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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Jan 16. 2021

다시 찬란한 무대 위에 설 거야!

내 인생, 언제 뒤집어질지 몰라!

"와~~~~~~~~~!!!!!!"

우리 학교의 합창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와 우레와 같은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객석을 바라보자 관객들 얼굴에 환희가 가득 피어올랐다. 쿵쿵쿵! 와... 심장이 터질 것 같. 짜릿한 전율이 온몸에 흐른다. 이 환호소리를 매일 들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지?


무대를 내려오며, 더 크고 화려한 무대 위의 나를 상상해본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 춤추 노래하는 내 모습.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손 인사로 화답하는 내 모습. 상만 해도 진걸! 좋아, 찬란하게 빛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는 거야!


unsplash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학교 음악 선생님이 방송국과 연이 닿아 있던 것이다. 스승의 날 방송 프닝으로 스승의 은혜부를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음악 선생님의 간택을 받아 EBS 방송국진출(?)하게 됐다. 연예인 마냥, 방송 스케줄을 이유로 학교 수업 땡땡이치다니.. 벌써부터 이렇게 유명해지면 곤란한데?

시간 전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녹화 중인 다른 스튜디오 구경하고, 기념품으로 나눠주신 '인어공주 볼펜' 훈장처럼 목에 걸고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뿌듯해하고 있었다.


드디어 방송 시간 10분 전. 카메라 앞에 서서 PD님의 설명을 듣는다. 윽, 카메라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니. 생방송 시작 30초 전. (으 떨려) 10초 전. 5, 4, 3, 2, 1. 큐! 손가락 사인과 함께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다. 조금 전 긴장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장 쁜 표정으로 방긋방긋 웃으며 프로페셔널하게(?) 승의 은혜를 불렀다. 어머, 어떡해.. 나 진짜 무대 체질인가 봐. 재밌어! 짜릿해! 최고야!!


그 이후로도 나는 속해서 음악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초, 중, 고 모두 학교 합창단에 들어갔 합창단 반장이 되, 운동장 조회 시간 구령대에 올라가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를 지휘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벅차오르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진짜 내 무대에 서는 날도 올 거야! 나는 추호도 믿어 의심 않았다.


가슴속에 심긴 작은 꿈은 칭찬을 자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다. 가창 시험 시간 오 솔레 미오(O Sole Mio)를 부르자, 엄격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음악 선생님이 를 향 극찬 끼지 않으셨.

"지금까지 매년 전교생이 이 노랠 불렀는데, 역대 선배들 다 포함해서 네가 제일 잘 불렀다. 너 나중에 노래 전공할 거니?" 

게다가 졸업하면 자길 찾아오라 신다. 자기 교회 성가대 같이 하자고. 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받은 칭찬은 폭발적인 설렘의 파급력을 가져왔다. 이래서 나쁜 남자(?)가 한번 잘해주면 훅 빠져버리는 건가.. 반 아이들이 부러운 듯 다 나를 쳐다본다. 입술이 씰룩씰룩. 최대한 태연한 척하고 싶은데,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 역시 난 노래할 운명인가 봐!


교회에서항상 마이크를 들고 찬양을 불렀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회의 언니, 오빠들이 결혼을 하면 친구들과 함께 축가도 여러 번 불렀다. 특히 성탄절 뮤지컬 공연에서 매혹적인 역할을 맡, 꼬맹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 언니"로 불리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마냥, 나만 보면 저 멀리서부터 아이들이 달려와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절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디어 다리고 다리던 시립 합창단 오디션 날짜가 잡혔고 ' 곧 내 자리가 될 거야. 슨 노래를 부르지?' 생각하며 오디션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중, 한 친구의 청천벽력 같은 얘길 들어버렸다.

"시립 합창단 하면 돈이 좀 들어." 

... 뭐? 돈이 든다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럼 나... 못 하는 거야?


그동안 방과 후 수업으로 친구들이 바이올린을 켜는 걸 몰래 훔쳐보았다. 와, 멋지다. 나도 배우고 싶은데.. 바이올린 엄청 비싸겠지? 집에 와바이올린의 ㅂ자도 꺼내지 못했다. 원래 가난한 집 아이들은 빨리 철이 니까. 노래는 내 몸이 악기라 다행이야. 비싼 악기 안 사도 돼서 좋네. 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노. 래. 도. 돈. 이. 든. 다. 고.?

나는 내 분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였다. 하지만 노래만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염치를 무릅쓰고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할머니.. 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곧 시립합창단을 뽑는대. 지금 학교 합창단 하는 것처럼 다 같이 노래 부르는 건데... 나 그거 해도 돼? 옆집 친구도 할 거래."

"그래. 하고 싶으면 해 봐."

"근데... 시립합창단은 돈을 좀 내야 하나 봐.. 많이는 아니고.."

무심하게 콩나물을 다듬던 할머니의 손이, 돈 얘기에 순간 멈칫했다. 나는 심장이 떨리고 조마조마해서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우리 집에 그런 돈이 어디 있어.."
"으응.. 그렇지. 나도 알지. 그냥 한번...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눈물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재빨리 뒤돌아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숨죽여 울었다. 예쁜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매일 상상했는데..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는데..


