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낡은 섬의 족쇄

"은행에는 절대 말하지 마세요"

by 그저 나


30살이 되던 1월 첫째 주.

성공적인 상견례를 마치고 식장까지 예약했을 때,

나는 비로소 평화로운 바다로 나갈 줄 알았다.


10월 예식에 맞춰 설레는 마음으로

신혼집을 알아보던 우리

여느 평범한 예비부부들과

다를 거 없던 나날들..


하지만 내가 머물던 낡은 섬,

그 자취방은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운 채

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4살의 나는 세상을 너무 믿었나 보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HUG중소기업청년

전세대출 1억 원으로 마련한 나의 첫 안식처.


내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그곳에서

나는 참 성실하게도 살았다.


사건은 두 번째 연장 계약 때 시작되었다.

집주인은 새로 들어오는 집들 시세 때문에

전세금을 1천만 원 더 올려야 한다고 했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천만 원은

거금이었지만, 타지에서 자취하는 딸을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진 않았다.


결국 치과 월급을 쪼개 모았던 첫 적금을 깼다.

'어차피 나중에 돌려받을 돈이니까'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순진한 믿음.


그때 집주인이 내게 속삭였다.

“아가씨, 천만 원은 꼭 개인 계좌로 보내고,

은행에는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알았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이 훗날 내 보증보험을

찢어놓을 독약이 될 줄 꿈에도 모른 채.


그 후로 작년 1월, 이사를 가겠다는 내게

집주인은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

관리비도 안 받을 테니, 벽지도 새로 도배해줄 테니

3개월만 더 기다려달라고.


그렇게 '배려'라는 이름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버렸다. 하지만 이제 진짜 결혼을 위해

이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그의 태도는 한순간에 돌변했다.


“지금 당장은 돈 없으니까 못 줘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 무심한 한마디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


아아 뉴스에서나 보던 '전세 사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쥐띠 삼재도 끝났다는데,

왜 내 인생은 자꾸만 길을 잃는 걸까.


나는 부모님이 던져준 구명보트를 타기도 전에,

과거에 낡은 섬의 늪에 빠져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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