를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으로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해졌다.  영토의 소유권을 논하기 위해 지난 역사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왜곡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동북지역에서 발견되는 문화의 흔적들이 객관적으로 고증되고, 정치적으로 활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출발하기 전 하얼빈은 나라 잃은 한 때 잠시 머물렀던 낯선 땅이었다. 송화강에 이르러 지난 역사를 떠올리며 시간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강물도 바람도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지나간 것을 다시 불러오고 잊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5. 타국의 태양, 광활한 대지


시작은 ‘안중근’ 한 사람이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수록 생명과 독립을 맞바꿀 각오로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깝게는 그의 가족 모두가 가혹한 추위와 생면부지의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해방되는 그 날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안중근의 짧은 생에 스쳐 지났던 수많은 인물들도 그러했다.

출발 전 우리는 방한복과 방한화를 준비하며 추위에 대비했다. 그러나 백 년 전 이 땅에 왔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금만 걸어도 온 몸이 얼어붙고, 공중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대로 얼음이 되어 내리는 곳에서 기껏해야 솜을 누빈 옷을 입고, 남의 땅에 사는 죄 없는 죄인으로 살지는 않았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길을 택시를 타고 달리며, 헤진 신발을 신고 하염없이 걸었을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정표도 없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황량한 벌판을 둘러보며,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언제쯤 도착할런지 조바심을 내었을 그들을 떠올렸다.

작은 동산과 시내가 어우러진 우리 시골풍경과 달리, 별다를 것 없는 평원이 한없이 이어지는

중국 동북지역 도시간 기차를 타본 사람들은 그 긴 지루함에 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인지 제자

리 걸음을 하고 있는지 의심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하얼빈 사람들은 대체로 순수하고 인간적이었다. 한 밤 중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도 위험하지 않았고, 괜스레 말을 걸면서 주위를 둘러싸는 일도 없었다.

다만, 중국어 이외의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었고, 지폐 한 장을 받아서 형광등에 비추고, 자외선 지폐 감별기로 보고 또 볼 정도로 의심이 많았다. 백 년 전 그들은 나라 잃은 이방인과 어떻게 지냈을까? 그 땅에 남은 후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고단했을 삶을 유추해 본다.


“곡식을 추수하면 그대로 다 빼앗아 갔대요. 주변에 사는 중국인들이 와서 너희 누구 허락

받고 농사 지었냐면서 추수한 걸 몽땅 가져갔다는 얘기를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하도

뺏기니까 오히려 일본사람들이 도와주기도 했대요.

  

    “겨울이 길고 정말 추운데 나는 추운 게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도 추운 게 너무 두려워요. 찬바람이 휙 불면 온 몸이 금방 얼어붙는 것 같고 손끝이 빳빳해 져요. 당장에라도 죽을 것만 같았죠. 어린아이라도 집안일도 해야 하고, 농사도 거들어야 하는데 너무 추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6장. 내 꿈은 독립운동가


“용기도 용서도 모두 다 주님 뜻을 따르리” (뮤지컬 영웅 [십자가 앞에서])


어느 곳에나 죽음의 위협이 있고, 어느 곳도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의지로 나아갔을 것이다. 가족을 잃은 고통과 절망감이 오히려 일어서게 하는 투지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여행 마지막 날 절대 잊을 수 없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팬데믹 이후 중국 정부는 위쳇, 알리페이 등으로 스마트 인증과 결재 시스템을 보편화 시켰다. 세계 다른 나라들도 스마트 인증과 결재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침시장에서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까지 QR코드로 결재를 하고 카드리더기를 단 한 곳도 사용하지 않으리 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 공항 내 스타벅스의 카드리더기가 반갑기까지 했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도입했던 스마트 인증, 결재 시스템으로 중국인들은 휴대폰만 갖고 외출하거나 안면인식으로도 은행 업무가 가능하다고 했다. 인증과 결재가 휴대폰 하나로 가능하니 편리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편리함 이면의 통제 시스템이 공포감으로 밀려왔다.


우리는 여행을 위해 현금과 신용카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지에서 현금인출이 가능한 유니온 카드를 준비했다. 하지만 하얼빈 어느 곳에도 카드 리더기가 없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현금을 사용하며, 현금인출이 가능한 유니온페이 카드가 있으니 다행이라 여겼다.

