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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nette Apr 30. 2024

꿈에

16년 겨울. 

전역한 그 사람은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호주행에 올랐다.

인천공항 2층 레코드점에서 직원의 추천으로 산 일기예보의 5집. 말도 통하지 않는 무료한 일상, 잠을 10시간 넘게 잤었던 초기의 생활 중,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그리고 일기예보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는 시간들.  

나는 어쩌면 그 세월을 간접적으로라도 느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모를 그 생을.

내가 놓쳐버린 그 삶의 궤적을.


내 나이에 결혼한 엄마를 두고

홀로 서울에서 사랑에 아파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지 

그러다 너무 아파서 충동적으로 뉴욕행을 끊고 

어떤 호텔방에 체크인하는 일은


나의 모든 결핍과 허영과 자폐적인 고립을 억지로 직시해야 했던 23년 끝자락에서 남은 1년의 대학생활을 앞두고 비행기에 올랐다

폭설이 막 잦아든 발렌타인 데이

이륙했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 사실이 젊음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내게는 너무나도 두려운 말이었다.

나이가 들면, 저마다 삶에서 가장 끝내줬던 순간의 무용담이 한두 가지씩은 생기는 법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쩌면 아무런 무용담 없이 그늘같은 잿빛의 인간으로 나이들 것이다. 여물지 않은 채로. 바로 그 점이 나를 초조하게 했다.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랜딩했다. 몇 년 사이 별들이 자취를 감춰버린 밤하늘. 인공위성의 차가운 불빛만 남았다. 매디슨 애비뉴는 텅 비었다. 세상은 뒤집혔다. 온수를 틀었는데 냉수가 나왔다. 소금은 달고 설탕은 짰다. 생수에서는 락스 맛이 난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웃으며 길을 건넌다. 행복해 보인다. 나도 버릇대로 어색하게 웃었다. 


십년 만에 밟은 맨하탄의 땅에서 무엇을 했는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지물이 소거된 듯 고통 뿐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침대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열 시간을 잤다. 홀로 타임스퀘어를 구경하다 서서 창펀을 먹고 기념품샵에서 악보도 샀지만 이동할 때마다 채널을 넘기듯 딸깍. 배경이 바뀌었을 뿐. 어떻게 어디로 무엇을 왜 누구와 했는지는... 


공백으로 남아버린 뉴욕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학점을 채우고 졸업을 하고 취직도 하고 연애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남자가 타투를 지웠다는 소식을 듣는다

가게를 닫고 이젠

독일 어딘가서 목수를 한다고

전 애인을 잊고 싶어서라는 소문과

이젠 그 가게도 돈이 되지 않으니까 라는 소문 중

그 남자를 덜 외롭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사실 당신이 보고 싶다

빚이 밀면집 방석처럼 쌓여있댔지

당신은 나이듦에 우쭐하지 못했지

내가 풋내를 두려워하듯 당신 역시 그랬지

종로의 오거리를 담는 시야각과

그 사람 향수 냄새에 돌아보는 내 눈동자


단돈 오천원만 내고 쇠맛을 견디면

귀갓길 그 남자가 영사된다 

짜임새라고는 없는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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