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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틀 Flying Board Oct 19. 2022

[비행] 조종사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

안녕하세요. 날틀입니다.


비행과 관련한 첫 번째 브런치를 작성합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처음 작성하는 비행 관련 브런치여서 설레기도 하고 네이버 블로그보다는 조금 더 잘 작성하고 싶은 욕심도 생깁니다.


저는 그저 평범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뭐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기는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놀기 바쁘고 사고 많이 치는 초딩 시절(저희 때는 국민학교였습니다.)을 지나 또 아무 생각 없이 배정된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조종사, 파일럿이라는 꿈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수원 공군 비행장에서 뜨고 내리는 전투기들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던 중학교여서 머리 위로 수시로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지나다녔습니다. F-4, F-5부터 A-1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투기들이 매일 수차례씩 엄청난 굉음을 내며 머리 위를 지나다녔습니다. 학교 선생님을 비롯해 학생들까지 귀청을 울리는 전투기 소음을 싫어하였지만, 저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았습니다. 머리 위로 빠르게 날아오르는 전투기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조종사라는 꿈을 가슴속에 품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도 추첨을 통해 배정되었고, 고등학교는 수원 공군 비행장과는 먼 곳으로 배정되었습니다. 이미 제 가슴속에는 조종사라는 꿈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진학해야 하는 대학교는 '공군사관학교' 하나뿐이었습니다. 체력과 신체는 자신 있었습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체력도 좋았고, 눈은 타고났는지 항상 1.0 이상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언제나 공부죠. 고등학교 3년 내내 참 애매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중간 혹은 중간보다 약간 나은 정도? 조종사라는 확고한 꿈도 있었고, '공군사관학교'라는 목표도 뚜렷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공부하기가 싫었을까요?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정말 열심히 잘할 자신 있는데 말이죠. 특히, 수능이 문제였습니다.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지 응용 능력이 형편없는 거 같았습니다. 내신은 중간 이상은 갔는데, 수능만 보면 항상 중간 혹은 중간 이하를 벗어나지를 못 했습니다.


공군사관학교는 고3 일찍부터 전형을 시작했습니다. 내신, 본고사, 신체검사, 체력검사, 면접 등을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 수능을 반영하여 최종 인원을 선발합니다(지금은 전형이 많이 다르겠죠?). 저는 수능 앞 전형까지는 모두 통과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수능만 통과하면 제 목표인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죠. 앞선 여러 전형을 통해 이미 많은 인원들이 떨어져 나간 상황이어서 수능만 조금 잘 본다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수능을 완전 망치고 말았습니다. 평소 모의 수능 볼 때보다 더 처참한 점수를 받았고 당연히 최종 불합격하였습니다. 부모님한테 얻어맞을 때를 제외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 안에서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죠. 제 평생의 꿈이 좌절된 순간이었습니다. 마침 IMF 경제위기로 집 경제 사정도 매우 악화되어 재수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수능 성적에 맞춰 수도권 사립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공도 비행과는 전혀 무관한 '기계 공학과'.




조종사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저는 항상 조종사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머릿속에 조종사라는 꿈을 품고 살았지요. 기계공학과를 다니면서도 조종사가 되는 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제 눈에 띈 것은 바로 'ROTC'. ROTC로 어떻게 조종사가 되냐고요? 조종사라는 것이 고정익 항공기(비행기) 조종사도 있지만, 회전익 항공기(헬리콥터) 조종사도 있더라고요. 제가 선택한 조종사는 '육군 항공'의 회전익 항공기 조종사였습니다. ROTC를 통해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군 항공에서 헬리콥터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대학교 1학년 때, 남들은 놀기 바빴지만 저는 ROTC에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응용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내신 성적은 그럭저럭 했던 놈이기에, '장학금'을 받을 만큼 성적이 나왔고, 2학년 때 ROTC에 지원하여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지금도 면접 당시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면접관님이 물으셨습니다. "왜 ROTC에 지원했나?". "장기 지원하여 육군 항공의 헬리콥터 조종사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너무나 당당히 1초의 머뭇거림 없이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질문이 없었고, 합격하였습니다.




