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이 물었다. 아이가 남들과 다른 건 알고 계시는지요. 잘 알고 있었다. 스멀스멀 맺히는 눈물에 이를 악 물었다. 어린이집에선 장애통합반을 권했다. 그것이 아이에게 더 좋을 거라고 했다.
뱃속에서부터 모든 검사에 평균을 유지해 ‘모범생’이라 불렀던 아이가 이상하다 느낀 건, 말을 할 무렵이었다. 더 어린 아이들도 말을 시작하는데, 도통 말을 시작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 해, 두 해가 흘러도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고, 또래와 어울리지 못했다.
담당교수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발달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아이는 병원의 분위기가 싫은지 나가자고 울며 발버둥쳤고, 남편은 그런 아이를 안아 달래고 있었다. 이제야 병원을 찾은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단순 발달지연이라 믿어왔는데 혹 장애라 할 까봐, 주양육자인 엄마가 잘 못 키웠기 때문이라 할 까봐, 그럼 나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최근 몇 달 동안 무지 좋아졌어요. 이제 기관에 적응해 다니고, 또래와 함께 놀고 싶어하고, 능숙하진 않지만 말로 의사표현도 해요. 묻지도 않는 말을 변명하듯 한다.
각 과마다 검사를 예약하고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앞날이 아득했다. 자만을 버리고자 종교도 가져봤다. 모두 현실도피에 불과했다. 걱정할 정도로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위로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가 지금은 느리지만 서울대에 갈 수도 있잖아? 기죽어 보이지 않으려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닌다.
검사를 앞두고 남편과 아이와 이국의 섬을 찾았다. ‘큰 기차’를 탈 거라고 잠투정도 없이 일어난 아이는 비행기와 경비행기까지 타야 하는 긴 이동에도 잘 따라와주었다. 이곳은 울창한 숲과 푸른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햇살은 뜨겁지만 가만가만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지고, 밤 하늘에 별이 수없이 박혀 있다. 아이가 침대에 누워 과자를 먹어도, 물 속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떼를 피워도 화가 나지 않는다. 원래는 아주 우울한 내용의 글을 쓰려고 했다. 도망치고 싶었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놀고 싶으면 놀다 보니 원래 쓰려고 했던 아이의 발달 문제에 의문이 생겼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나?
이 곳에 와서 아이의 표현이 늘었다. 남편과 나의 팔짱을 끼고 배시시 웃기도 하고, 듣고 싶은 만화의 주제곡을 말하기도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정확히 말하기도 한다. 기다려주니 신발도 스스로 신을 줄 알았고, 라면을 끓여 달라고 들고 오며 포트의 전원을 켜 놀랍게 만들었다. 서툰 발음이지만 2음절, 3음절의 말까지 성공했고, 아이는 흥얼거리며 논다.
여유가 생기니 걱정했던 아이의 문제에도 심드렁하다. 느리긴 하지만 매일 열심히 달라지고 있는 아이를 왜 보지 못했나, 의연하게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인 걸 알면서, 나는 번번이 무너지고 번번이 후회한다.
처음 아이를 임신한 걸 알았을 때, 배만 부르다 보면 아이가 그냥 태어나는 줄 알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선, 분유를 먹이고 밥을 먹이면 그냥 알아서 잘 크는 줄 알았다. 그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는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아이가 나를 기다려주는 걸지도 모른다. 좋은 엄마까지도 아니고, 그냥 ‘엄마’. 엄마가 되는 걸 기다려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