박물관, 미술관은 위쳇으로 인증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어 현장에서 위쳇이나 알리페이 어플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휴대폰이 외국인 전화번호이기 때문에 가입승인이 이뤄지지 않아 어플을 설치하지 못했다. 때문에 헤이룽장성 박물관 등 몇 개의 방문장소 앞에서 되돌아오기도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갔다. 토요일이었지만, 중국은행은 모두 영업중 이었고, ATM기기가 있는 곳에는 직원이 별도로 상주하면서 업무를 도와주고 있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중국은행에 가서 현금을 인출하려 했지만 기기가 카드를 인식하지 못했다.

은행 직원이 도와주었지만, 카드 인식오류라는 메시지만 계속 되었다.

 

“여행을 혼자 왔어요? 혼자 이렇게 여행 오면 안돼요”


“아니에요. 가족이랑 같이 왔어요. 한국에서 확인하고 만든 카드인데 왜 안되는 걸까요?”


“글쎄, 시내에 있는 은행 본점이나 큰 은행에 가면 될 수도 있어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날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유니온 카드에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는 중국 은행 마크와 카드 사용 설명서를 다시 확인했다.


‘방법이 있겠지’


서둘러 짐을 챙겨서 은행에 가기로 했다. 남은 현금이 빠듯해서 오늘 일정을 보내려면 꼭 돈을 찾아야 했다.

가족들과 중앙 은행으로 가기로 하고, 생각해보니 공항에 가면 환전센터가 있을 것 같았다. 공항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택시를 탔다.

하얼빈에 도착해서 시내로 들어올 때는 받지 않던 고속도로 톨게이트비를 공항으로 갈 때는  택시비와 별도로 지불하라고 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환전센터를 찾았지만, 국제선 터미널과 국내선 터미널 어느 곳에도 환전센터가 없었다. 공항에 있는 은행에서도 카드가 읽히지 않았다.


‘무슨 문제일까? 혹시 몰라서 발급받고 한국에서 카드 결재도 해봤는데…’


가족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다시 시내로 이동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내 판단에 달려 있었다.

택시 기사에게 현금을 찾을 수 있는 은행을 찾고 있다고 얘기하니, 한국은행이 있다며 안내했다. 그러나 운이 나빴다. 하얼빈에 단 하나뿐인 하나은행은 토요일에 영업을 하지 않았다.

다시 카드에 표시된 중국은행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여기저기 이동하는데, 마음이 다급해 졌다. 이렇게 하다 가는 돈도 찾지 못하고, 택시에 끌려 다닐 판이었다.

안되겠다는 생각에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긴급 도움을 요청했다.

현지 영사는 택시에서 먼저 내리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물었지만, 택시 기사는 금액을 얘기하지 않고 자기가 다른 은행 가서 돈 찾는 것 도와주고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영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하고 빨리 헤어지세요. 택시 얼마인지 물어보고 내리세요”


“네, 근데 택시비를 얘기 안 해줘요”


“그 사람한테 전화 바꿔주세요. 제가 얘기할 게요”


택시 기사가 운전 중이라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영사와 기사가 중국어로 대화를 하던 중 기사가 역정을 내며 전화 통화를 그만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그들의 대화 내용을 통역 어플로 알 수 있었다. 괜히 화를 돋우다가 택시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어딘가로 끌러가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동요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다음 목적지에 닿기를 기다렸다.

역시나 그 지점에서도 카드가 읽히지 않았다. 어찌됐든 여기서 택시 기사와 헤어져야 했다.

기사는 다시 다른 지점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친구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 여기서 내리겠다고 했다.

가족들을 서둘러 택시에서 내리게 하고 짐을 꺼냈다.

기사는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왜? 돈 찾아야 되잖아요. 돈 찾고 내가 숙소까지 안내할 게요”


“아니 예요. 아무래도 카드가 안되는 것 같아요. 여기 근처로 친구가 온다고 했어요. 친구

만나기로 했으니까 괜찮아요. 오늘 고마웠어요. 택시비는 얼마예요?”


나는 침착하게 보이려고 애써 웃었다.

기사는 아침에 숙소에서 공항에 갔을 때보다 5배나 되는 택시비를 요구했다.

‘그래, 비싼 값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택시비를 두고 다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외국인이다.


