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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ul 31. 2019

D안을 고르면

요즘의 나

“딱 봐도 광고주는 A안 아니면 B안을 고를 것 같긴 한데, 그냥 저거 두 개만 가져갈까요?” “아니에요, C안이랑 D안도 가져가야 광고주가 A안과 B안 둘 중에 하나를 고르죠.” 광고주에게 가져갈 아이디어를 고를 때, 월등히 좋은 것과 완벽히 버려지는 것 그 사이의 어떤 아이들이 있다. 보통 D안부터 그렇다. 그래도 이 D안이 살아서 미팅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A안과 B안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엑스트라로써 활용될 때이다. 모든 우월함은 비교 상대가 있을 때 빛나는 법. 세상에 차은우만 있으면 그 누구도 차은우를 보고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A안도 D안이 있을 때 더욱 빛난다. 


순발력이 부족하고 자기표현능력이 좀 떨어지는 편인 나는, 다대다 면접에서 D안 같은 역할을 자주 했다. 모 홈쇼핑의 최종면접을 보던 날은 군기가 제대로 박힌 ROTC 임관자와(그야말로 한국조직에서 대체로 선호하는 남성상) 예쁜데다가 상큼발랄하고 싹싹한 Y대생(그야말로 한국사회에서 대체로 선호하는 여성상) 사이에 껴서 단 하나의 개인 질문도 받지 못하고 나왔다. 예쁜데다가 상큼발랄하고 싹싹한 그분은 자기소개부터 “홈런 같은 지원자(‘홈’처럼 따뜻하고 ‘런’처럼 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라는 키워드를 전혀 오글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으로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 날, 집에 가며 엄마에게 전화로 “이제 면접을 어떻게 보는지 좀 알았다”고 하자 엄마는 면접을 잘 봤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난 그 예쁜데다가 상큼발랄한 그 Y대생을 보고 말한 건데.


A안과 B안은 누가 봐도 정답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것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할 것 같다는 결과가 예측된다는 자체가 재미가 없어서, D안이 품고 있는 오묘한 위험성과 골치 아픔이 설레서, 나는 회의 때 D안을 자주 민다. 물론 D안도 미팅에 간다. 내가 최종면접을 봤던 것처럼. 사실은 A안과 B안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서지만, 최종면접에서 내가 뽑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처럼 D안도 '혹시?'라는 생각으로 미팅에 간다. 아주 정말 가끔은 D안이 뽑혀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정답 같은 안은 아니기에 그때부터 걱정은 시작이다. 그래도? 나에겐 D안이 더 매력 있다. 원래 불확실성이 더 매력 있는 법이다. 절대 확답을 주지 않는 나쁜 남자가 인기를 끄는 것처럼.(개새끼들)


비용효율성을 추구하는 사기업에서 A안 같은 사람을 두고 D안 같은 사람을 뽑을 일은 거의 없다. 인생에서도 플랜 A를 두고 플랜 D를 굳이 택하는 짓은 좀 모자라보인다. 그래도 회의에서 D안을 미는 게 내 습관이어서인지, 혹은 면접장에서 D안으로 자주 현신하였던 내가 생각나서인지 인생의 선택의 순간에 절실히 D안을 선택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아니 가끔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가 D안이 아니면 잘 못 사는 사람 같기도 하다. 요새는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오는 회사 안에서의 거침 없는 언변("경쟁사처럼 6시에 출근해라"는 임원의 말에 "그때 출근하면 오후 3시에 퇴근해도 되나요"라고 말한 나)과 결혼을 전제로한 연애시장에 걸맞지 않는 나의 태도와 스타일("결혼해도 각방 쓰면 좋겠다"라는 생각), 뭐든 꼭 기존 관습에 딴지를 걸어보고 싶은 선천적 습관("어디 최씨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족보는 임진왜란 이후에 다 산 건데 뭐 그런걸 묻냐"고 대답하기)들이 내 안에서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렇게 살면, 이제 세상의 엑스트라가 되는 걸까. 회사에서 인정도 못받고, 노처녀가 되고, 사회 부적응으로 낙인 찍히는 걸까. 그 공포심에 나는 억지로 A안에 나를 넣어보려하지만 결국 D라는 알파벳이 A라는 알파벳 안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요새 계속 D로 나도 모르게 회귀하고 있다. 


D로 사는 건, 주변 사람들은 재미있어하지만 본인은 너무 고통스럽다는 크나큰 단점이 있다. 노조를 싫어하는 걸로 유명한 S대기업 면접때 이력서의 존경하는 사람에 '좌파 지식인'을 넣고 면접본 썰부터(응, 그래 이것도 내 이야기) 필기 시험에서 야설 쓰고 나온 이야기까지(다른 사람은 쓸 수 없고 나만 쓸 수 있는 걸 쓰라길래) 친구가 즐거워할 술안주는 팡팡 나오지만 결국 시험에서 떨어지고 자존감은 떨어지고 돈 못 버는 건 나니까.


그래서 A안처럼 살아보려 노력하고 있는데.. 


시X.. 사람은 잘 안 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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