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수현 Mar 27. 2019

보스턴정착기, 공항에서 5시간

'폭설'과 함께 100KG의 무게로 미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는 늘 떨린다.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줄이 줄어들고, 내 순서가 다가오면 그러그러한, 저러저러한 질문들에 응당 해야할 말들 - 이를 테면, 난 공부하러 온 거고 금방 내 나라로 돌아갈거니까 혹여라도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주겠어 - 을 간단히, 더불어 명료하게 읊조리고 나면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미션임을 알면서도 미묘하게 불편한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 미국이라는 나라에 첫 발을 뗀 것도 아닌데 또다른 느낌들이 눈을 질끈감아도 선명하게 엄습한다. 2017년에 한번, 2018년 한번, 미국에 두 번 다녀갔을 때와는 또 다른 두근거림이 손끝까지 뻗쳐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행기에서 좀 울었던 탓에 몸이 노곤노곤해져서 그 불편한 긴장감이 바들거리는 떨림으로 몸을 짓누르진 않았다. 그냥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피곤한 느낌'(좀 많이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던 파리한 기운)만이 몸에 스며들던 찰나, 입국심사대 앞으로 드.디.어. 발을 뗀다. 나는 이번에 꽤 길다면 길어질 지도 모를 시간 미국에 머물기 위해 도착했다. 단순여행자가 아닌 신분으로 타국에 들어온다는 건 이토록 고단한 일이다.


짐이 많았다. 잠은 없었다. 한 두달 여행이 아니라, '유학' 목적의 입국자에게 화사하고 발랄한 에너지는 사치가 아니던가. 무미건조한 옷 차림새에 짐만 많았고 서울에서부터 낑낑거리며 이고지고, 괜한 생각들까지 짐스럽게 얹혀져 기내에선 거의 자질 못했다. 이미 10시간 가량의 비행을 마친 뒤라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초췌한데 바리바리 쌓아올린 수화물마저 피곤하다고 심드렁해져있는 듯한 기색이다. 화장끼 지워진 내 얼굴도, 멋과 개성이라고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 똑같아보여서 심지어 놀라울 정도인) 검정색 이민가방도, 활기가 없었음은 당연했다. "제발 제발 두 시간만 버텨줘"라고 주문외우듯이 중얼거리며 환승구간을 기운을 짜내 달렸다. 진짜로 거칠게 내.달.렸.다.보스턴에 오려면 3월 4일 기준,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직항 노선이 없었는데, 늘상 타던 국적기에서 최대한 늦은 오후에 출발하는 항공편을 고르다보니, 환승간격이 2시간 남짓인 샌프란시스코 경유를 택하게 된 것. '빠듯해도 어떻게든 비행기를 못 갈아타겠어.' 라는 배짱으로 별 고민없이 비행기티켓을 샀 건만, 아 이거 왜이렇게 초조한 건데 !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입국심사가 길어져서 4시간이나 기다리고 환승비행기 놓쳤다는 어느 카페 후기글을 보고서 마음이 더 쫓겼다. 내려앉는 눈꺼풀에 최대한 잔뜩 힘을 주면서 기운을 짜내고 유독 재기발랄했던 입국심사원이 당연히 BTS에 대한 질문 하나쯤은 할 줄 알았다는 듯, 호기롭게 한국에 대한 관심사를 너그럽게 받아치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통과. 통과. 통과. 좋았어. 이제 비행기만 타고 실컷 졸아주면 되겠어.

떠나던 그날, 울음폭발을 예감했던 절대적 지점이었는데 생각보다 가벼이 스쳤고 담담히 입장했다


제발 제발 두 시간만 버텨줘,
이제 비행기만 타고 실컷 졸아주면 되겠어.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있나. 그럴 리 없지. 환승구간 게이트로 갔을 때 나는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설마. 저게 5시에 출발한다고 바뀐 거 맞아? 정오 살짝 넘겨서 오후 12시5분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가 5분도 50분도 아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게 '5'라는 숫자와 함께 보드판에 바뀌어 있었다. 이 사람들 뭐 이렇게 쿨해. 설마설마 하는 심정으로 혹시라도 15시가 5시로 적힌 것은 아닐지 하는 소심한 기대감을 품은 채 항공사 카운터로 총총, because of heavy snow 라는 답변이 되돌아 메아리친다. 하필 내가 오는 날에 거대한 눈 잔치라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경유 항공편 앱이라도 깔아두고 실시간 상황 좀 살필 것을, 경유항공을 타기까지 시간이 촉박하지 않을까만 고민했지, 날씨를 비롯해 환승구간에서 벌어질 수 있을 법한 또다른 변수는 살피지 못했다. 그럼 게이트 앞으로 바짝 다가오기 전에 다른 데라도 좀 들러 비행기 탈 때까지 참새방앗간 놀이좀 하고 올 걸. 온갖 후회가 머리회로를 어지럽히며 흉하게 엉켜왔지만 이내 쓱삭쓱삭 지워냈다. 아니다. 자책말자. 기다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무언가 다른 행동을 하고 민첩하게 실시간 상황대처하기에 나는 이미 온 몸이 녹아내릴 듯이 지쳐있었고, 이렇게라도 기다릴 거면 라운지에라도 갈까 싶었으나 더이상 여기저기 움직일, 이동할, 내 몸을 끌어내어 다른 곳을 향해 발을 디뎌낼 자신이 없었다. 몇 시까지 미뤄지든 그냥 버텨보자. 여기서. 시간은 흐를 것이고, 언제가 됐든. 게이트 코앞에서 기다리다보면 더 걷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나는 곧 비행기에 올라있겠지. 버티다보면, 상황은 종료되겠지.