대학교 4년을 마치고 드디어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하였습니다. 부대는 '제3 군수 지원 사령부' 예하 "80 정비 대대 803 특수무기 지원대'. 이름이 멋지죠? 이름은 멋진데 하는 일은 참 힘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 중에 편한 곳이 어디 있나요? 군 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아! 군대는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명확하지만 숨 막히는 상명하복 시스템과 상명을 하는 분의 인격이 처참하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더군요. 저런 사람이 넘치고 넘칠 군대에 내 인생을 바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때 마침 대한항공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부기장'을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민간 항공사에서 조종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숨 막히는 군대에서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중대장님의 협박에 가까운 '장기 지원' 명령을 뿌리치고, 2년 6개월 간의 소대장 임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2년 6개월의 단기 ROTC 출신 장교들은 모두 같은 날에 전역을 하기 때문에 다들 직장을 구하느냐 바빴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체의 취업 활동을 하지 않고 연말에 진행되는 대한항공 부기장 채용 준비에 올인하였습니다. 영어가 가장 중요하기에 영어 공부에 가장 집중하였습니다. 공대 출신이지만, 중학교 때부터 수학, 물리보다는 영어를 좋아해서 대학교 때도 영어회화 동아리 활동을 하고 동아리 회장을 맡을 만큼 영어에 진심인 편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동안의 영어 '짬밥' 덕분에 영어 성적은 금방 쑥쑥 올라갔습니다. 문제는 적성 검사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그다지 명석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IQ 검사를 해도 항상 시원찮은 성적을 받아 들었고, 수학과 물리 등에도 별다른 재능이 없어 보였습니다. 조종사 적성 검사는 약간 수학, 물리 쪽 문제들이 나오는 것 같았고, 인성 검사는 거의 3시간 동안 집중해서 풀어야 하는 문제들이 잔뜩 나왔습니다. 앞에서 나왔던 질문이 또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앞에서 뭐라고 답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고. 시간은 촉박하니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답을 하고 나왔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밀려오는 찝찝함. 역시나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방에 처박혀 다 큰 녀석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뒤늦게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기업들의 ROTC 특별 채용 기간도 지났고, 나이는 먹었고, 장교 출신인 것과 영어 성적 말고는 특별히 내세울 것도 부족한 자원이니 쉽게 취업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저기 이력서 넣고 연락 오기를 기다리며, 혹시 몰라 경찰 공무원 시험에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 한 외국계 기업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Arrowhead Industrial Services, Inc.라는 매우 생소한 회사였는데, 공대 출신임에도 높은 토익 성적과 영어 회화 능력을 높이 샀는지 저 같은 사람에게 연락을 주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사회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회사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았습니다. 제 머릿속 레이더는 여전히 조종사가 되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나항공에서 부기장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다만 대한항공처럼 조종사 면허증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선발이 아닌 조종사 면허증과 250시간의 비행 경력을 요구하는 약간 미천한 '경력 조종사'를 대상으로 한 선발이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어느덧 31살. 조종사 시장에서는 이미 마지노선에 근접한 나이였습니다. 잘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지금까지 모아 놓은 전재산을 탈탈 털어 떠나야 하는 먼 길이었기에 부모님의 허락을 구해야 했습니다. 생소하지만, 멀쩡한 회사 잘 다니고 나이도 있는데 그냥 결혼하고 자리 잡으라는 부모님들의 뜻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진심을 다해 오랜 기간 설득하였고 마침내 부모님의 허락을 득하여 2008년 머나먼 미국 땅으로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명색이 조종사가 꿈이라는 녀석인데, 31살 미국으로 조종 유학을 떠날 때 탔던 비행기가 인생 첫 비행기 탑승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얼마 없고 나이는 많고 저는 어떻게든 최단 시간 안에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차가 없이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드넓은 미국 땅에서 자동차 없이 자전거와 두 발로 생활했고, 외식은 꿈도 꾸지 못하고 거의 모든 식사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 해결해야 했습니다. 점심도 집에서 만든 햄버거와 비행학교의 25센트짜리 커피로 해결했고, 어쩌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조금 남겨서 포장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다음 날 한 끼가 해결되니까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와 두 발로 학교, 집, 학교, 집을 왕복했고,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하여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10개월 동안 비행학교가 있던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궁하게 참고 인내하고 아끼며 살다 돌아온 것 같습니다. 덕분에 비용도 최소화하여 부모님의 도움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훨씬 빨리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조종사 자격증의 마지막 시험인 Multi-Commercial License 과정에서는 '하늘의 기적'과도 같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처절한 몸부림에 하늘도 감동을 하셨던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2008년 5월에 출국하여 2009년 3월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4월부터 진행된 아시아나항공 면장 운항인턴 공채에 당당히 합격하여 어려서부터의 간절한 꿈이었던 '조종사'의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날틀의 비행 관련 첫 번째 '브런치'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비행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루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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