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에 포르투를 다 볼수 있을까 3/18/24 월
여행은 날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년 파리 여행때는 일주일 내내 흐렸는데, 다행히 이번 한주는 날씨가 화창하단다.
빨간 기와지붕탓인지, 날씨덕인지, 오래된 건물들의 종탑들 덕분인지, 숙소 창밖의 풍경이 예뻤다.
오늘은 유나의 스무번째 생일이다.
내 나이가 50이 된것에도 놀랐지만, 유나가 스무살이 된것도 사실 실감이 잘 나질 않는다. 낯선 미국땅에서 주변 아는사람 별로 없이 아내와 둘이서 초보 부모로 산지가 벌써 20년이라니... 돌아보면 분명히 행복하고 기쁜 날들도 많았는데 마음속에 남아 있는건 늘 더 잘해주지못한 아쉬움만 남아있는것도 욕심이라고 애써 마음한켠으로 밀어내고, 이젠 혼자 설수 있기를, 세상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해나갈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아주 소박한 아침 생일상을 차려줬다. 숙소앞 베이커리 문여는 시간을 잘못알아서 10분간 떨다가 케잌도 없이 돌아와서 생일상은 더 소박하다. 저녁에 좀 근사한데 가서 먹자고 서로 달래면서..
다행히 유나가 그동안 기숙사 밥에 질린 탓에 밥에 미역국만 있어도 맛있단다.
체크인 가방없이 다녀보자고 2년전 스페인여행때 라면한봉지도 가져오지 않았다가 아침마다 하몽샌드위치를 먹고 점심이나 저녁은 시에스타에 걸려 건너뛰기 일쑤였던 아픈기억때문에 작년 파리 여행때도 올해 포르투갈 여행때도 햇반과 밑반찬들을 싸왔다.
내일은 리스본으로 내려가야 하기때문에 오늘 하루 안에 포르투를 다 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건 보다가 지치는 일이 없게 일정을 잘 안배해야하고, 동시에 이건 꼭 봐야하는데 못봤다는 아쉬움도 없어야 한다.
첫번째 행선지는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포르투 대성당이다. 유럽 도시들을 여행하면 어딜가나 꼭 천년의 중세시대를 상징하는 성당들이 거의 모든 도시마다 세워져 있다. 처음 몇군데는 '와' 탄성을 지르다가 그것도 몇번 보다보면 다 비슷비슷하다. 건축적으로도 그 당대에 가장 유행하던 풍으로 헌금으로 걷힌 재물을 쏟아 부어 최대한 화려하게 만들었다. 성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는 기둥은 페로우리뇨라는 것으로 죄인과 노예를 묶어 놓고 매질을 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사랑의 상징인 성당앞에서의 폭력이라니...
제단의 화려함을 볼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씁쓸해진다. 과연 하나님은, 예수님은 이런 제단을 기뻐하실까...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 이후, 교회도 지어야 하고 성직제도도 정착시켜야하니 돈이 필요했고, 서서히 십일조나 헌금을 강조하다가 6세기후반 투르 공의회, 마콘 2차 공의회때 아예 십일조가 일종의 세금으로 법제화되었다. 종교개혁전까지 천년 가까이 교회로 돈이 쏟아져 들어왔을테니 유럽 전역에 이런 어마어마한 교회들이 수도 헤아릴수 없을만큼 많이 지어질수 있었다. 아름다움만 취하고 돌아나가고 싶지만, 자꾸 마음 한켠에 남는 불편함은 어쩔수가 없다.
성당을 빠져나와 다음행선지 볼사 궁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30년전 배낭여행할때는 지도를 펼쳐들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방향을 물었어야했는데, 지금은 구글맵 켜놓고 전화기가 시키는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되니 너무 편하긴한데, 뭔가 '낭만' 이 살짝 빠진것 같아 아쉽긴 하다.
