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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Jan 09. 2023

가장 쓸모없는 보라색 이야기

동틀무렵 보라색이 태어났어요.

다른 색깔들과 함께 가게 진열대에서 손님들을 기다렸어요.


빨간색 체크남방을 입은 아저씨가 500원을 내고 빨간색을 데려갔어요. 

잠시 후 소방차에 칠해진 빨간색은 이용이용, 빠알간 불빛을 내며

불이난 곳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어요. 

위풍당당한 빨간색의 모습에 보라색은 덩달아 자랑스러워졌어요. 

기대감에 부푼 보라색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난 어디로 가게될까?'


곧이어 초록색 머플러를 두른 아주머니가 천원을 내고 초록색을 사갔어요.

그리고 빛을 잃어가는 신호등 초록불을 갈아끼웠죠.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초록불이 켜지자 반갑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어요. 

보라색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초록불이 부러웠어요.  


사람들은 값을 지불하고 노란색, 파란색도 사갔어요. 

노란색은 어린이차량으로, 파란색은 버스가 되어 가게 앞 도로 위를 달렸어요. 

보라색은 여전히 가게 안에서 창문 너머로 친구들을 바라봐야했어요. 

하지만 오후가 되도록 아무도 보라색을 사가지 않았어요. 

'아무도 날 찾지 않네. 난 아무 쓸모가 없나봐.'


홀로 남겨진 보라색은 문 밖을 둘러봤어요. 넓은 세상 어디에도 보라색은 없었어요. 

실망한 보라색은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갔어요.   

간곡하게 초록색에게 부탁해 잠시 신호등이 되어봤지만

보라색 불이 켜지자 사람들이 가야할지 멈춰야할지 혼란스러워하며 보라색 신호등에 손가락질했어요. 

길은 꽉 막히고 도로는 온통 엉망이 되었어요.

보라색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비켜줬어요.

 

쓸모없는 색으로 태어난 자신이 창피했어요.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곳으로 숨고싶어서 걷고 또 걸었어요.

이윽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세상 끝에 다다랐어요.

더이상 발 디딜 수 없는 벼랑 위였어요. 

바로 그 곳에서 발 밑에 흐드러지게 핀 보라빛 꽃밭을 만났어요.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보라빛 물결이 출렁였어요.

보라색은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쓸모있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벼랑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 보라색 꽃밭에 누웠어요. 

보랏빛 향기가 코끝에 뱅그르르 맴돌았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파랗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갔어요.  

꽃밭도, 하늘도, 그 하늘을 비추는 호수도 온통 보랏빛이었어요.   


깊은 밤, 짙은 보랏빛 하늘에서 달과 별이 고요히 빛났어요. 

아무도 사가지 않은 달과 별을 한참이나 바라봤어요.  

저들은 몇억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외로워보이지 않았어요. 

그 시각 소방차도, 신호등도 모두 보라색 밤하늘을 바라봤어요.

보라색은 꽃밭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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