며칠 뒤, 친구들이 물었다. "넌 왜 오디션 안 봐? 우리 학교 합창단 반장이잖아." 그러게 말이다. 왜 나는 오디션 안 보니. 왜 나만 오디션 못 보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쩍은 웃음만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 당일은 왜 그리도 시간이 느리게 가는지... 에잇, 안 할 때 안 하더라도 오디션이라도 볼 걸 그랬나? 립합창단 오디션은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이라고 하고 올 걸... 친구들이 한창 오디션을 보고 있을 시간, 나는 그 시간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괜히 방청소를 하고, 책을 꺼내 읽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가끔가다 시계만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예체능은 돈이 많이 들어. 한번 레슨 받는 거만 해도 얼만데.. 런 건 집에 돈 많은 애들이나 할 수 있는 거. 평범한 집 애들은 꿈도 못 꿔."

그렇구나. 우리 집은 그 평범한 집도 못되는데.. 이상과 현실, 현실, 현실, 현실.... 노래는 내 길이 아닌가 봐. 씁쓸한 마음 감출 길이 없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마음의 서랍을 열고, 날개가 꺾인 꿈을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다시 너를 꺼낼 날이 올까. 아, 달콤 쌉싸름한 나의 꿈이여... 


그 뒤로도 교회에서 항상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지만 이미 꿈에 대한 모든 희망이 꺾인 후였다. 나는 평범하게 공부를 했고, 평범하게 수능 시험을 고, 평범하게 취업 준비를 했다. 노래는 점점  삶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불후의 명곡을 보다가 두 눈이 띠용,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뭐야. 얘가 왜 여기서 나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내 중학교 때 친구였다. 그 당시 내가 포기했던 시립합창단을 하던 친구. 옛날부터 노래를 정말 잘 부르던 그 친구. 아... 뮤지컬 배우가 됐구나... 래, 노래로 먹고 살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TV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순간, 가슴울컥. 초록창에 친구의 이름을 검색. 그동안 뮤지컬 공연 많이 했구나. 유튜브도 하네. 나는 오늘도 집에 콕 박혀서 애기 똥 기저귀만 갈고 있었는데.. 부럽다.... 

친구의 무대는 정말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 무대가 가져온 파동은 마침내 내 일상 휘젓기 시작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어린아이 둘을 내 앞에 앉히고 비장하게 장난감 마이크를 들었다. 자, 엄마 노래한다. 잘 들어봐. 어렸을 적에 몇 번, 내 방 장롱에 들어가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집에서 노래를 불렀었다. 하지만 가족들한테 들리는 게 창피해서 이내 연습을 포기해버렸다. 그땐 지금처럼 얼굴이 두껍지가 못했으니까.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이 꼬맹이들은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내 노래를 평가하지도 않고, 심지어 내 노래에 전혀 관심도 없어서, 집에서 노래 부르는 게 하나도 창피하지가 않았다.


그동안 내 목소리를 오롯이 들을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 여럿이서 함께 불렀고, 그마저도 피아노, 기타, 드럼 소리에 묻혔었으니까. 반주도 없이 생목으로 마주한 나의 노래 실력은 무참하리 만큼 형편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하는 줄 알았는데, 그동안 나 이렇게 못 불렀던 거야?

그런데 분명 처참할 만큼 좌절스런 실력인데, 이상할 만큼 행복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중한 걸 잃어버렸었구나. 그래, 나 노래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맞아, 나 노래 부를 때 행복했었지.  날,  내 곁에 있던 파랑새를 발견했다.


오늘 밤 신데렐라 동화 속의 요정 할머니가 찾아와서 '수리수리 마수리~!' 지팡이를 흔들며 돈, 나이, 재능 다 바꿔줄 수 있다며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뭘까.

"요정 할머니, 저는요. 노래를 정말 잘하고 싶어요."


그 뒤로 날마다 연습하기 시작했다. 집에서건, 차에서건. 애들 앞이건, 남편 앞이건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엔 유튜브가 정말 잘 되어있어서 발성, 호흡, 발음까지 노래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넘쳐났다.

한 달, 두 달 연습하다 보니, 정말 실력이 느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계속 연습하다 보면 나중엔 깜짝 놀랄 만큼 잘할 수 있겠지? 지금은 아이들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중에 복직하면 일하느라 먹고살기 바쁘겠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뮤지컬 동호회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결혼식에서 혼자 마이크를 들고 멋지게 축가를 부를 수도 있을 거야. 꼭 직업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저 노래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노래할 수 있다면 그 어디가 됐든 행복할 거야. 슬램덩크에서 '농구가 너무 하고 싶어요'라며 안 선생님 앞에서 무릎 꿇던 정대만의 절절한 심정만큼, 나도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졌으니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뮤지컬 배우요."

어릴 적, 상황과 형편에 관계없이,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저 순수하게 좋아하던 것. 내가 진짜 하고 싶던 것. 그래, 그게 바로 노래였어.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유튜브


"나는 내 인생이 71살에 뒤집어졌잖아. 내 인생이 이러고 뒤집어질 줄 알았으며는, 내가 허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을 텐데. 그거를 몰른 거야.. 느그들 인생이 언제 뒤집어질지 몰라." - 박막례 할머니 -


다시 꿈꾸는 소녀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노래는 5분 만에 행복해질 수 있는 '마법의 열쇠'였다. 그래. 조금 늦었을 뿐, 충분히 늦진 않았어. 끝날 때까진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단념하면 바로 그때 진짜 끝나는 거야.

크리스마스보단 크리스마스이브가, 소풍날보다는 하루 전 날 밤이 더 설레고 기대되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날 나의 미래를 꿈꾸며 오늘 하루 마음껏 설레야지. 내 인생이 완벽하게 뒤집어질 날을 기대하면서!


(먼 훗날 이글 성지글이 되길 바래 봅니다.)


P.S. 아무것도 되지 못해도 좋아요. 그저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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