길을 틀때마다 만나는 골목길과 다른 풍경들에 연신 카메라를 켜야 했다. 파란 하늘, 도우루강, 빨간 지붕들...
그런것들도 제역할을 충분히 했지만, 골목들 사이로 다닥 다닥 붙어있는 집들 사이로 평범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의 모습들이 새어나오는게 너무 좋고, 햇살에 비치는 발코니의 다양한 색깔들이 너무 예쁘다.
볼사 궁전까지 가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주변 광장에 잠시 앉아 쉬다가 우버를 타고 세랄베스 현대 미술관으로 갔다. 공원이 예쁘다고 가이드책에서 권했고,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건물이기도 해서 궁금증에 일부러 찾아 갔지만, 큰 감동은 없었다. 그래도 좋은 날씨에 관광지에서 좀 벗어나 조용한 정원 산책도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현대 미술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아직 예술적 감성이 부족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되서 우버를 타고 볼량시장으로 갔다. 포르투갈은 물가가 싸서 우버를 타도 전혀 부담이 되질 않는다. 점심시간이라 볼량시장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우리는 간신히 타파스 몇개와 샌드위치, 포르투 와인한잔, 진자 한잔사서 화장실옆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허기진 배를 달랬다.
걸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유명하다는 마제스틱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숙소로 그냥 들어가긴 좀 아쉬워서 동 루이스 다리 위쪽 길을 걸어봤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조금은 한산했지만, 다리위에서 본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리스본에서만 일주일 지내자니 뭔가 아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레트로 감성에 흠뻑 빠진다고 칭찬하던 곳이라 궁금했었는데, 뭔가 대단한게 있진 않지만, 확실히 마음을 끄는 편안함은 있는 도시다. 빨간 지붕만 걷어내면 내 고향 부산과 참 많이 닮은 도시같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버스킹하는 젊은 사람들의 음악소리 덕분에 좀 더 다리 난간에 몸을 걸치고 풍경을 감상할수 있었다.
강 건너에 있는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유명한 포르투 와이너리 중 한군데를 갈까 하다가 다수(?)의 의견에 밀려 숙소로 돌아왔다. 지친 다리를 좀 쉬며 와이프는 열심히 저녁 식당을 찾는데 월요일이라 유명한곳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찾고 찾다가 렐루서점 근처에 리뷰가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서 7시로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
테이블도 몇개 없는 조그만 레스토랑인데, 그래도 2층은 꽤 고급스럽게 셋팅이 되어있어서 기분 좋은 저녁식사를 맛있게 할수 있었다. 와인에 에피타이저도 시키고, 해물밥, 생선튀김에 양파와 토마토 소스를 얹은 요리, 그리고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거의 처음으로 천천히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하면서 저녁을 즐겼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보려는 욕심을 내려놓으니 가족과 함께 이렇게 좋은 시간도 보낼수 있구나 생각하며 잠시 행복에 젖을수 있었다. 가족이라해도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는건 사실 쉽지 않고 노력이 필요하다. 내 사람들이니 내 생각을 이해하겠거니 혹은 나를 따라야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아는데, 그게 잘 되질 않는다. 자꾸만 서로의 약점만 보이고 그걸 고치려고 쓸데없이 조언/잔소리만 늘어놓으면서 따라 붙는 수식어는 늘 '너 잘되라고 그러는거 잖아' 였다. 이 시간만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진 길을 걸어 다시 숙소로 길을 잡았다.
화려하지도 너무 꾸미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에 유럽 어느도시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그냥 이대로 방에 들어가긴 아쉬워서 다시 동 루이스 다리위를 걸어봤다. 야경이란게 어디든 비슷하긴 하지만, 높은 다리위에서 강을 끼고 늘어선 야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여기 저기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은 생애 첫 여행지의 마지막 행선지로 안성맞춤이었다.
다시 올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순간을, 강바람에 실려오는 이 도시의 냄새와 바람의 감촉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지낸 나에대한 보상이고 지금의 시간을 최대한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