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는 절대 말하지 마세요"
30살이 되던 1월 첫째 주.
성공적인 상견례를 마치고 식장까지 예약했을 때,
나는 비로소 평화로운 바다로 나갈 줄 알았다.
10월 예식에 맞춰 설레는 마음으로
신혼집을 알아보던 우리
여느 평범한 예비부부들과
다를 거 없던 나날들..
하지만 내가 머물던 낡은 섬,
그 자취방은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운 채
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4살의 나는 세상을 너무 믿었나 보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HUG중소기업청년
전세대출 1억 원으로 마련한 나의 첫 안식처.
내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그곳에서
나는 참 성실하게도 살았다.
사건은 두 번째 연장 계약 때 시작되었다.
집주인은 새로 들어오는 집들 시세 때문에
전세금을 1천만 원 더 올려야 한다고 했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천만 원은
거금이었지만, 타지에서 자취하는 딸을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진 않았다.
결국 치과 월급을 쪼개 모았던 첫 적금을 깼다.
'어차피 나중에 돌려받을 돈이니까'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순진한 믿음.
그때 집주인이 내게 속삭였다.
“아가씨, 천만 원은 꼭 개인 계좌로 보내고,
은행에는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알았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이 훗날 내 보증보험을
찢어놓을 독약이 될 줄 꿈에도 모른 채.
그 후로 작년 1월, 이사를 가겠다는 내게
집주인은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
관리비도 안 받을 테니, 벽지도 새로 도배해줄 테니
3개월만 더 기다려달라고.
그렇게 '배려'라는 이름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버렸다. 하지만 이제 진짜 결혼을 위해
이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그의 태도는 한순간에 돌변했다.
“지금 당장은 돈 없으니까 못 줘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 무심한 한마디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
아아 뉴스에서나 보던 '전세 사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쥐띠 삼재도 끝났다는데,
왜 내 인생은 자꾸만 길을 잃는 걸까.
나는 부모님이 던져준 구명보트를 타기도 전에,
과거에 낡은 섬의 늪에 빠져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