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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사임당 Sep 27. 2021

달빛 산책의 선물

선물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눈물이 났다.

금요일 오후, 모두들 이틀 일하고 다시 맞는 주말이 들떠서 경쾌하게 퇴근했다. 나는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쯤 마지막으로 교무실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가는 내 발걸음이 왜 그리도 무거운 것인지 운전석에 앉아서도 시동을 걸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주행 중에 들을 음악을 고심해서 선곡하고, 가방에 챙겨 온 것들을 다시 살폈다. 출발할 용기가 생길 때까지 창밖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엑셀 레이트에 발을 올렸다. 금세 도착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릴 때까지 또 얼마의 용기가 필요했다.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두 아이들과 온전히 보내야 하는 시간을 앞두면 이런 충분한 심호흡이 필요하다.      


“엄마, 우리 이번 주말에는 뭐할까?”

“엄마, 우리 오늘은 뭐하지?”

“어디 가서 재밌는 놀이를 할까?”      


방학을 보내고 한참이나 방학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말과 꽉 찬 연휴를 보내고 나면 별일 없는 평일이 참 행복한 것이라 느껴졌다. 쉬는 날 쉼과 놂의 균형이 없이 가사 육아 노동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주말을 앞둔 금요일 퇴근 무렵은 살짝 두렵기도 했다.     


“삶은 자주 위협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때 우리는 구석에 몰린 소처럼 두렵고 무기력해진다. 그럴 때마다 자신만의 영역으로 물러나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숨을 고르는 일은 곧 마음을 고르는 일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마도 잠시나마 차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의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르는 고유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질러진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보다 한 5분 먼저 들어선 남편 또한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현관 앞에 버려진 듯 놓여 있는 가방을 마주하고 들어서니 아침에 입고 간 외투와 양말을 허물 벗듯 뒤집어 벗어 놓았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저마다 각자의 편안함을 찾아 놀고 있었다. 늘 같은 것으로 잔소리를 하지만 아이들은 들리지 않는다. 간식을 먹은 흔적은 바닥에 그대로 둔다. 껍질을 보니 마이쮸와 아이스크림을 꺼내어 먹었다. 이런 미간이 찌푸려지는 상황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가 몰려왔다. 몰려온 것 이상이었는지 나는 손을 씻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추석 때 어머님께서 싸 주신 반찬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데우지도 않은 명태전을 그 자리에서 손으로 그대로 집어 먹었다. 선 채로 맛있게 먹었다. 하나 더 집어 들다가 눈앞에 현실을 다시 마주했다. 남편이 아이들 동선을 따라 하나씩 치우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해 버럭하고 있었다. 아마도 남편은 퇴근하고 혼자만의 숨 고르기 시간을 갖지 않고 급하게 집으로 들어온 것이리라. 곧 더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는 저녁을 준비했다. 늘 그렇듯 상황은 이내 곧 평온해질 것이므로, 생선과 전을 데우고 나물을 덜어 담고, 김치와 밑반찬 몇 가지 더 담아내면 밥상은 금세 차려진다. 허기와 피로에 지친 우리가 맛있는 밥을 먹고 배가 든든해지면 이내 곧 마음이 넓어지니까 예상했던 대로 밥상을 물릴 때쯤 되니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었다. 명절 음식이라는 게 참 건강식인 것 같으면서 입도 꿉꿉하고 속도 더부룩하고 아무튼 잘 먹고 배부른 소리를 한다.

     

“찹찹하니 바람도 불고 공기도 선선한데 우리 다 같이 해안도로에 걸으러 갈까? 소화도 시킬 겸”

“응, 좋았어. 나 엄마랑 갈 거야.”

“나는 설거지하고 빨래도 개켜야 하고 남아서 집 마저 치울게.”

“여보, 조금밖에 안 되는데 갔다 와서 같이 하자.”

“그럴까? 그럼 나도 갈게.”

“엄마, 나는 그냥 사슴벌레 관련 유튜브 보면서 집에 있으면 안 될까?”

“그럼 넌 자유를 즐겨. 패드로 게임은 틀린 그림 찾기만 되니까 재밌는 유튜브 잘 챙겨봐.”   

  

분리수거하려고 따로 담아둔 비닐류와 플라스틱을 한 바구니에 챙겨서 나왔다. 쓰레기를 버리고 해안도로로 나섰다. 가을바람이 좋다고 말했는데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매서웠다. 태풍 수준으로 불어대서 머리카락이 뺨을 때리고 입고 있던 옷에서 계속 펄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우리는 내 갈 길을 가겠노라 걸었다. 자주 함께 걷는 작은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춤을 추며 킥보드로 냅다 달려 나갔다. 우리 아파트에서 해안도로 끝까지 가면 약 30분, 걸음으로는 2500~2800보 남짓이다. 한참 딸아이 킥보드를 밀어주며 뛰듯 쫓아가던 남편의 걸음이 느려졌다. 다시 그의 발을 보니 버켄스탁 아리조나 슬리퍼다. 반보다 조금 더 지나서 남편이 반대편 건너 공원에 앉아 있을 테니 딸아이와 끝까지 갔다 오라고 했다.

