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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 Sep 15. 2020

괴롭혔고, 행복하게 했고, 설레게 했던 고등학교 친구들

다정한 일기 by 혜진

은결님의 친구들 이야기를 읽으며, 저도 몇 친구들이 떠올랐어요. 

저를 괴롭혔고, 행복하게 했고, 설레게 했던 여고 시절의 친구들. 


우선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윤수. (이름은 전부 가명입니다)


살던 동네에서 제법 먼 곳으로 고등학교를 배정받아, 아침 등교 때마다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마을버스 타는 곳까지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서 20분 넘게 걸어야 했고, 마을버스를 타고 또 20분 넘게 들어가야 했거든요. 

마침 옆 동에 같은 고등학교로 배정을 받은 윤수를 알게 되어서 일 년 넘게 같이 학교에 다녔어요. 주로 그 친구의 아빠가 운전하는 자차를 같이 타고 다녔는데, 이게 고난의 통학길이 될 줄은 몰랐던 거죠.


 '태워 준다'라고 갑질을 한 건지 원래 성격이 그렇게 못됐는지 아님 둘 다인지, 차를 타는 내내 그 친구의 폭언에 시달려야 했거든요.

덥다, 춥다, 숙제 못했다, 피곤하다며 온갖 이유로 화를 내던 윤수. 그 짜증 받이를 해주는 비참한 기분이란... 대가도 없이 편하게 차를 타고 가니, 너는 참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건지, 저도 그 친구에게 싫은 소리도 못했던 것 같아요. 


학년이 바뀌고 윤수와 다른 반이 되었단 핑계로 겨우 피해 다닐 수 있었어요. 아침마다 마을버스 타기 위해 20분씩 걷는 게 훨씬 낫지,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건 견딜 수 없이 힘들더라고요. 


"야! 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이렇게 한 마디라도 할걸. 어쩜 그리 미련하게 버티고만 있었는지. 


마흔이 넘어서도 누군가 작정하고 창을 날리면 한 번씩 맞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이가 들어 처세술이 늘었다고 상처를 덜 받는 것도 아니에요.  그나마 다행인 건, 연속해서 맞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 이젠 작정하고 싸우기보단,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도망쳐 나와요. 그래, 넌 사나운 복을 가졌구나 하고.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지용이. 


뚱하고 친화력이 없는 저와는 다르게 지용인 서글서글하고 귀여운 인상을 가진 친구였어요. 저에게 없는 걸 많이 가졌던 친구라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요. 친구와 처음으로 교환일기란 걸 썼고요. 수다 떠는 스타일도 아닌데 지용이랑은 매일 같이 학교에서 만나고도 전화로 30분씩 수다를 떨었던 것 같아요. 지용이랑 더 놀고 싶어서 처음으로 교회란 곳도 가봤네요. 


그때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마음을 주었던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한 번은 지용이가 저에게 다른 친구 이야기를 자꾸 하고,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서 미친 듯이 화를 냈던 부끄러운 기억도 나고요. ㅎㅎ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만났던지라 영원히 붙어 다닐 줄 알았어요. 그러다 결혼하고 서로 집이 멀어지고, 각각 전업주부로 워킹맘으로 갈리면서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횟수도 적어지더라고요. 연락은 자주 못하지만 지금도 지용이를 생각하면 따뜻한 마음이 들어요. 

그 친구는 SNS 닉네임으로 누크모리라는 단어를 썼었는데, 일본어로 '따스함'이라는 뜻이거든요. 별명도 어쩜 자기랑 딱 어울리는 걸 골랐네 싶은, 그런 따뜻한 친구예요. 




그리고 영화. 


영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는 게, 제가 레즈비언이 아닌가 심각하게 성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친구거든요. 왜 여고에 그런 친구들 하나씩 있잖아요. 

예쁘장하면서도 약간 중성미 풍기는 친구들. 

언니 부대 만드는 여고생. 

흰 블라우스의 팔선을 항상 각지게 다려 입었던 멋쟁이 친구. 

짧은 단발머리, 약간 중저음의 목소리. 

말이 많진 않은데, 대화하다가 살짝 웃으면 얼마나 심쿵했게요. 


영화의 환심을 사보려고 열심히 편지 써서 바쳤던 기억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네요. 

역시 마흔이 넘었을 그 친구는, 여전히 중성적으로 예쁠까,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한데 소식은 닿질 않네요. 





벌써 이십 년도 더 넘은 추억을 오랜만에 소환하네요. 

한 번씩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막상 적극적으로 찾아볼 마음까진 들지 않고요. 


고등학교 때 전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던 것 같아요. 

가족과도 약간 거리를 둬야 편안한 사람인데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다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서 구속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지용이 같은 따듯한 친구가 있어서 그럭저럭 버텼지 싶네요. 

이렇게 사회성 부족한 인간이 직장에서 15년을 버티고 있다니, 역시 돈의 힘인가요. (이런 속상한 결론 ㅎㅎ)


 요즘은 랜선 이웃들과도 교류하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은결님과 글 친구로 만나 교환 일기를 채워가는 시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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