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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나 Feb 17. 2024

게임이 잘났지 내가 잘났냐

전성기에 묻어가지 말자

'흑마법사의 계략으로 버섯으로 변해버린 인간이 본래 모습을 찾아 흑마법사를 무찌르기 위해 떠나는 여행' 컨셉의 중국 게임이 국내 게임 매출 1등에 올랐다. 간혹 미소녀 게임이 리니지의 왕좌를 위협한 경우도 있었으나 IAA(인앱광고: 광고를 시청하고 보상을 얻는 방식)를 탑재한 게임이, 그것도 중국 느낌이 묻어나는 게임이 매출 1등을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이머들은 은근히 이 소식을 통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작년에 신작을 런칭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견고했던 MMORPG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느낌을 받는다.


리니지가 시장의 최고 전성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딱 그 시점부터 게임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던 나는 리니지라이크 중심으로 게임 사업을 배웠었다. 특별히 그 장르에 내가 탁월했다기보다는 다녔던 회사가 그것만 만들어서 그랬던 거지만. 여튼 특유의 게임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 돈도 쓰고 얻어맞으면서 서서히 게임을 배웠던 것 같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과금해야 한다고 남친을 설득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던 날도 있었다.



주니어 시절부터 5년 간 대세 게임이 시장을 호령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커리어가 빵빵하려면 저런 대세 게임 몇 개는 해야하지 않을까?' 남들에게 매출 최상위권 게임을 내가 서비스했다고 으스대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흠 별건 아니고 이 정도?"라고 말할 내 모습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딱 4,5년 차스러운 미숙한 생각이었다.


그 후 운좋게 대형 MMORPG 여럿을 런칭하게 되었고, 무럭무럭 배우고 자라며 7년 차가 되었다. 완숙하진 않지만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시기가 된 것이다. 이따금씩 누군가 내게 '신작 헌터'라고 장난을 걸면 '그런 거 다 의미 없다'라고 앓는 소리를 했다. 사회생활 중에는 앓는 소리를 해야 이야기가 잘 끝나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서비스 타이틀이 내 커리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에 반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가치를 이력에 빗대어 판단하는 것 같다. 사실 겉으로 볼 때 내 이력은 그럴듯 해 보이지만, 메인 PM으로 게임을 다뤘던 것도 아니었고 장르와 회사 특성상 어느 정도 틀이 잡힌 구조 내에서 한정적인 사업 활동을 해나갔다. 업무 성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씹어먹을 만큼 먼치킨이냐 묻는다면 아닌 쪽이다. 오히려 이력만 화려한 개살구 PM이 될 것 같아 정신 차리고 이직한 케이스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런칭 전문가 또는 MMORPG 전문가로 대했다. 맹점은 대화를 해보고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잘 나가는 게임을 다뤘으니 내 커리어도 잘났다고 믿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신뢰와는 구분할 수 있다.) 게임의 전성기가 내 커리어의 전성기가 아니라는 것을 7년 차인 나도 아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트로피 하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맹목적이다. 아 물론 내가 일을 좀 잘하긴 했ㄷ..


스스로의 가치를 이력으로 퉁치려는 분도 생각보다 많았다. 이 게임을 서비스했으니 나는 대단한 PM이다라는 논리시다. 물론 능력이 좋은 인력을 시장성 있는 프로젝트에 영입하는 경우도 많지만, 경험상 좋은 프로젝트를 맡는다는 것은 대부분 운이 8할이다. 마침 내가 있던 팀이 터질 예정이거나, 내 연차급이 필요하거나, 마침 우리 조직이 그걸 맡게 되었거나 등등. 이따금씩 스스로 취할 때면 실장님이 기강을 쎄게 잡아줬다. "너네가 잘나서 이 프로젝트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PM을 앉혀놔도 너네랑 똑같이 할 수 있어. 이번엔 너네가 기회를 잡았을 뿐이라는 걸 잊지 마." 한 귀로 흘려들었더니 정확히 저렇게 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저런 톤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근데 맞는 말이다. 그냥 맡았던 프로젝트가 달랐을 뿐, 돈 많이 버는 프로젝트의 PM 업무가 눈에 띄게 다르거나 뛰어난 부분이 있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PM으로서 스스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한 업무 디테일과 자부심이 아닐까 싶다. 또 마무리는 마음가짐으로 빠지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내 생각에 믿을 건 대세 게임을 했다는 이력이 아니라 진짜 나밖에 없어서 그렇다. 대세 게임을 맡을 수 있는지도 까보기 전에는 알 수 없고, 그 잘난 게임도 시간이 지나면 영향력이 희미해지니까. 나만해도 '옛날 OO게임 내가 했었잖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PM의 업무 범위가 그때마다 다르다 보니 프로젝트의 흥행에 커리어를 기대는 부분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우리 스스로 보탬이 되고 기여는 했을지언정 흥행은 게임이 잘난 거지 내가 잘난 게 아니다.


물론 흥행작을 맡았다는 것이 무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패스는 달리는 사람에게 간다는 것은 내가 일하게 하는 기준 중 하나이고, 나 역시 달려가며 이력을 만들어가는 중이니까. 다만 우리가 좀 더 떳떳해지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프로젝트 뒤에 숨어서 커리어를 부풀리지 말자고. 적어도 나는 꼭 그러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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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지스타에는 원신 같은 게임들이 대거 출현했다. 리니지라이크가 저물고 원신라이크가 답이 되는 시대가 오려나 생각했다. 다만 그때도 답은 하나이지 않을까. 어떤 프로젝트를 맡았냐가 아닌,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냈느냐를 당당히 답할 수 있는지. 언제까지 지겨운 밥벌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직서를 던지기 전까지는 스스로 떳떳하게 일하고 싶다. 변할 수 있는 것들을 덜어내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 같다. 요란한 인기, 반짝이는 매출을 걷어내고 나의 성과와 쓸모를 돌보는 일과를 보내야겠다.


(+) 전도유망한 프로젝트를 맡으면 성과급을 많이 받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걸 체감하며, 그냥 내 일이나 잘하자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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