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점심시간에 친구를 만나러 북촌에 갔다. 점심시간은 직장인인 나의 하루 안에서 그나마 색다른 이벤트가 벌어지는 시간이다. 좀 다른 메뉴와 낯익은 사람이 있다. 가끔 예상치 못한 이야기도 만난다. 오늘은 어느 8년차 연인의 아름답지만은 못한 이별담을 들었다. 어쩌면 점심은 매일 있는 60분짜리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모름지기 한정된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아침부터 점심 메뉴가 고민되는 이유가 있었다.
2.
점심의 어원은 ‘마음의 점을 찍다’이다. 원래 끼니는 아침과 저녁 2끼가 다였는데, 2끼 가운데 가벼운 간식으로 마음에 점을 찍듯 허기를 달래는 정도로만 챙겨먹는다고 해서 ‘점심’이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점심시간은 허기를 달래는 시간이다. 신체적 허기는 물론, 정신적 허기를 달랜다. 올해도 벚꽃이 피었나, 평일의 모교는 어떤가, 교보문고에 신간은 나왔나, 주변의 여러 곳을 둘러본다. 월화수목금으로 이어진 일상에 반점 한 번 찍는 시간이다.
3.
정오부터 시작된 점심시간이 되면, 가끔 이방인의 ‘뫼르소’가 생각난다.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 ‘정오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이를 번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본인이 살해한 아랍인이 칼을 들고 있었음에도 ‘정당방위’라 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낀 진실을 사회가 원하는 단어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정오의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일시적으로 ‘뫼르소’가 되고 싶다. 어딘가의 직원이 아닌, 솔직한 내가 되고 싶다.
4.
그럼에도 점심시간은 가끔, 또 어딘가의 나에게 얽매이는 시간이다. 핀란드로 여행을 가는 힙스터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구청에 가서 여권을 갱신한다. 어른들이 선호하는 착실한 20대가 되기 위해 은행에 들러 주택청약통장을 만든다. 어쨌든 연애와 결혼도 하라고 하니깐 주변 직장인과 소개팅을 한다. 또 그럭저럭한 스케줄을 짬 내서 소화할 때면, 결국 점심시간도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굴레에 있는 시간일 뿐임을 느낀다.
5.
12시. 정오는 오전도 오후도 아닌 시간이라고 한다. 정중앙이다. 그로부터의 딱 한 시간. 우리는 어딘가의 흐름으로 쏠려간다. 점심시간이 괜찮았으면 오후도 썩 괜찮고, 점심시간이 아쉽거나 정신없으면 한없이 지친다. 날이 풀리자 카페에 앉은 사람들이 길로 나섰다. 점심시간의 청계천을 수많은 직장인들이 거닌다. 광화문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을지로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혹시 그게 아니면 또 다른 방향으로. 얼기설기 치우쳐가는 흐름 속에서 하루의 방향 또한 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