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하고 부끄럼 많은 계절*에도

by ENOCH 박두일

2023년 여름, 안산. 한 여인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빈 손수레를 끄는 노인에게 다가가 자신의 우산을 절반 내어주었다. 둘은 1km를 함께 걸었고, 그녀의 절반은 절반의 내어줌으로 비에 흠뻑 젖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우산 천사’라고 불렀고, 세상은 그녀를 흐뭇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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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지, 나도 한때는 우산 천사였다.

1992년, 휘경동 골목. 소낙비가 골목을 집어 맹인이 빗속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다가가 도와드릴까요, 조심스레 물었고 그는 구리행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가자 했다. 그날 나는 누군가의 방향이었고, 잠시 그의 세계의 빛이었다. 우리는 한 우산 아래, 하늘의 80%가 무너져 내리는 거리 위를 묵묵히 걸었다. 버스는 왔고, 그는 올라탔고, 나는 보내드렸다.

그 뒤엔

나와

빗소리만

남겨졌다.


나는 종종 젊은 시절의 숲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홀딱 젖었던 그날만큼은-

그 기억 하나만큼은

살려는 드릴게.




*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의 시, <전설>에서 빌려 옴

* 사진: 경기일보에서 받아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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