택시비를 치뤘는데도 기사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택시가 가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후에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결국 마지막 날 일정이었던 동북 호림원에는 가지 못했다. 9시쯤 숙소에서 나왔는데 벌써 3시 가까이 됐다.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온 가족이 함께 겪고 난 뒤라 숙소에 가서 쉬고 내일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이가 놀랐을까 봐 걱정했는데, 택시에 끌려 다니는 동안에도 녀석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새벽비행기를 타기 위해 예약한 마지막 숙소는 공항에서 10분 거리였다.

다시 공항으로 가는 길.

광활한 벌판을 택시를 타고 달리는 중, 도로 옆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니 다시 그들이 떠올랐다.

드문드문 심어진 가로수는 벌판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지도, 찬바람을 막아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몸을 숨길 곳도, 눈보라를 막아줄 곳도 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걸어갔을 그들. 솜을 누빈 옷이 눈에 젖어 무거워지고 얼어붙어 살갗을 스치며 상채기를 내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고통과 추위를 참으며 걷는다. 눈에 푹푹 들어가는 발은 감각을 잃고 발가락이 모두 달라붙었을 것이다. 가야 한다. 이 길을 지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들을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풍경을 바라보니, 하루 종일 택시에 끌려 다녔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겨졌다.


고속도로에서 살짝 벗어난 길로 들어섰다. 지붕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집 앞에 옥수수자루가 널려 있고, 농기구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지막 숙소는 농가주택을 개조한 작은 여관과 같은 곳이었다. 내 나이 또래의 여주인과 어린 딸, 할머니가 입구 겸 프론트에 모여 있었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 실내 조명도 켜지 않고 환기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으로 밝혀진 공간에서 시간을 달래는 할머니, 채 마르지 않은 손으로 예약확인을 하며 숨을 고르는 주인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생활인 그 자체였다.

오후 4시가 되어서 그 날의 첫 끼를 챙겼다.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판다고 했다. 주인이 직접 만든다는 손만두 4접시를 주문했다. 건물 내부에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운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곳이 부엌인 것 같았다.

한 시간쯤 후에 주인이 만두를 가져왔다. 소가 훤히 비치도록 만두피가 얇고 한 입에 쏙 들어가는 작은 만두가 아니라, 찐빵보다 얇고 물만두 피보다 두툼한 피를 반으로 접은 반달모양이었다. 뜻밖에 가정식 만두를 먹어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간도 적당하고 담백했지만 오랜 시간 긴장한 덕에 허기도 맛도 느끼지 못하고 먹었다.

안중근처럼 ‘장부’가 되고 싶은 아이는 마라탕 맛 컵라면 맛에 반했다며 국물까지 들이켜고 손만두도 아그작 아그작 먹어댔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고 웃음이 나왔다.


도움을 준 영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인터넷은 계속 끊어지고 카톡은 전송이 안되었다. 단순히 인터넷 연결이 느린 줄 알았는데, 택시에서 내리는 중에 영사가 카톡은 중국 정부가 제한하고 있어서 연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해가 지자 주변은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밤이 늦도록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디서 폭죽을 터뜨리는지 보이지 않았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출발할 시간을 기다렸다. 공항까지 숙소 주인이 데려다 준다고 했기 때문에 자는 것을 포기하고 짐을 정리했다.


11시.. 12시.. 1시.. 2시..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4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피곤하지도 졸립지도 않았다.

창 밖은 어둠 뿐, 공기조차 멈춘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괜스레 걱정되는 마음에 불안해지기도 했다.

4시 20분 작은 소파가 있는 리셉션으로 나갔다. 비상구 등만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 작은 공간에 온가족이 모여 앉아서 기다렸다. 27분, 28분…

혹시 못 일어나는 건 아닐까? 어제 모두 바빠 보이던데…

29분. 한숨이 나오려는 순간 냉기와 함께 남자 주인이 나타났다.

숙소 앞에 주차된 은색 승합차에 짐을 싣고 타는데, 얼음장 같은 기온에 온몸이 으스스해졌다. 얼음물에 라도 들어앉은 듯한 냉기였다.

넉살 좋고 인상 좋은 남주인이 시동을 켜고 어둠 속을 달렸다. 히터도 켜지 않은 승합차 안으로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창 밖으로 노랗고 밝은 빛을 내뿜는 보름달이 보였다.


“달이 참 밝다”


운전하던 남주인이 중국어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휴대폰 어플을 켜고

“달이 밝아요”


  “달? 밝지요”

언어만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 잠시 왔다 가는 기분일 것 같았다.


“지금 날씨가 조금 풀린 거예요?”