     

‘이 체력으로 무슨 일을 할까? 그러니 매일 아픈 사람처럼 골골하지.’ 미운 생각이 몰려드는데 ‘그래도 걷기 싫어하면서 이렇게 같이 나와 준 게 어디야?’라고 마음을 바꾸어 상냥하게 대답했다.

      

“알겠어. 여보. 저기서 쉬고 있어. 올 때 나 커피 한 잔 마실 거니까 바람 차면 내가 늘 가는 카페에 먼저 들어 가 있어.”     

딸아이와 힘차게 걸었다. 중간에 의자에 앉아 조금 쉬었다 가자고 했지만 저 끝에 가서 마음 편하게 푹 쉬자고 달래며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달리기 시합을 하며 끝까지 갔다.      


“어,, 어.. 윤서야! 저기 봐! 산에서 달님이 나오고 있어.”

“어머 맞네. 아까 엄마가 별은 총총 많은데 왜 오늘 달이 없냐고 물었잖아. 달님이 이제 출근하나 봐.”

“그렇네. 달빛이 너무 밝아서 해가 뜨는 것 같아. 저기 떠 있는 요트랑 바다랑 달이랑 해서 액자에 걸린 그림같이 너무 아름답다.”

“이거 아빠도 보여줘야 하는데...”

“나중에 하늘 위로 더 예쁘게 올라오면 아빠 만나서 같이 보자.”                  


돌아가는 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달 보여? 너무 이쁘지?”

“응? 여기서 안 보이는데?”

“왜? 산 위에서 떠오르고 있지 않아?”

“아니. 여기서는 전혀 안 보인다. 많이 보고 온나.”     


역시나 무드가 없다. 가을 달밤을 같이 걸으면 무언가 마음이 동하거나 추억이 떠오르거나 할 텐데, 남자라 그런 건지 감성이 메마른 건지 얼른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느껴졌다. 한 번 길이 어긋나고 다시 길을 되돌아가 공원 어귀에서 폰을 붙들고 한참 통화 중인 남편을 다시 만났다. 내일 아침부터 있을 지역 봉사활동 일정과 관련해서 통화가 길어진 모양이었다. 공원 옆 단골 카페로 갔다. 디저트 쇼케이스에 아이가 좋아하는 휘낭시에 5개입 포장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가격도 5,500원으로 다른 곳에 비해 엄청 저렴했다.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것을 알아챈 아이도 기쁜 마음으로 냉큼 제일 먼저 주문을 했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투샷, 남편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차례로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빈털터리였다. 보통 폰케이스에 체크카드가 늘 들어있는데 주유하면서 결제하고 가방 안에 카드를 그냥 넣고 말았다. 남편은 당연히 걷고 바로 올 것이기에 현금이나 카드 어느 하나 챙기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 참 좋은 세상인 것이 폰에 있는 카카오페이 앱을 켜면 바로 송금이 편리하게 이루어진다. 모두 자신이 주문한 것을 받아 들고 행복감을 느끼며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하늘을 보니 달이 산에서 한참이나 솟아올라 바다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순간 내 눈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자. 성공이든 행복이든, 그것을 향해 한걸음 내딛을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앞당겨 쓸 수도, 어제를 다시 꺼내 쓸 수도 없다. 오직 이 순간에 몰두해야 한다.’


스펜서 존슨은 <선물>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는 순간 이제와는 판이한 새로운 세계가 다가온다고 했다. 내게 그 순간은 바로 그날 달빛을 보며 함께 걷던 밤이리라. 여느 때와 같이 남편은 무덤덤했고 아이는 많이 들떠 있었다. 나는 평소대로 묵묵히 목표한 걸음을 채웠고, 남편은 그 길을 함께 하다가 저 혼자 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의 그 달빛 때문인지 그럼에도 남편이 같이 길을 나서 준 덕분인지 마음이 벅차올랐다.     

 

다음날 혼자 아침 일찍 봉사활동을 간 남편을 빼고 아이들과 셋이서 공원에 갔다. 둘이서 놀이터에서 싸우다 놀다 하는 것을 벤치에 앉아 힐끗힐끗 보면서 가져간 얇은 책 하나를 읽었다. 바로 그 책, <선물>이었다. 표지를 열어보니 연노오란 색의 빈 여백에 ‘사랑하는 제자에게, 2005. 5. 선생님이’라고 작게 쓰여 있었다. 내 나이 스물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니, 나를 위해 이런 책을 선물해준 선생님이 계셨다니 그것으로도 무언가 마음이 울컥했다. 스물의 나는 이 책을 읽고 참 좋은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어른이 되어 이제야 이 책의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햇빛이 참 좋았고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잘 놀고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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