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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Apr 14. 2023

피 흘리지 않고 7대 1을 이긴 이야기

가난이라는 구멍(opening)- 가난이 준 의외의 승리

나의 어릴 적에도(명칭은 달랐겠지만) 일진으로 불리는 부류가 존재했다. '더 글로리'비하면 많이 순한 맛이긴 했어도 거기에도 만의 칼칼한 맛은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나만 빼고 다들 학원에 다녔다. 그때의 학원들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속셈학원이라 학원비가 꽤 비쌌고 우리 형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런 내가 어느 날부터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원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고개를 숙인 할아버지의 부끄러움 값 덕분이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내가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 너머에서 쾅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다. 이어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누구야. 방금 문 연 사람 나와!"


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거기엔 또래보다 덩치 큰 남자애들이 서 있었다. 일진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일진 비스무리한 애들이었다. 그중 가장 체격 좋은 남자애가 있었는데,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처럼 아주 기세등등하고 거만한 아이였다. 그의 양옆에는 늘 추종자들이 따라다녔고(그게 일진인가) 나머지 아이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곤 했다(그게 일진인가 보다).


그런데 내가. 하필이면. 그 이정재의 이마빡을 문으로 쳐버린 것이다. 

"미, 미안해. 괜찮아...? 많이 다쳤어...?"

"아씨. 눈깔 어따두고 다니냐고!"

"미안해... 뒤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어. 정말 미안해..."


다행히 멍들거나 피가 나진 않. 겉으로 봐서는 그냥 괜찮네, 하고 넘어 수준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강도(strength)가 아니라 시점(timing)이었다. 그날은 걔네들이 학원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자기의 위력을 과시할 만한 본보기가 필요했다. 바로 거기에 내가 재수 없게 당첨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를 향한 비아냥이 시작다. "쟤 사람 치는 애잖아", "꼴 보기 싫으니까 저리 꺼져" 등등. 미안하다고 다시 사과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아이들은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있으나, 없는 사람이 됐다. 


이런 상황에 다른 애들이었다면 진작 학원을 옮겼을 것이다. 학교도 아니고 학원 옮기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내가 학원을 옮기려면 우리 할아버지는 또다시 다른 원장님께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원을 옮기는  '내 형편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만두면 다시는 학원에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계속 거길 다녔던 건 인내심이 넘쳐서가 아니라,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 어.쩔.수.없.이. 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겠지만 사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남의 시선과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쓰다 보니 집에 오면 진이 다 빠졌다. 남들하고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것도 곤욕스러워서 혼자 계단으로 걸어 다녔고 나중엔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아이들마저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내가 사라져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그저 학원을 그만둔다는 뜻입니다).


아빠와 함께 TV를 보고 있는데 TV 위의 시계가 계속 거슬렸다. 학원 가기 20분 전. 10분 전. 5분 전……. 이제 일어나야 하는데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았다. 그날따라 정말 학원에 가기 싫었다. 이만하면 할 만큼 하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에게 이야기했다.


"… 그래서 학원 그만두고 싶어."

"그래. 그럼 그만둬."


짤막한 대답이었다. 이렇게 쉽게 허락받을 줄 몰랐는데? 놀우면서도 감사했다.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낀 건 아마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근데 그럼 걔네는 이겼다고 생각할걸. 금 그만두면 네가 지는 거야."


그전까지가 딱 감동적이고 좋았는데 아빠는 왜 그러셨을. (아마도 자기 딸 자신을 닮지 않고 굳세게 자라길 바라서였나 보다) 어찌 됐건 아빠의 말은 효력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애초에 내가 실수한 거니까'라는 생각에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해자는 걔가 아니라 나 그만둬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걔였다. 이대로 패배자가 되는 건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한순간도 지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학원 복도를 당당하게 걸어가 야멸찬 눈으로 그 녀석을 째려봤다. 러다 내 눈알이 내 뒤통수에 닿겠다 싶을 도로 최대한 강렬하게.

"뭐야? 어쩌라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순순히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장이었다.


그러나 체격으로 보나 수 싸움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내가 불리했다. 이렇게 전세가 불리할 땐 작전을 잘 세워야 . 일명 또라이 작전. 말이 안 통하는 또라이. 협박이 안 먹히는 또라이가 되는 것이다. 는 이제부터 똥이 되기로 했다. '재수 없게 똥 밟았어'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의 그 똥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 문이 열리자 그 녀석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내리려던 참이었고 그들은 타려던 참이었다. 이정재가 말했다.

"야. 비켜."

"싫어! 니들이 비켜!"

이젠 나도 이판사판이다.


작전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쯤 되자 피곤해지기 시작한 건 그들이었다. 조용히 찌그러져있던 애 갑자기 어디서 뭘 잘못 먹었는지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틈만 나면 바락바락 싸우려 드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엔 정재가 내게 사정하듯 말했다.

"야. 제발 그냥 좀 가……."


언젠가부터 그 녀석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나 때문이려나? 에이, 설마) 그 무리가 모두 다른 학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예, 결국 내가 이다! 그 후로도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같이 그 학원에 갔고 무려 8년이란 시간을 거기에서 보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다'는 속사정이 있었지만, 그거야 나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종로 바닥 김두한이 주먹으로 몇 명을 제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무력 없이 한 방울의 피도 흘리 않고 7대 1을 이겼다. 가난이 준 의외의 승리라고나 할까. 이유가 어찌 됐든 이겼으면 장땡!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몇 자 적어봅니다. 학교폭력의 피해를 경험하신 분이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상처받을까 염려되네요.

이 대화는 딸을 향한 아빠의 사적인 의견일 뿐이며 모든 상황을 대변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의 아빠의 말은 저로 하여금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걸 인식하게 해 줬고 그때부터 저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맞서지 않는 방식을 선택하시더라도 그건 당신이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피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명백한 가해자의 잘못이니 문제를 스스로에게서 찾지 마시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늘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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