“네, 전보다 기온이 올라갔어요”


하얼빈의 한겨울 기온이 궁금해졌다.

아주 오래 전 이처럼 냉기가 돌았던 겨울날씨에 머릿속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집에서 떠나올 때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는데…

공항까지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깜깜한 길을 달리는 동안 뒷자리에서 쉴 새 없이 기도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땅과 바다는 눈에 덮여 있거나 찬기운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동북쪽에서 바로 남으로 내려올 수 없어 서해를 빙 돌아왔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후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다.


“외국에서 현금 인출이 가능하다는 유니온 카드를 발급받았는데, 현지에서 사용할 수 없었어요.”


“카드에 해당 은행 표시가 되어 있었나요? 카드에 표시된 은행에서만 사용이 가능해요”


“네, 카드 뒷면에 은행 마크가 표시되어 있어요”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고 한 은행 직원이 몇 시간 후 전화를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해당 은행과는 2022년에 서비스가 종료되었어요.

저희가 카드디자인을 변경하지 못해서 2년 전 디자인으로 카드가 발급되었어요”


기가 막히고 화도 났지만, 항의한다고 달라질 게 없는 일이었다.

이미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으니.

 20세기 초 중국, 러시아 등지로 이주한 조선인의 대부분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조선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갖가지 이

유를 안고 떠난 길이었다. 그들 모두가 쉽지 않은 길임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가족 혹은 자기 자신 뿐이었다. 그럼에도 무엇 때문에 그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끝

까지 신념을 놓지 않았을까.

편안하게 여행하면서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저 이국적인 도시, 추운 기후, 역사

책에 기록된 도시에 다녀왔다고 기억됐을 것이다.

아이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잠깐이지만 무서웠다고 했다.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덕분에 100년 전 하얼빈에서 살았던 조선 사람들은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지 않았어?”


“그러게, 그 사람들 진짜 힘들었겠다. 나는 발가락이 다 얼어서 없어진 줄 알았어”


“그렇게 추웠어? 근데 너는 부츠도 신고 두꺼운 양말도 신었잖아. 옛날에 하얼빈 간 사람들은 그런 신발도 없지 않았을까?”


“없었겠지. 춥고 무서웠겠다…  나는 이 다음에 커서 독립운동가 될 거야”


“독립운동가가 훌륭하지만, 지금은 독립할 일이 없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


“아니야, 난 꼭 독립운동가 될 거야”

“아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 단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 돼. 하지만 네 마음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어”


낯선 곳으로 준비가 부족한 여행을 떠나서인지 아이는 얼마간 힘든 여행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마주한 다섯걸음.

기차가 지나는 플랫폼.

낯선 이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했을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울림이 되었다.

자신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도 뜻깊었다.

편하게 먹고 자고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목도하고 싶어한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한 장소와 도시를 경험한 것은 두고 두고 아이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영웅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부른다.


‘그 사람들도 우리가 걸은 길, 도시의 소리, 쫄깃한 하얼빈 소시지와 책가방 만한 러시아

빵, 하얼빈 만두를 먹었겠지. 송화강의 강바람을 맞고, 풀 냄새 가득한 자오린 공원을 걸

었을 거야’


 그리고 가끔씩 100년 전 그들과 같은 것을 공유했음에 마음이 몽글몽글해 진다.


여행을 다녀온 후 뮤지컬 ‘영웅’을 다시 관람했다.

회색 벽돌 건물 사이로 쫓기는 사람들, 정을 나누던 만둣집, 증기를 내뿜는 소리가 요란한 기차역, 자오린 공원에 모여 거사를 결의한 후 사진을 찍으러 향하는 젊은이들, 고향이 그리워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던 송화강,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바느질을 놓지 못했을 여인들… 그들의 모습이 하나씩 떠올랐다.

1909년 10월 26일 이전과 이후에도 그들은 평범한 듯 별일 없는 듯, 국제도시 하얼빈에서 각자의 신념을 위해 살아갔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커튼콜을 위해 늘어선 배우들을 보는 순간 혹독하게 춥고 낯선 땅에 저들을 모두 두고 왔다는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우리는 가장 강렬한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기억하고,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록도 기억도 없지만 끝없이 펼쳐진 들판, 숨을 곳 없는 그 너른 낯선 땅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살아간 그들도 있었다.

서른 한 살의 안중근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 우리도 그들 중 한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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