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세계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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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깨어난 곳은 황족 방계 문 에르메스 가문? 그리고 내가 하나밖에 없는 영애 디아나라고? 라는 세계관이 있다면 꼭 한번 환생해보고 싶다. 이세계 애니를 많이 봐서 그런지 서른이 넘은 지금도 종종 귀한 가문의 자제로 살아가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과자를 구울지 고민하는 게 주요 일과가 되는 태평한 삶이다. 몇 달 전 뜨개질에 빠졌을 때 동료 R과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뜨개실 사러 스위스도 가고 일본도 가고. 아무 부담 없이 그냥 가는 거야. 아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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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귀족 영애란 말하자면 시간계의 워렌버핏이다. 돈도 많은데 시간까지 많은 워렌버핏,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신분이다. 아쉽게도 현실에서는 한미한 남평 문씨의 어느 장녀지만 말이다. 아쉽다. 귀족 영애라는 신분만 생긴다면 나는 정말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는데. '알고 보니 고귀한 신분'을 기대하기엔 내가 엄마 아빠를 너무 똑 닮았다. 엄마 아빠가 고귀한 신분이라 하기엔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너무 닮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귀한 신분이라고 하기엔⋯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여하튼 나는 정말 잘 살 자신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살 거냐 묻는다면 일단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할 예정이다. 현생에서 밥벌이를 담당하는 게임 PM은 그럭저럭 돈을 벌지만 내일 퇴사하더라도 그다지 아쉽지 않을 직업이다. 좋아하는 일은 아닌데 그만두기에는 당장의 대출금 상환이 걱정돼서 꼼짝없이 근속하게 되는 상황이랄까.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난다면 에세이스트로 전향도 해볼 수 있고 공예나 수예로 작품을 만들며 살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계획만 세우고 준비물만 사놓고, 퇴근 후 딸피로 돌아와 아무것도 못하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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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귀족의 특권은 시간이 많다는 것 아니겠나. 그때가 온다면 언어도, 기술도, 잔잔바리 경험들을 모두 배우는 삶으로 일생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 계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거나 천재 거나 정말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행히도 나는 게으르고(문씨 집안사람들이 특히 먹고 드러눕는 걸 좋아한다) 천재도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펑펑 쓰는 게 제일 효율적일 거라는 판단이다. 실제로 나는 1년간 파고다 회화 수업으로 코이카에 근무하는 친구와 비슷한 수준으로 중국어를 구사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귀족 재질이라는 걸 확신했다.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에서도 돈 많은 아버지는 교육으로 딸 능력치를 팍팍 올리고, 돈이 없으면 아르바이트로 야금야금 능력치를 올리니까. 누군가 내게 돈과 시간만 때려 부어준다면 그 기대에 부응을 할 수 있을 텐데⋯! 까비.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꽃밭인 삶의 좋은 점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관심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보고 싶을 때마다 좋아하는 친구를 불러 차를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과 수다를 떨며 맛있는 저녁 시간을 보내고, 주말엔 좋은 장소에서 기쁜 감정을 함께 경험하는 나날 말이다. 맞벌이인 너와 내가 평일에 쓰레기와 빨랫감을 쌓아뒀다 주말에 해치우는 삶이 아니라, 피곤해서 소중한 누군가와의 대화를 내일로 미루는 삶이 아니라, 비용을 생각하느라 그 시간 그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삶이 아니기만 해도 답답한 짐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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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핵심은 지금 이 시간의 귀함을 느끼며, 나와 주변의 기쁨과 슬픔을 받아들일 줄 아는, 넓음을 품을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귀족 영애라는 농담을 하며 '노동이 아닌 가치에 충분히 곁을 내주는 삶'을 동경하면서도, 또 지금은 그러지 못함에 마음 한켠에 묘한 죄책감을 쌓아두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인생 32년 차. 이번 생은 이미 글러먹은 것 같은데 역시 환생이 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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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아니 또 이번 생에 못할 건 뭔가'하는 이상한 반박 심리가 생겼다. 내가 귀족 영애가 되어서 누리겠다고 하는 것들을 다시 살펴보니 뭐랄까 금수저가 되는 것 치고는 소박한 바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남은 돈을 학원에 때려 박고 태평하게 카페나 드나드는 삶을 바로 실현하기는 어렵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고 끝없이 배우고 좋아하는 사람을 챙긴다는 게 죽고 다시 태어날 정도로 어려운 일인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민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귀족 영애가 누리는 정도와 현생의 내가 타협 보는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 나도 안다. 그러나 부와 명예와 시간을 가진 후의 행복치고는 생각보다 정의하는 행복이 그리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루고 싶은 삶을 기준으로 볼때, 귀족 영애는 그 일을 별다른 준비 없이 바로 시작해도 된다는 것이고, 지금의 나는 사전 준비를 하고 대응책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워너비 라이프를 착실히 준비한다면 황족 방계 문 에르메스 디아나는 못되더라도 우리 집 영애 디아나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귀족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부로 약간의 시간을 벌어 약간의 명예를 만들어 나간다면 나도 우리집 영애로서 행복의 토대를 닦아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한 줌의 여유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멀리보고 약간의 토대만 준비해둔다면 내가 원하는 삶을 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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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부자가 되고 싶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부자가 되어 얻겠다고 하는 궁극적인 행복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의 행복을 여기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내가 아는 사실은 이세계 애니메이션에서도 처음에는 부유함이나 치트 능력을 매력으로 내세우지만 결국 스스로의 성장과 주변인과의 관계가 주인공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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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얘기는 동글이와 산책하는 동안 떠올린 생각이다. 이런 마음가짐이면 뭘 하든 성공할 것 같아 스스로가 기특해지던 참이었다. 그래서 걷는 도중 신나서 그에게 얘기했다. 내가 비록 남평 문씨의 귀족 영애는 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작가로도 대박 나고 인플루언서도 되고, 돈도 시간도 많아져서 내가 우리 집 귀족 영애가 되겠다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을 꼭 누릴 거라고.
현생 영애를 이루겠다는 나를 두고, 동글이는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근데 너는 우리 집에서 딸이 아니니까 영애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