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도 결혼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구멍(opening)- 인생 첫 소개팅

by shining days

어릴 적 만화책 읽는 걸 좋아했다.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도 재밌었지만 취향은 역시 순정만화였다. 춘기 즈음엔 가슴 저릿한 연애소설을 읽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내 인생에도 이런 로맨스가 있었으면……. 하지만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실감각 내 발목을 붙잡았다. 과연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배우자상을 얘기할 때 흔히들 하는 얘기가 있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구김살 없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말. 안타깝게도 나는 여기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구김살이 없뇨? 링클프리는 옷 얘기 아닌가요). 렇다고 이 모든 것을 커버할 만큼의 미모나 재력을 겸비한 것도 아니서,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4년 만난 남자친구와 을 때였다. 이제는 결혼할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 내가 결혼하고 싶은 남편상에 대해 다이어리에 적어봤다.


1. 종교적 가치관이 맞는 사람(우리 부모님의 이혼사유니까)

2. 여자 문제로 속 썩이지 않고 나만 사랑해 주는 사람

3.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

4. ...


그래, 이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어디에 살까? 가상의 남편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27살 때쯤 결혼하고 싶다 생각 들었다(그때가 24살이었). 그렇게 치니까 '어?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네? 나는 결혼할 준비가 전혀 안 됐는데?' 싶어서, 우스운 얘기로 들리겠지만 나 혼자 아내가 될 준비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일단 저축을 열심히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안 하던 이불 정리도 하고, 방청소도 자주 했다. 결혼해서 밥 해 먹고살려면 요리할 줄 알아야겠네, 해서 혼자 블로그를 보며 요리를 시작했다.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짜잔, 하고 기껏 떡국을 끓니 기특하다는 칭찬은커녕, 먹지도 않는 떡국은 왜 끓였냐고 핀잔주는 할아버지 때문에 잠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쉬운 요리부터 차근차근 시도해 나갔다. 혼자만의 신부수업이랄까. 나는 알아서 척척 잘하는, 척척박사님 스타일이니까!(뿌듯)


내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한 가지 생각이 들고나서부터였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양쪽 모두 그런 마음이라면, 결국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꼭 경제적인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을 만나게 될 거란 결론에 이른 것이다. 나와 비슷한 남자라고 생각하니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으면 나도 그만큼 멋진 여자가 돼야 하는 게 인지상정일 테니까.




"야, 오늘 소개팅할래?"

월요일 오후였다. 안 그래도 바쁜 날이었는데 친구는 오늘 아니면 안 된다며 당일 저녁 8시로 약속을 잡아버렸다(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머리 만질 새도 없이 옷만 서둘러 갈아입다. 에이, 오늘 한번 보고 말겠지 뭐. 그렇게 얼렁뚱땅 첫 소개팅을 나가게 됐다.


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검은색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평소 운동을 하는지 팔이 꽤 다부져 보였다. 아마 소개팅을 여러 번 해본 사람이라면 '오늘 소개팅은 성공적인데?'라고 생각할 만한 훈남 스타일이었다. 말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그러다 문득, 리 집안사정을 다 알고 나서도 이 분위기가 유지될까 궁금해졌다. 처음 만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불리한 패를 전부 발리기로 했다. 내 조건이 부담스러우면 빨리 도망가라, 이 마인드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엄마는 얼굴도 몰라요. 아빠는 알코올중독이어서 2년 전에 간경화로 돌아가셨고 평생 일을 안 하셨어요.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랑 살고 있는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전문대를 갔고 공무원으로 직장생활하다가 지금은 편입해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소개팅은 보통 자기 매력을 뽐내는 자리인데 째 나는 단점만 줄줄이 늘어놓 됐다. 아무튼 걸릴 만한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는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네요. 저희 부모님도 자주 싸우셔서 많이 속상했는데."라며 덤덤히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카페 문 닫을 시간이 됐다. 2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그가 집에 데려다줘도 되냐고 물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네."라고 대답했다.


헤어지자마자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사람이 너 엄청 마음에 드나 봐. 자기한테 과분한 사람이래." 음.. 그런 얘길 다 했는데도 괜찮다는 말이지?


그 후로 우리는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 영화도 보고 밥도 먹었다. 만난 지 3주쯤 된 것 같은데 이 남자. 어째 사귀자는 말이 없다.


"근데요. 왜 나한테 고백 안 해요?"


내 질문 당황스러웠는지 그가 사레에 렸다. 물을 마시 잠시 숨을 윽고 자신의 이야길 꺼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지금 직장 다니게 됐다고 했다. 저축을 하고 있지만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돈을 보태주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라고. 그에게 결혼은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주변 사람들이 결혼을 준비하서 경제적인 문제로 다투는 걸 보 '나 같은 사람은 더더욱 혼을 못하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혜원 씨는 저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공무원이고 학벌도 좋으니까. 제가 혜원 씨한테 사귀자고 하면 왠지 길을 막는 것 같아서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그는 나의 구멍이 아닌, 자신의 구멍을 본 것이다. 전문대졸이라는 학력, 하루 걸러 하루 다투시는 부모님,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까지. 어릴 적 빌라 반지하에 살았는데 윗집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자기 집 변기물이 역류해서, 흘러넘치는 똥물을 퍼내느라 엄마도 울고 자기도 울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볕이 잘 드는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라고 말했다.


고깃집이라 분위기가 시끌벅적했지만 그의 눈을 맞추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번 내 얘기에 그가 그래줬듯이.


나는 그의 다정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할머니와 다르게 내 말을 경청해 주는 것도 았다. 내가 "직장에 다니는 건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고 싶어요."라고 대답다면 실망했을 것 같은데 그는 "힘들 때도 있지만 재미있어요. 더 잘 해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아빠와 달리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 것 같아서 안심이 됐다. 술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다. 많이 벌진 못해도 많이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OO 씨보다 능력 좋은 사람, 집안 좋은 사람. 세상에 많이 있겠죠. 근데 그런 사람들이 다 나를 좋다고 해도 나는 OO 씨가 더 좋아요. 나는 당신하고 만나고 싶어요." 그가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얼마 후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가 우리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공원 쪽에 다다랐을 때쯤 핸드폰로 all for you 노래를 틀더니 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사실은 말이야. 나 많이 고민했어.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걸.
아주 많이 모자라도 가진 것 없어도
이런 나라도 받아줄래.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난 세상 모든 걸 다 안겨주지는 못하지만
난 너에게만 이제 약속할게.
오직 너를 위한 내가 될게.

- all for you, 쿨 -

"이 노래 가사처럼 나는 많이 부족한 남자예요. 그래도 혜원 씨만 괜찮다면 오직 혜원 씨만을 위한 남자가 되고 싶어요. 내 여자친구가 돼줄래요?"


그의 고백에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 그도 자신의 빛나는 면을 먼저 봐주는 사람을 만났다. 내 배경보다 나 자체를 유심히 주는 사람. '과거의 나'보다 성장하고 있는 '현재의 나' 초점을 맞추는 사람. 랫동안 가졌던 불안을 안심시켜 주는 사람. 남들 눈에는 부족해 보일지라도, 내 눈에는 최고인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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