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묻는 미안함도, 답하는 번거로움도 줄어든다
전자제품을 사면 설명서가 딸려온다.
두껍고, 읽기 귀찮지만, 문제가 생기면 찾게 되는 그것. 끝까지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필요한 순간엔 유용하다.
엄마를 새 집으로 모신 뒤, 문득 생각했다. 엄마에게도 설명서가 필요하겠다고.
새 집의 모든 것이 낯선 엄마를 위한, '이 집 사용법' 같은 것. 거창할 것 없다. 엄마가 이해하기 쉬우면 그만이다. 사진, 영상, 간략한 문서로 정리해 두면 매번 묻는 미안함도, 답하는 번거로움도 줄어든다.
공동현관과 집 현관 비밀번호. 가장 익숙한 번호로 설정했다.
치매 환자의 기억은 패턴을 읽기 어렵다. 어떤 번호는 아무리 말해도 잊는데, 다른 번호는 처음부터 기억하기도 한다. 만약을 대비해 핸드폰에 미니 현관 키를 달아두고, 스티커 키를 핸드폰 뒷면에도 붙여놨다. 완벽은 아니었다. 한번은 미니 키를 잃어버리고 핸드폰도 없어서 문을 못 열 뻔했다. 그때 뒷면에 붙여둔 스티커가 구세주였다. 월패드는 복잡한 버튼 때문에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방문자가 오면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경비실 호출로 공동현관을 열 수 있게 했다.
터치식 조명은 엄마에게 낯설었다.
터치 패드 보호 필름을 떼지 않고, 대신 매직으로 거실, 방, 주방만 표시했다. 표시 전에는 전체 조명을 내내 켜두셔서 밤에서 보면 베란다까지 환히 밝혀져 있었다.
TV 리모컨도 마찬가지다.
작동 버튼을 잘못 눌러서 화면이 꺼졌을 뿐인데, 엄마는 세상이 무너질 듯 당황하셨다. 전원, 볼륨, 채널. 세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렸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TV와 셋톱박스를 처음부터 켜는 영상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약은 아침, 저녁, 취침 전. 세 번으로 나누어 일주일 치를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뒀다.
핸드폰 알람으로 복용 시간을 설정했다. 의사와 상의해 저녁과 취침 전 약을 묶어서 복용 횟수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캘린더는 큰 글씨로. 할 일을 적어두고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도록 했다. 영하 10도의 어느 겨울, 행정복지센터를 4차례나 왔다 갔다 하신 적이 있다. 막상 가면 처리해야 할 일이 뭔지 잊으셨다. 담답해도 내가 대신하기보다는 엄마가 직접 하시도록 돕는 게 우선이다.
처음 가는 곳을 표시한 엄마만의 지도를 만들었다.
지하철역, 마트, 공원 산책로. 중요한 곳을 별표로 표시하고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했다. 혼자 다니시다 길을 잃으면 핸드폰에 문자나 택시를 부르는 연습이 필요했다. 뜻밖에도 엄마는 취미로 산책을 다시 시작하셨다. 낮에 할 일을 하나씩 만들어드리니, 집에서만 계시는 것보다 훨씬 활기차 보이셨다. 엄마만의 하루 루틴을 만들어드리는 것. 작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이사 온 뒤로는 주로 TV나 유튜브를 보신다.
넋 놓고 보는 시각 자극보다 청각 자극이 좋다고 한다. 뇌 전체를 사용해 듣는 것을 상상하며 듣게 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라디오를 사드렸다. 방송 중 사연이 나오면 간단히 사연 속 주인공의 감정을 묻고 답하는 것도 좋았다. 블루투스나 LED 조명을 겸비한 것보다 꼭 필요한 기능만 있는 휴대용 라디오가 좋다. 젊은 시절부터 들었던 올드 팝 채널(93.9)을 너무 좋아하신다.
매일 할 일로 좋은 생각(큰 글씨) 1장 읽기, 일기 쓰기, 집 주소와 가족 전화번호 외우기를 목표로 세우셨다. 식탁을 두고도 방바닥에 엎드려 읽고 쓰시기에 아주 심플한 좌식 책상을 사드렸다. 별것 아닌데 요 책상을 쓰니 훨씬 머리에 잘 들어온다며 만족해하신다.
제아무리 좋다는 물건도 엄마가 직접 고른 게 아니면 오래 못 간다.
자동 쓰레기통, 대형 빨래 건조대가 그랬다. 제 실력 발휘도 못한 채 구석에 처박혔다. 트렌디한 디자인보다 엄마가 사용하기 편하고 익숙한 것이 최고다.
십수 년간 제품 디자인을 하면서 올바른 사용법에 관한 매뉴얼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그런데 정작 엄마를 위한 설명서는 몇 년을 미뤄왔다. 왜였을까.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시작해 보니 생각보다 간단했다. 사진 몇 장, 짧은 메모, 간단한 그림. 엄마의 하루를 관찰하고, 헷갈려하시는 부분을 기록하고, 조금 더 쉬운 방법을 찾는 것. 전문가가 아니어도 괜찮다. 부모님을 가장 잘 아는 건 우리니까.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다. 하나씩 만들고, 보완하고, 다시 고치면 된다. 중요한 건 인내심을 갖고 반복하며, 부모님이 습관처럼 익힐 수 있도록 돕는 것.
설명서는 만드는 사람이 고생한 만큼, 사용하는 사람은 편해지기 마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애정과 관심이다.
그 마음만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