커피 없이 버티지 못했던 회사생활, 훌훌 떨쳐내고 떠나는 길에도 결국 곁에 남은 건 커피 몇 잔과 주전부리. 잔존하는 감정의 결들은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두 잔의 커피를 마시고 한 컵의 요거트를 들이켰다. 배가 고픈건지, 마음이 허한건지 알 수 없는 허기감으로 몇 겹의 시간을 견뎌냈다. 이.윽.고 탑승. 이방인이란 늘 그렇다. 올바르고 단정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기. 고국에서의 널부러짐과 특유의 편안함이 빚어내는 흐느적거림은 익숙한 자들의 특권이려니. 낯선 곳에서 눈에띄는 모습의 '누가봐도 외지인' 승객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일탈행동을 최대한 집어넣고 얼어붙은 얼굴로 최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런히 내보이려 애쓴다. 그 몸짓이 티가난다. 귀를 쫑긋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까봐 익숙지 않은 언어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더 성실히 다가서려는 세밀함. 아무리 민첩하려 애써봐도 현지인들 눈에 어리바리하게 비칠 게 뻔한 사소한 몸짓과 표정들이 때론 비루하다. 모든 게 익숙해서 좋을 사람들 틈에서 익숙하지 않은 자에게 내재된 억울한 심경을 꼬깃꼬깃 주머니에 넣어둔 채 통로쪽 좌석 좁은 틈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옆옆은 일본 여자, 내 옆은 중국 남자, 2030 동년배같아 보이는 아시아계 세 명이 나란히 앉아 간다는 것만으로도 왠지모를 안도감이 드는 심경이라니.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어찌나 '다름'과 '낯섦'에 지쳤을지, 같은 방향에 위치한 가까운 나라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없는 반가움을 느끼고 만다. 이같은 '지침'은 어디까지 나를 데려갈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 '이방인'의 느낌을 가득담고 이 땅에 살아가게 될 지는 그 누구도몰랐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나 조차도. 늘 계획이란 게 빼곡하고 완벽하게 들어차야 했던 나의 일상에도 이런 순간이 왔다.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모호한 결론만이 손 끝에 너덜거리고 있던 3월의 첫번 째 주 월요일. 그렇게 이륙했고, 그렇게 보스턴에 도착했다. 저녁 8시가 아닌 새벽 1시를 훌쩍넘긴 시각에.


데리러 나오느라 고생했지
아냐, 눈 다 녹았어.

5시간, 약 300분, 18000초가량에 달하는 시간의 기다림 속에, 새파랗게 얼어붙을 줄 알았던 눈은 다행히 폭포수 같은 자태만 뽐낸 채, 그들의 자취를 지워내고 있었다. 적당히 뽀얗게, 침착하고 정갈하게 녹아들었다. 도심 곳곳에 젖어든 눈의 흔적은 생각만큼 격렬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처럼 결국엔 다 보드라워지기 마련이라고 다독여주는 듯했다.  제 아무리 격렬하고 끔찍한 눈보라, 5시간 비행기를 붙잡아둔 악 조건의 기상상황 속에서도 마침내 비행기는 떴고, 묵묵히 그 안에서 기내식을 씹었으며, 프레즐 과자는 짜다고 탓했고 (그럼에도 다 먹었고) 크렌베리주스는 너무 달다고 한 모금만 겨우 마신 채 설탕기를 잠재웠다. 결국에는 이렇게 일상이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낯섦에 경직되었던 이방인의 꼿꼿했던 자세도 차츰 헝클어져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남편을 만났고, 반가운 품에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감정의 모양새를 가지런히 오므렸다. 한국보다 조금은 더 추운 듯한 날쌘 공기에 살짝은 예민했지만, 떠나고 도착하는 인파로 시끌벅적하게 북적였을 공항마저 한산한 풍경을 보이는 새벽이 되어버려 조금은 초조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 안락한 어딘가에 짐을 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으니. 무엇보다 연착된 비행기 탓에 원래 마중나왔어야 할 시간보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늦게 나와야했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던 지라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했던 차가운 새벽이었다. 내탓이 아님에도 '미안해'야 하는 순간들은 너무나 많아서. 그것도 새로운 시작점에 놓인 자라면, 낯선 장소에서라면 더더욱이.


5시간의 연착과 5시간의 비행으로 그렇게 새 세상에 발을 뗐다. 새마음일지 헌마음일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이고진 채

살다보니 내탓이 아님에도
미안해야하는 순간들은 너무나 많아서


5시간의 끝도없는 기다림과 또 5시간 남짓의 무료했던 비행.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스턴까지 날아오는 데 그 놈의 시차가 또 한번이 바뀌었고, 그리하여 3시간이 다시 빨라졌다. 한국은 이미 새날을 맞았고, 나는 다시 뒷걸음질 치듯이 또 같은 날짜의 하루를 다시한번 살고 있었다, 아니 살아내고 있었다. 하루 사이 많은 '기다림'과 '울음'이 번졌고, 이렇게 뒤범벅된 감정은 마치 연말연초 정신없는 나의 상황과도 닮아있다고도 생각했다. 33살의 빠르지 않은 나이, '결혼'이라는 걸 했고, 10년 남짓 해왔던 일, 나름 안정된 직장을 '제 발'로 나왔으며,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곳, 남편이 일하고있는 보스턴으로 '유학'을 왔다. 결혼-퇴사-유학, 만만치 않은 3단 콤보를 등에 인 채 46킬로그램을 넘을까봐 조마조마했던 위탁수화물과 약 10킬로그램은 됐을 법한 기내수화물까지 켜켜이 쌓아올려 미국에 도착했다. 내 몸까지 더해 100킬로그램이 살짝 덜 된 무게를 새로운 땅에 덩그라니 떨궈놓았다. 그렇게 보스턴 1일차가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식食] 한인마트의 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